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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바 Oct 30. 2022

프롤로그: 죽음에 기대기 시작한 이유

죽음만이 유일한 구원이라고 믿던 때가 있었다. 깨어있는 모든 순간이 고통스러워 잠에 드는 순간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다음날 아침이 오지 않기를 빌었다.


그런 밤들은 고통스러웠지만 나를 변화시켰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당장 죽을 위험이 없는 사람의 허세일 가능성이 높지만 확실히 전처럼 죽음이 무섭지는 않았다. 죽음도 마다하지 않을 처지를 겪고 보니 세상이 조금 쉬워졌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늘 관을 집에 두고 보며 죽음에 대해 얘기했다고 한다. 죽음에 대해 쉬쉬하지 않았다. 삶에 대한 감사함을 배가시키는 용도로 죽음을 써먹었다.


나도 죽음을 이용하기로 했다.


명상으로 초월적인 의식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수많은 종교와 영적 전통, 그리고 과학적 연구들이 입증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시작했다. 자아를 포함한 모든 것과 최대한 실감 나게 작별인사를 했다. 어떤 날은 정말로 두려워졌고 거의 모든 날에 행복해졌다.


당장 죽어도 좋다는 마음은 생명의 본질을 관조하게 한다. 역설적이게도 이 진리 속에서 모든 생명과 연결돼 있음을 느낀다. 존재하는 모든 것과 유한함이라는 운명을 공유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지는 별을 보고, 시들어 가는 꽃망울을 보고, 가을의 끝자락을 보고 우리 속에 순환하는 우주를 직감한다.


죽음을 떠올린 순간 삶이 빛나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사랑으로 가득 차 넘실거리고 더 이상 나 자신에 집착하지 않았다. 현실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들을 넘어 삶 자체에 감사하게 되었다. 희붐하고 바삭한 아침이 오면 곧 늙고 파리한 밤이 오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조셉 캠벨의 영웅 서사, 영웅의 여정에서 '고래 뱃속'은 주인공이 상징적으로 죽고 다시 영웅으로 재탄생하는 단계를 말한다. 고래 뱃속은 낡은 자아가 죽는 무덤인 동시에 다시 태어나 부활하는 자궁이다. 죽음은 삶만큼 일상에 밀접해있다. 우리는 늘 무언가와 작별하고 있다. 사람, 밤, 계절을 보내고 또 다른 아침을 맞이한다. 죽음을 버리고 삶만 취할 수는 없다.


그림자처럼 뒤에서 따라오는 죽음을 돌아볼 때 우리는 비로소 삶에서 자유로워진다. 죽음만이 정말 유일한 구원인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이 올 거라는 약속은 없지만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밤이 우리를 향해 서서히, 잰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때까지는 그리 길지도 멀지도 않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을 조금 더 단단히 버텨낼 수 있다. 힘들었던 이 날도 끝나고 밤이 오면 잠에 빠져 자유 속을 헤엄칠 테니까. 그 밤은 무조건 오고야 말 테니까.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은 기분으로, 자유로 가득 찬 마음으로, 나만의 노래를 부르며 밤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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