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이는 좋겠어. 엄마가 엄마라서"
아침 내내 아이 밥을 우당탕탕 차리고 있는 나를 보고 남편이 이야기한다.
"왜 부러워? 나 같은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어?"
"아니, 나도 우리 어머니가 끔찍하게 생각하긴 했지. 형편이 안 돼서 잘해줄 틈이 없었지만"
그래, 부모님이 있었지 나에게도. 평생을 툴툴거리며 마음속으로 화해하지 못했던, 변한 것은 없지만 어느새 애잔해진 나의 부모님.
친오빠에 대한 극진한 사랑으로 바나나와 같은 귀한 음식은 오빠의 입으로만 들어갔었지. 오빠에게 모든 관심이 몰빵되는 것이 손주 대까지 여전하셔서 가끔 나를 분노케 하는 부모님. 부모의 사랑은 절대적이란 말을 믿지 않게 만들었던, 그러나 너무나 선량하신 두 분.
그 부모님이 보인다.
20년 전 부모님을 파리에서 가이드한 적이 있었다. 모든 짐을 내가 짊어지고 한인 민박이며 지하철이며 누비고 다녔었지. 오로지 패키지만 다니셨던 친정아버지는 젊은이들은 참 좋겠어 라며 마냥 부러워하셨더랬다. 그 여행이 평생의 수많은 좋은 곳 중 한두 손가락에 뽑히셨다. 그때 부모님을 늙고 아무것도 못 하는 노인분들로만 여겼었는데 지금 와 보니 나의 십 년 뒤다. 지금은 안 아프신 곳도 없고 하루하루 살얼음 같은 두 분은 어디 여행을 가기도 어렵다. 납골당을 준비하시고 흡족해하시는 모습을 보며 지난 세월의 앙금 따윈 차마 자리 잡을 수가 없다.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의 마음을 이해한다는데 더 잘 모르겠었다. 본인이 더 중요한 거 같은 흔치 않은 태도가 싫었던 걸까 아님 넘버링 된 자식 애정 순에 영 토라져서였을까. 그게 무엇이든 지금은 다 상관이 없다.
결국 부모는 자식에게 지는 사람이란 건 같다.
얼마 전 한 달을 아프던 다 크다 못해 늙은 막내딸이 안쓰러워 눈물을 흘리시기까지 하는 부모님에게 나는 왜 이리 각박했을까. 이렇게 마치 혼자 태어난 양 데면데면하고 성인이 되자마자부터 제멋대로 산 나도 호락호락한 자식은 아니었다. 서툰 부모님과 같이 되고 싶지 않아 노력해 벗어날 순 있었으나 서툰 자식이긴 하다. 우리의 서툰 관계는 딱딱하지만 이제 익숙하다. 나는 멀찍이서 이해심이 있고 부모님은 쇠약해지셨다. 기억은 소멸하고 끝은 지금도 다가오고 있다.
육아 독립한 마음의 조금이라도 부모한테 쓴다면 후회는 가벼워질 거다. 애 낳고는 잘 모르던 것을, 아이를 키우고 나이를 들수록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