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밤공기>
다음날 눈을 떴을 때 나는 마치 시련 당한 사람처럼 침대에 축 늘어져 있었다.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무기력한 느낌이 들었다. 내 감정만 너무 앞세워서 그와의 관계를 망쳐버린 것 같아 자괴감마저 들었다. 이제는 전처럼 편한 친구로도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에게 좋아한다고 말해 놓고 전처럼 편하게 연락할 수는 없었다. 나의 마음은 아직도 그를 향해 있는데 이제는 전처럼 볼 수도 없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가면 언젠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될 거라고 나 자신을 다독이며 아픔을 오롯이 느끼고 있었다.
우울한 기분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나는 차를 끌고 집 밖으로 무작정 나섰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 사이로 흰 구름이 뽀송뽀송한 양털처럼 두둥실 떠 있었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쳐 나의 마음을 밝혀주려 애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의 어둡고 상처받은 마음과는 괴리감이 심해 위로는커녕 나는 더 슬퍼지고 말았다.
이렇게 슬픈 와중에도 자꾸만 그의 생각이 머리속을 맴돌았다.
유튜브 뮤직에서는 “사랑은 봄비처럼...이별은 겨울비처럼..”이 블루투스를 통해 차 안 가득 울려 퍼졌다.
노래의 주인공이 마치 나인 듯 이별의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지면서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넓은 대로변을 전속력으로 달려보아도 , 운치 있는 골목길을 지나가 보아도 마음이 나아지지 않았다.
별다른 소득 없이 집으로 다시 향하려고 차를 돌리는 순간 내 바로 앞에 검은색 카이엔이 서 있었다.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그 안에 그 사람이 타고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차와 똑같은 기종만 발견해도 이상한 설렘을 느끼는 집착증 초기 증상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순간 그가 너무 그리워졌다. 나도 모르게 휴대전화를 들고 그의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010-2900-****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옆자리로 휴대전화를 던져버려다. 지금 전화를 한다고 해서 내가 무슨말을 할 수 있을까...자신이 없었다.
바로 그 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혹시 그일까? 하는 기대를 품은채 핸드폰을 들었다.
핸드폰 화면에는 그가 아닌 남자친구의 이름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 어디야?”
남자친구는 전화하면 항상 첫 마디가 어디냐고 묻는 말이다.
“ 집에 가는 중이야..”
나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너무 안 좋아보여.“
”아무일도 아니야.“
나는 갑자기 남자친구가 성가시게 느껴졌다. 지금 내 마음 속은 다른 사람으로 인해 힘들어 하고 있는데, 남자친구의 전화를 받으니 마음이 혼란스럽고 나도 모르게 짜증이 밀려왔다. 나는 괜시리 아무 잘못 없는 남자친구에게 화를 내며 잔화를 끊어버렸다.
몇 일 후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데 느닷없어 그에게 전화가 왔다. 대구로 출장을 갔는데 내 생각나서 전화했다고 했다. 나는 무슨말을 해야할 지 몰라 당황했지만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
“ 별일 없었어? “ 그는 내게 물었다.
“ 응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어. 웬일이야?”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보고 싶어서 .....
그리고 네가 나를 좋아해 줘서 정말 고마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의 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잘 모르겠다던 그가 나에게 보고 싶다니... 나는 심장이 터질 것 만 같았다.
나는 지금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그를 만나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그의 동료가 부르는 바람에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땅속 깊이 가라앉을 것 같던 내 마음이 그의 말 한마디에 하늘 뚫고 오를 만큼 행복감으로 넘쳐났다. 고작 보고 싶다는 그의 한 마디에 ....
숙소에 도착한 그에게 또다시 전화가 왔다. 약간 취기가 오른듯한 목소리였다.
“ 네가 아주 좋아. 몇 일 동안 네 생각 많이 났어.”
“너 그거 기억나? 나 군대 갈 때 네가 선물해준 책 있지? 그거 아직도 내 책장에 꽂혀있어. “
나는 그가 군대에 가기 전 ‘위대한 개츠비’를 선물했던 터였다. 아직도 그 책을 간직하고 있다니..
그 책이 그의 서가 어딘가에 꽂혀있었을 생각을 하니,어쩐지 그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지지 않고 희미하게 이어져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책장 어느 곳에 그 책을 보관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의 눈높이가 제일 잘 닿는 곳 오른쪽 구석에 꽂혀 있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 책을 보며 그는 나를 떠올렸을까? 풋풋했던 학창시절 나와 함께 보낸 시간을 그리워했을까?
군대에 가기 전 그는 나에게 고백을 했었다.
“ 있잖아...나 너 좋아해. 군대 가는 건 괜찮은데 너를 볼 수 없는 게 더 힘들 것만 같애.”
“ 내가 연락하면 받아 줄 거지? 편지 쓸게.”
나는 그때만해도 친한 친구로만 생각했던 터였기에 그의 말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 나는 잘 모르겠어.. 군대 잘 다녀와.”
나는 마지막으로 책 앞장에 편지를 써서 그에게 선물했던 것이다. 그것을 끝으로 나는 더는 그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군대에서도 30통이 넘는 편지를 그 특유의 멋진 글자체로 정성껏 써서 보냈지만 한 번도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치지 않고 편지를 보내왔다. 나중에 온 편지는 아예 뜯어보지도 않은 것도 있었다.
그런데 10년 만에 내 책장에 꽂혀있던 책 사이에서 그의 편지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 편지를 보자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졌다. 어렵사리 수소문해서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고 그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문제의 그 편지는 우리를 다시 이어준 가교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대구 출장중에 걸려온 전화를 통해 우리는 끝도 없이 얘기를 이어 나갔다. 그는 우리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세세한 것 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는 마치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해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 같았다.
“우리 학교 끝나면 맨날 술 마시고 노래방 갔었잖아. 그거 기억나? 우리 강남역에서 자주 갔던 술집 있잖아.”
나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는 술집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반지의 제왕을 같이 봤던 것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언젠가 그를 집으로 초대해서 닭볶음탕을 만들어 주었다는 얘기도 했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기억들이 마치 꿈속에서 있었던 일처럼 어렴풋이 떠올랐다.
우리는 그렇게 새벽까지 통화하고서야 아쉬워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렇게 오래 전화기를 붙들고 있으니 마치 대학생 풋풋한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가슴 벅차게 행복했다. 우리의 마음이 서로 향했고 서로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동적이었다. 이건 분명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