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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뚜막 고양이 Jan 12. 2023

1. 사랑, 찰나의 순간

<4월의 밤공기>

나는 그 순간 완벽한 짝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눈부시리만큼 하얀 피케셔츠, 그 아래로 적당한 근육들이 자리 잡고 있는 팔, 단정하고 세련된 구두, 은은하게 풍기는 향수 냄새, 마치 그에게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W호텔 앞에서 만난 우리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피해 우산 하나에 몸을 숨긴 채 길 건너 이자카야로 향했다. 우리가 늘 만나던 곳...

화려하고 높은 빌딩 숲 사이를 가로지르는 건널목을 함께 건넜다. 걸을 때마다 그와 나의 옷깃이 스치는 바람에 어색한 공기가 우리를 둘러쌌다.


어두컴컴한 이자카야로 들어서자 퉁명스러운 점원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는 오픈하자마자 들어온 손님이 별로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서자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안내되었다. 우리는 제일 안쪽 구석에 있는 테이블로 자리를 잡았다. 나무 기둥이 칸막이처럼 듬성듬성 벽을 치고 있어서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자리였다.  아늑하면서도 비밀스러운 느낌이 드는 곳..


“참이슬 1병, 테라 1병 주세요.” 그는 늘 그랬듯 같은 술을 주문했다. 메뉴판을 내려놓으며 나를 바라보고는 재미있다는 듯이 씩 웃었다.

“왜 웃어?”

“그냥.. 너는 옛날이랑 똑같으냐. 어리바리해서.”

“내가 뭘~.” 싱거운 녀석이다.

주문한 술이 나오자 맥주잔에 소주와 맥주를 적당한 비율로 따뤄 소맥을 만들어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따라주는 술을 건네받을 때면 왠지 그에게 존중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술잔을 건네주면서 항상 이렇게 말했다.

“조금만 마셔.” “천천히”

그와 잔을 부딪히고는 한 모금 들이켰다. 빈속에 술이 들어가니 식도를 타고 뜨끈한 느낌이 흘러들었다. 눈앞이 살짝 흐려지면서 기분 좋은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술을 마시면 느낄 수 있는 상기된 느낌을 나는 좋아했다.


내 앞에 앉아있는 그는 분명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인데 오늘은 왠지 달라 보였다. 나의 눈은 그의 모든 장점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슬림하게 쭉 뻗은 몸, 하얗고 샤프한 얼굴, 다정하면서도 장난기 있는 말투 그 모든 게 나에게 완벽해 보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 주위에 그 누구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의 얄궂은 속마음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와 걷고 싶고, 손을 맞잡고 싶고, 품에 안기고 싶었다. 나는 그에게 이런 마음이 들키지 않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애를 써야 했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함께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한 기분이 되었다.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문득 대학 시절이 떠올랐다. 진청색 청바지에 검은색 티셔츠를 단정하게 입고, 커다란 백팩을 메고 다니던 그는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예쁘게 접어서 처음 살 때와 똑같은 모양을 만들어 놓곤 했었다. 그의 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정확하게 우산을 접어냈다. 나는 결코 그와 같이 우산을 접을 수 없었다. 나의 우산까지 내밀며 내 것도 접어달라고 했다. 별것 아닌 일이지만 우산을 완벽하게 접는 그의 모습이 조금 멋지다고 생각했었다. 같은 또래는 애송이처럼 보일 때였지만, 우산을 접을 때만큼은 마치 어른처럼 느껴졌었다.


나는 그와 함께 있으면 풋풋한 대학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던, 근심, 걱정, 책임감들로 짓눌리지 않던 그때로 말이다.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면 나는 이 세상에서 온전히 나라는 존재로 살아있음이 느껴져 좋았다.


우리는 술을 마시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부터 아버지가 최근에 집 주변은 꾸미기 위해 포크레인을 구입하셨다는 일화까지 몇 시간 동안이나 대화를 했지만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희미하게 미소 짓는 그의 얼굴과 나를 아련하게 바라보던 눈동자만 어렴풋이 생각났다.


우리는 술을 마시며 즐거운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그와의 대화는 언제나 즐거웠다. 대단히 속 깊은 얘기들을 나누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벼운 대화 속에서 우리는 뭔가 통하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같은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에 분위기에 취해있다가 시계를 확인하고서야 현실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는 미련 없는 사람들처럼 벌떡 일어났다. 다만 집으로 돌아올 때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느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와의 헤어짐이 싫었던 것이다.


나는 사고처럼 갑작스럽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찰나의 순간에 나의 마음에 그 사람이 훅 들어와 버렸다. 이건 무슨 신의 장난인가!

나에게는 이미 정해진 짝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나를 아껴주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  결혼까지 약속한.


나는 홀로 생각에 잠겼다. 내 마음을 그에게 표현한다면 그 뒤에 벌어질 지옥 같은 파국은 어떻게 감당해야 하지? 다른 남자와 있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면 뭐라고 해명해야 할까?.. 내 머릿속은 정답이 없는 문제들로 가득 차 복잡하게 뒤엉켜버렸다.


밤 10시가 되자 우리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나의 표정과 함께 꼭꼭 숨긴 채 집으로 향하는 택시에 올라탔다.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남자친구의 집 현관 비밀번호를 천천히 누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팔을 한껏 펼치고 나를 반갑게 맞이하는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그이는 내가 술을 마셨는지 어떤 남자와 함께 있다가 들어온 건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의 집으로 돌아온 나를 반기는 것이었다. 순간 내 마음이 들키기라도 한 듯 그의 품을 피해서 방으로 급히 뛰어들어갔다.

“화장실이 급해서... 미안해. “ 라며 문밖으로 들리게 소리 높여 둘러댔다.


나의 마음에 피어나던 몽글몽글한 감정이 커다란 장벽 같은 현실을 마주하는 순간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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