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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바 Oct 29. 2022

종착역은 죽음입니다

어느 오후, 나는 실패자스러운 기분에 짜게 절여지고 있었다. 시작은 메일함 정리였다. 분명 몇 백통이나 쌓인 메일 속에서 스팸메일을 찾아 지우고 중요한 메일을 저장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몇 시간이 흘러있었다. 오래된 메일들을 읽다가 본의치 않게 과거 여행을 한 것이다.


오래된 과거의 이메일들은 회사 상사들이 나를 칭찬하는 내용이었다. 미국인 상사와 프랑스인 상사는 나를 Rolling Diamond라고 부르며 중요한 미팅마다 데리고 다녔고 미국과 싱가포르로 길게 트레이닝을 보내주기도 했다. 나는 그때 칭찬을 무럭무럭 먹고 빛나던 나의 모습과 초라한 지금의 꼴을 견주며 탄식을 했다.


일을 쉰 지는 이 년이 넘었다. 남편 덕분에 입에 풀칠할 걱정 없이 편하게 꿈을 좇고 있지만 성질이 더러워서인지 누군가에게 의존한다는 게 결코 편하지 않았다. 노동으로 채워지지 않는 시간들 속 몸은 편안했지만 정신은 여전히 피곤하고 불안했다. 자연스레 집안일을 다 도맡아서 하게 되었다. 남자들과 똑같이 자아실현을 목표로 살아야 된다고 교육을 받은 MZ세대 여성인 나는 한낮에 냉장고 바지를 입고 빨래를 개는 내가 실패작이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소금을 잔뜩 친 것 같은 짭짤한 생각을 씻어내려 명상을 하려고 앉았다. 유독 어두운 생각들을 떨치기 어려운 날이었다. 처음부터 좀 희한한 기분이 들었다. 구름같이 텅 빈 것 같기도 했고 감은 눈앞에 세상의 모든 잡동사니가 만화체로 떠다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순간엔가 무아지경의 상태로 접어들었다. 꼭 감각하는 뇌와 생각하는 뇌가 분리된 것 같았다. 감각하는 뇌에 온 힘을 다해 집중하면 몇 초 동안이지만 생각하는 뇌는 전원이 꺼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1년 반이상 들어온 공기청정기 속에서 새로운 소리를 발견했다. 깜깜한 폭포 같은 소리였는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였다. 단순한 공기청정기 소리 속에도 수천 가지 소리가 있는 모양이다. 그 소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어느 순간 성공이나 실패 같은 단어는 더 이상 나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일을 관두고 쓸모없는 인간, 잉여인간이 된 느낌에 한동안 괴로웠다. 글을 써서 자아실현을 하고 싶고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더는 이루고 싶은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하며 그것도 나의 욕심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밤색으로 익지도 못한 채 푸르딩딩한 얼굴로 떨어지고 지나가던 행인에게 밟혀 으깨진 도토리도 나처럼 자기 생의 쓸모없음을 한탄하고 있을까? 남들처럼 맛나는 묵이 되지 못함을 비통해하고 있을까? 무언가를 해내서 남에게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것 자체가 나의 자의식 과잉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내가 뭐라도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나를 괴롭힐 뿐이었다.


죽음에 대한 명상 뒤에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차분한 내가 보였다. 죽기 전까지 그 어느 누군가에게도 쓸모를 인정받지 못하고 그대로 삶을 마감한다 해도 그게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 어느 신도 나를 원망하고 책망하지 못하리라는 걸.. 나를 잊고 세상으로 녹아들어 가던 그 순간 느꼈다.


죽음이 성공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게 한 적은 전에도 있었다. 회사 다니면서 우울증을 앓고 있을 때였는데 남들이 괜찮다고 하는 회사다 보니 그만 두지를 못하고 있었다. 자살충동이 올만큼 우울증이 심해져도 그걸 못 놨다. 실패자가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지금은 불행한 승자보다는 행복한 패자가 되기로 평화협정을 맺은 상태다. 패자가 될 바에 죽음을 택하겠다는 극단적인 생각이 얼마나 무모하고 난폭한 무지인지 이제는 안다.


중증 우울증을 극복하고 행복해진 지금은 죽음에 대해 실감 나게 명상을 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 성패를 떠나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지 나 자신에게 계속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이다. 인생이 얼마나 유한적인지 알게 되면 삶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일이 훨씬 쉬워진다. 예외 없이 밤이 찾아오듯이 죽음이 살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더 소중한 것들에 마음을 쓰게 된다.


19세기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인생이란 불안이란 열차를 타고 절망이라는 터널을 지나서 죽음이라는 종착역의 이르는 실존이라고 했다. 어쩌면 나는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죽음에 기대 불안과 절망을 잊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년 전부터 남편과 탱고를 배우기 시작했다. 한 번도 춤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었던 나는 탱고가 너무 어려웠다. 나보다 나이도 많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나를 비웃듯이 능수능란하게 춤을 추는 걸 보면 자존심이 상해서 그만두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바보 같다는 기분이나 뭔가를 못한다고 느끼는 게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그건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본 지 오래되었다는 말과 같았다.


나는 삶을 즐기기 위해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당장 지금이라도 죽는다고 생각하니 내가 뭘 잘하고 못하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뭐가 됐든 전에 하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하나라도 더 하고 죽는 게 중요하지, 완벽한 춤을 추겠다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건데 완벽한 춤은 춰서 뭐하나?


어찌 됐든 죽음은 우리에게 불완전에 대해 상기시켜 준다. 죽음으로 인해 세상 그 무엇도 완전해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나면 우리는 조금 더 미흡해지고 더더욱 행복해진다. 완벽함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면 자유로워질 수밖에 없다.


나는 뒷마당에서 이쁘게 표로롱 노래를 하는 새보다도 못한 존재지, 태어나서 한 것도 없고 남을 제대로 돕거나 나의 생명에게 주어진 몫을 해내지도 못하고 이렇게 의욕이 없고 하고 싶은 게 없고 게을러서 도대체 주부 말고 무엇을 할 것이며…(실제론 주부도 힘들고 어려워서 못 한다)라고 생각하던 나는 30분간의 명상 후 극강의 행복한 나로 돌아왔다.


죽음을 떠올리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실패한 경험에서 오는 수치심에 입술을 씰룩거리지 않아도 된다. 실패한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더 이상 목적지가 쓰여지지 않은 열차표를 쥐고 창밖을 두리번거리지 않아도 된다. 열차는 더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터널은 더이상 어둡지 않다. 우리는 종착역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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