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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바 Oct 28. 2022

나의 영원한 흑기사, 죽음

인생이 쉬울 거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생은 스리슬쩍 일부러 장애물이 놓인 만 찾아 우리를 인도하는  같기도 하다. 중학교  허들을 넘게 시키던 체육선생님처럼 장애물을 뛰어넘으며 근육이라도 키우라는 걸까?


모든 짐을 창고에 처박고 뉴욕과 런던을 오가는 생활을 하면서 나의 글 대부분이 고난의 의미를 찾는 내용이 되었다. 안 그러고 싶어도 자꾸 궁금해졌다. 도대체 왜? 인생은? 이렇게? 힘든 것인가?


개인에 따라서 나의 시련들이 엄살이나 투정이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은 나의 주관적 힘듦을 조금도 덜어주지 않았고 나는 또 죽음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인생이 근육 특훈을 빌미로 나를 괴롭힐 때면 삶의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흑기사를 미리 부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가 인생이 던져놓은 이 모든 암초들을 박살내고 바다를 가른 뒤 나를 데리고 가리라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놓였다. 내가 먼저 부르지 않고 그가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용기가 생기기도 했다. 힘들면 힘들수록 반드시 나를 잡으러 올 흑기사의 존재가 고마워졌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사바세계라고 부른다고 한다. 산스크리트어에서 온 사바라는 말은 인내를 의미한다. 결국 세상은 참고 견뎌야 하는 땅인 것이다. 그 참고 견디는 행위 자체가 인생인 걸까. 법정스님은 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셨다.


만일 우리가 평탄한 길만 걷는다고 생각해 보라. 십 년 이십 년 한 생애를 늘 평탄한 길만 간다고 생각해 보라. 그 생이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그것은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오르막길을 통해 뭔가 뻐근한 삶의 저항 같은 것도 느끼고, 창조의 의욕도 생겨나고, 새로운 삶의 의지도 지닐 수 있다. 오르막길을 통해 우리는 거듭 태어날 수 있다. 어려움을 겪지 않고는 거듭 태어날 수 없다.


런던에 살 때 이스트본이라는 남부 도시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바다를 끼고 있는 휴양도시인 그곳에 간 이유는 오로지 하나, 세븐시스터즈를 보기 위해서이다. 세븐시스터즈는 하얀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절벽에 서있는 7개의 언덕이다. 지하철에서 만난 한 독일 커플에게 영국에서 가장 좋았던 곳을 묻자 그들이 세븐시스터즈라고 입을 모아 말한 게 계기였는데 이제는 나에게도 영국에서 가장 좋았던 장소가 되었다.


처음부터 세븐시스터즈의 끝을 볼 계획은 아니었다. 첫날에는 반 정도를 보고 다음 날에 마저 걸으려는 계획이었지만 이 계획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거였다.


하이킹 시작부터 우리는 지구 어디서도 보지 못한 경치에 푹 빠져버렸다. 사방이 무한대로 펼쳐져 있었다. 왼쪽으로는 새파란 바다, 오른쪽으로는 양 떼와 말들이 풀을 뜯는 초록빛 초원, 앞뒤로는 하얀 절벽. 즐거운 흥분에 세븐시스터즈의 중간지점까지 무리 없이 도착했다. 언덕이 꽤 가팔랐지만 풍경에 취해 피곤을 느낄 새가 없었다.


남편은 버스시간이 있으니 이쯤에서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냐고 했지만 나는 이왕 온 거 끝까지 가자고 우겼다. 처음 지점처럼 끝 지점에도 휴게소나 주차장이 있을 테니 거기서 우버를 부르면 된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두 시간 반 만에 세븐시스터즈의 막내까지 도착하고야 말았지만 문제는 주변이 허허벌판이라는 거였다. 거기서 만난 호방한 영국 여성한테 여기로 우버를 부를 수 있냐고 묻자 그녀는 대놓고 우리를 비웃으며 껄껄 웃었다. 우리가 너무 지쳐서 돌아갈 수가 없다고 망연자실하자 자기는 여기서 수영 좀 하다가 다시 걸어서 돌아갈 계획이라고 해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어깨에 앉은 파리를 내쫓듯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로 할 수 있어, 별 거 아니야(Come on, it’s not that bad. You can do it)라고 해줬다. 다부진 그녀의 말에 작은 불꽃같은 용기가 일었다.


그러나 세븐시스터즈의 거리는 무려 13킬로미터로 6시간이 걸리는 코스였다. 우리는 물도 떨어지고 쫄쫄 굶은 상태였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눈앞에 처음처럼 다시 쭉 늘어선 일곱 자매를 보며 우리는 한숨만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발을 내디뎠다. 오르막과 내리막의 차이가 얼마나 극명한지 오르막길에서 우리는 말 한마디 없이 숨만 헉헉 내쉬었고 내리막에서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피식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나 죽는다 하고 벌러덩 나자빠질 상태였지만 별도리가 없어 마른침만 꼴깍 삼키며 계속 걸었다. 눈앞에 수직으로 거대하게 솟은 언덕을 보면 도저히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한걸음 한걸음 나죽었다하고 오르다 보면 어느새 정상이었다. 그렇게 정상에서 하얀 절벽과 푸른 바다, 초록빛 초원을 내려다보면 다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자신만만해졌다. 그리고 풍경을 즐기며 내리막을 걷다 보면 다시 거대한 언덕이 눈앞에 와 있었다. 또다시 시작이었다. 끝이 없었다. 이 과정을 일곱 번을 반복하다 보니 언덕을 오르고 내리는 것이 인생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 보면 도무지 오를 수 없을 것처럼 잔인하게 가파르고 무시무시하게 높은 언덕도 한걸음 한걸음 걷다 보면 어느새 내 발 밑에서 끝이 난다. 금세 꼭대기에 서서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게 된다. 내리막은 즐겁고 경쾌하다. 언제 힘들었냐는 듯 살 맛이 난다. 나는 야생화가 즐비한 내리막에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누워서 데굴데굴 굴러내려 왔다. 어지러웠지만 끝내주게 재밌었다.


헤물렌은 큰 한숨을 내쉬며 축축한 모래밭에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말했다.
"정말 너무해! 나처럼 가엾고 아무 죄 없는 식물학자가 도대체 왜 평온하고 조용히 살 수 없는지 모르겠네!”
스너프킨이 반색하며 말했다.
“삶은 원래 평온한 게 아니야.”


나는 삶의 대부분을 헤물렌처럼 살아왔다. 도대체가 왜 삶은 평온할 수가 없는 거지라는 원망에 차서 실은 모든 이의 삶이 그렇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불행을 나타나는 단어 Disaster의 어원은 ‘불길한 별'이다. 점성술의 영향이 컸던 과거에는 불운이나 불행이 천체의 움직임에서 도래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다 벌거벗은 채로 여관에서 쫓겨난 날 모네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악한 별 아래에서 태어난 게 분명해.” 당시 사람들은 별이라도 탓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나 전염병 같은 큰 불행도 견뎌냈던 걸까.


살다 보면 사악한 별처럼 이해할 수 없는 시련과 역경, 장애물들이 찾아온다. 그때마다 우리는 겁을 먹고 의기소침해지지만 결국엔 살아남는다. 눈앞에 말도 안 되는 높이로 솟아있는 그 언덕을 결국은 넘어선다. 어떻게 고비를 넘겼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아직 걷고 있다는 것이다.


스타워즈가 참고했다고 알려져 유명해진 책 ‘천 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조셉 캠벨은 대부분의 신화가 하나의 원형 신화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킬레스의 그리스 신화부터 프로도의 현대 판타지까지 모든 영웅 이야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고 한다. 출발, 통과의례, 귀환이 그것이다. 미숙한 우리의 영웅이 안정된 삶을 떠나 위험한 모험을 떠나는 것이 출발이고 영웅이 되기 위한 고난과 시련을 겪는 것이 통과의례이다. 그리고 떠날 때와는 180도 다른 사람이 되어 귀환하는 것이 영웅 서사의 마지막 여정이다.


인간이 수천 년 동안 무의식적으로 똑같은 구조의 비슷한 이야기들을 좋아해 온 이유는 이 이야기들로부터 발견하는 고난의 의미와 위안에 있다고 본다. 여정이 힘들면 힘들수록 영웅은 강인해진다. 우리도 삶이 힘들수록 살아남았다는 것조차 영웅적일 수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프로이트는 모든 생명의 목표가 죽음이라고 했다. 언제든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은 불행조차 팔 벌려 맞이한다. 어떤 고난도 언젠가는 끝이 나고 나의 흑기사가 말을 재촉하며 밤길을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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