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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바 Oct 26. 2022

죽음에게 배우는 다정함

런던에서 한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갔을 때였다. 한 직원이 우리를 포함한 많은 손님들에게 굉장히 불친절하게 굴었다. 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불필요한 무례였다. 괜히 다른 사람의 행동으로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자하며 마음을 다잡았지만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밥을 소화시키는 건지 화를 소화시키는 건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데 옆 테이블에 앉아서 조잘조잘 떠들던 아이가 가게에 나오는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눈이 마주친 나도 고개를 까딱이며 흥을 돋워줬더니 배시시 웃으며 더 신나 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 순간 언짢은 기분이 말끔하게 개어버렸다. 아이의 밝은 에너지가 구름처럼 뭉개 뭉개 퍼져 그 아이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상의 더럽고 추악하고 못된 것들을 나의 시야에서도 가려주었다.


그날 오후 집에 돌아오자마자 명상을 했다. 발코니에 앉아 점점 분홍색으로 물드는 하늘을 앞에 두고 눈을 감았다. 노을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잠시 죽는 순간을 실감 나게 상상하고 모든 것에 미련을 버리는 과정이 홀가분하고 재밌기까지 했다. 명상이 끝나고 눈을 떠서 본 하늘은 전에 없이 영묘했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되어 난생처음으로 하늘을 보는 것 같았다. 


아무리 명상을 하고 책을 읽어도 나는 아직 세상의 많은 것들에 발끈하고 신경질을 냈다. 이쯤이면 이런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지 않을까 답답스러웠다. 사람들이  기준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 판단하고 신경 쓰고 안달하고 미워하는  모습이 싫어서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곁에 두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도 종종 나를 실망시켰다.


게다가 내 주변 남자들은 어찌 된 일인지 하나같이 소통이란 걸 할 줄 몰랐다. 누군가가 A를 얘기하면 B도 아닌 C 얘기를 하며 자신의 지식을 자랑했다. 공감도 교류도 없는 오로지 아는 체만을 위한 대화, 아니 말하기였다. 나는 불완전한 그들을 향해 속으로 혀를 끌끌 찼고 저 부분만 고치면 괜찮겠는데라고 생각했다. 잘난 척을 들어주기가 고까워 딴청을 피우기도 했다. 남자들의 귀는 폼으로 있는 건가라는 고찰을 진지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일 싫은  ‘ 사람은  이럴까,  사람은  저럴까, 부분만 고치면  좋을  같은데라고 판단하고 끌탕하는 나의 비판적인 모습이었다. 마음이 무던하거나 고와서 남들 흠에 둔한 사람이고 싶었다. 나의 판단으로 가장 괴로운   자신이라는  직시했지만 분별하는 마음은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오직 죽음에 대한 생각만이 나를 너그럽게 했다. 어차피 나도 그들도 나뭇잎처럼 바람 따라 세상을 돌다가 삭아서 금방 사라질 텐데 시비를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Be kind, for everyone you meet is fighting a hard battle.
친절하라, 네가 만나는 사람 모두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이안 맥클라렌이라는 성직자가 한 말이다. 같이 바스라지고 있는 존재들에게는 무한히 너그러워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인간의 사소한 흠은 어찌어찌 무시한다 쳐도 도덕이나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악인을 보면 울화통이 치밀었다. 가볍게는 운전을 뭣같이 하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지성과 평화의 21세기에 다른 나라에 쳐들어가는 독재자까지 모두 매한가지로 나의 평화를 짓밟았다.


그들에 의해 인류애가 바사삭 부서지고 삶의 모든 불결한 자취를 보고 나면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하는 것이 훨씬 쉬웠다. 이 복잡한 생, 떠날 때 후련할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른 아침 가는 거미줄 위에 맺힌 이슬처럼 나도 그들도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 좋았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곧 사라질 나라는 사람의 기준에 맞춰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게 쉽게 스러질 주제에 어째서 자신의 기준이 절대적인 것처럼 편협하게 사는 것일까?


거의 천년 전 이 땅에 살았던 이슬람 시인 루미는 이렇게 말했다. “악행과 선행이라는 개념 너머에 너른 들판이 있다. 그곳에서 당신을 만날 것이다.”


미워하는 감정과 싫어하는 감정은 쓰레기처럼 악취를 풍겼고 핏줄에 퍼진 독처럼 해로웠다. 이 지구는 연극무대이고 다들 각자 맡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뿐이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세상에는 다양한 인간군상이 있기 마련이고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만 있다면 천편일률적인 그 세상은 말도 안 되게 단조롭고 따분할 게 분명하다.


모든 사람의 세계에 나는 다른 역할을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의 세계에서 나는 악역을 맡고 있는데 그건 진짜 나와는 상반될 수도, 똑같을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의 세계의 나의 역할을 합친 게 진짜 나라면 나는 아마 신과 같이 여러 모습을 한 존재일 것이다. 누군가의 세계에서 내가 악역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어떤 세계가 나에게 가장 중요한 세계인가? 그 세계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 눈을 감고 죽음을 떠올렸다. 죽음을 명상하고 나면 아주 잠시나마 무민마마처럼 너그럽고 푸근한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무민마마는 수면 가까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 연못 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무민마마가 말했다.
“저 밑에서 뭔가 반짝거리는구나.”
무민이 대답했다.
“엄마의 금팔찌예요. 스노크메이든의 발찌도 있고요. 좋은 생각이죠?”
무민마마가 말했다.
“정말 근사하네. 이제부터 장신구는 갈색 연못에 보관하자꾸나. 그게 훨씬 더 예뻐 보이니까.”


무민마마가 말했다.
“당신이에요? 집에 악당이 들이닥친 줄 알았잖아요.”
무민파파가 말했다.
“사과주를 꺼내려던 것뿐이에요. 그런데 웬 머저리가 선반 끄트머리에 이 우스꽝스러운 접시를 놔뒀지 뭐예요.”
무민마마가 말했다.
“차라리 깨진 게 낫네요. 못생긴 접시였거든요.”


나의 롤모델인 무민마마는 아들이 금팔찌를 연못에 처박아도 남편이 그릇을 깨도 다정하기만 하다. 나는 죽음과 무민마마를 교본으로 삼아 뾰족한 마음을 둥글게 다듬었다.


얼마 전 단골 카페의 주인이 바뀌었는지 이름도 달라지고 직원들도 물갈이됐다. 새로운 직원들은 하나같이 불친절했다. 기분이 상해 커피를 받고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새로운 직원이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닐까 으레 하는 의심도 했다. 


명상을 하고 카페에 간 어느 날, 누군가 나에게 불친절해도 좋은 기분을 유지할 수 있고 친절함으로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원은 나에게 억하심정이 있는 게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인생을 헤쳐나가고 있을 게 분명했다. 뚱한 얼굴과 짧은 말투로 나를 맞는 직원에게 웃어주고 고맙다고 말했다. 팁도 줬다. 그렇게 며칠간 비슷한 양상의 소통이 이어졌다. 


그런데 엊그제 그 직원이 나에게 자기 이름을 말해줬다. 자기 동료 이름도 알려주더니 커피를 기다리는 나에게 할인쿠폰도 줬다. 처음으로 그의 미소를 볼 수 있었다. 마음속에 단단한 기쁨이 차올랐다. 


가끔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신호등에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시점으로 삶을 보는 연습을 한다. 드레드락을 하고 코를 뚫은 저 남자의 시선에서 보이는 세상을 상상하며 그에게는 나도 그 세상의 일부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개운해졌다. 그는 그만의 사고 흐름을 따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가 평생 그의 관점으로 본 세상이 하나의 영화라면 나의 관점에서 보는 영화도 유일하다. 우리는 이 영화의 감독이다. 전 우주를 통틀어 온 시간을 한데 묶어도 오로지 하나일 우리 인생의 영화. 내 영화의 관점은 너그럽고 다정할 것이다.


내 자아와 영혼이 붙은 접착면이 조금 헐거워진 것 같다. 가슴에 민트 잎을 띄운 탄산수를 확 들이부은 느낌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아이스티처럼 들이마신다. 설탕처럼 녹아들어 간다. 세상에 대한 미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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