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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바 Oct 11. 2022

죽음이 자유를 데려왔다

나는 정말이지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하루 종일 성가시게 엉겨 붙는 생각들로부터, 지치지 않고 나의 평화를 뭉개버리는 감정들로부터, 무엇보다도 그 모든 것의 근원인 내 자신으로부터. 그래서 나 자신을 잊으려 명상을 시작했다. 나를 잊고 ‘노바디'가 되려는 소망은 어쩌면 본능적이었다.


우리는 살아온 모든 순간의 집합체이다. 어떤 순간들은 미치도록 부끄럽고 수치스럽다. 어떤 순간들은 벅차오르도록 흐뭇하고 만족스럽다. 그러나 이 모든 순간들은 어떤 짐처럼 우리를 짓누른다. 과거의 모든 실수와 악행, 아무도 모르는 은밀하고 해로운 사념들까지 모조리 그 자리에 있다. 피부에 스며든 타투처럼 그 어느 것도 지워지지 않는다.


명상을 하며 나를 잊는 순간이 좋았다. 무아지경으로 표현되는 그 순간들은 기껏해야 5초 정도로 아주 짧았지만 그 찰나에 나는 무한한 자유로움과 평화를 경험했다. 살면서 그 어떤 행복도 내게 주지 못한 무궁한 자유였다. 그 몇 초 동안 나는 태고의 바다처럼 순수했고 반짝이는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이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자아를 잊는다는 건 게임 속 캐릭터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를 인식하는 것처럼 시스템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도록 설계된 것 같았다.


자아를 쉽게 잊기 위해 나는 죽음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 죽음의 순간에 대해 골똘히 명상하고 나면 사실은 내가 존재하지 않음을 납득하기 쉬웠다. 내 존재가 사라질 그 순간이 기필코 오고야 만다는 생각이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눈을 감고 최선을 다해 나의 죽음의 순간을 상상한다. 늙고 주름진 나는 어느 병실 안 침대에 누워있다. 침대 주변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아직 내 삶에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서있다. 나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창밖으로 아름답게 지고 있는 노을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를 위해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때가 되었다고, 내 인생 가장 위대한 모험을 떠날 준비가 되었다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감기는 눈 속에 조금이라도 더 노을을 담으려고 노력한다. 저 경이로운 하늘을 인간의 눈으로 보는 게 마지막이라는 것에 일말의 아쉬움을 느끼며 천천히 죽음에 이른다.


명상으로 어설프게나마 죽음을 경험한 나는 온몸의 때가 벗겨진 듯 홀가분하다. 세상에서 입은 때나 마찬가지인 에고를 벗고 나자 투명해진 몸은 두둥실 가뿐하게 떠오른다. 살랑이는 가벼운 바람에도 날아갈 정도로 산뜻한 존재가 된다. 나는 바람처럼 세상 만물에 스며든다. 세상 전부가 내가 된다.


자아를 벗고 세상 전부로 녹아들면 더 이상 자신을 과시하려는 자아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누구나 다 자아를 전시하려고 한다. 나는 끊임없이 존재의 가치를 확인받으려는 시도를 하는 나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들에게 지쳐있었다.


지금 순간을 온전하게 느끼며 타인과의 소통이나 커넥션에 집중하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모두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데 혈안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듣지 않고 어필만 했다. 내가 만난 거의 모두가 그랬고 인정받는 데에는 실패하거나 성공했는데  누구에게도 좋은 경험은 되지 못했다.


나는 이에 동조하며 같이 안달하거나 관조하면서 나의 자아를 뽐내고 싶은 열망에 휩싸였다. 나에게 질문만 해준다면 내가 얼마나 그들과 비슷한 사람이고 그들과 깊게 공감하는지 알려줄  있었다. 나의 어떤 성취들을 드러내야 그들이   좋아할지 추리하며 조바심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끝끝내 질문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사람도, 미국 사람도, 이탈리아 목사도, 미얀마 비구니도, 한국 비구니도  마찬가지였다. 듣는 중에도 머릿속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떠들고 있는 표정이었다.


우리의 자아는 비교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받기 위해 타아를 필요로 한다. 모두가 그렇다. 누구나, 모든 순간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해줄 누군가를 찾아 헤맨다. 인간은 한없이 외로울  밖에 없는 존재인 것도 같다.


그런 갈증 없이 충만하게 존재하고 싶었다. 부족함이나 필요가 없는 상태로 세상과 어울리고 싶었다. 받아들여지려 애쓰는 존재가 아니라 느긋하고 편안하게 존재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가장  목표는 행복이었고  행복의 조건  하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거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 유용하게 쓰이는 거였다. 그래야 나의 삶도 의미를 찾을 거라 생각했다. 만큼 나는 부자유한 사람이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때만 이로부터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질  있었다. 나는 죽음의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고  누구에게도 가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 채로 사라지는 자아를 상상했다. 명상이   때는  순간에 정말 몰입할  있었는데 그다지 아쉬움이 없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살 날이 남아서 가치를 증명할  있는 기회가 남아있 나만 안달복달했다. 죽음을 앞둔 나는 무익하게 스러지는 나의 자아에 대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노을을 조금  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게 죽음이 자유를 데려왔다.


어느 스님에게 어떻게 자아를 내려놓을 수 있는지 물었다. 스님은 자아는 사는 동안 내려놓을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도대체가 자아를 내려놓아야 깨달음의 길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영혼은 훨씬 더 충만해지고 내 삶은 더 행복해질 것 같은데 그 내려놓고자 하는 것도 자아의 욕심이라 영원히 끝에 닿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 위를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려놓을 수 없다니. 살짝 편안해지고 아주 아득해졌다.  


그러나 정말 내려놓은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하고 나서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져들었을 때이다. 무아지경이 왜 무아지경인지 알 것 같았다. 나를 지우는 순간 나의 자아에 부과된 의무, 한 생명으로서 짊어진 삶의 무게 같은 것이 다 사라지고 정말 무의 상태에서 편안히 쉬는 느낌이 든다. 폭우처럼 나를 때리며 쏟아지는 생각 방울들도 사라지고 나라는 존재까지 잊는 그 황홀경에 머무르는 시간은 채 몇 초가 되지 않지만 집중만 하면 언제든지 다시 들어갈 수 있는 세계이다.


내가 없는 상태는 자유 그 자체이다. 행복하다. 나도 세상도 사라지고 공기청정기의 소음 속으로 녹아든다. 그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중립의 소음 속에 진리가 있다. 만물이 들어있다. 나를 죽인다. 죄가 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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