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편지
소연아. 나 지수야. 네가 예전에 준 주소로 한번 편지를 써보았어. 잘 지내니?
이렇게 갑자기 편지를 쓰는 이유는 나에게 편지지가 생겼기 때문이야.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있지, 예쁜 연두색의 편지지를 보았어. 네가 좋아하는 키위가 그려진 동글동글 귀여운 이 편지지. 아, 키위가 아니라 다래라고 했었던가. 네가 어렸을 적에 먹었다던.
갑자기 그 가게로 들어가 편지지를 계산한 것은 왜 그랬을까? 아마 네가 유난히 다래를 좋아해서 '다래를 보면 김소연'이라고 아로새겨져서 그런 걸까. 메시지로, 톡으로 너와 안부를 주고받는 것보다 네가 좋아하는 것을, 상하지 않고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이 다래(사실...키위인 것 같긴 한데)로 너의 안부를 물어보고 싶었나 봐. 아무래도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학교생활, 너랑 시시콜콜 재밌게 이야기하고 반 친구들과 같이 이것저것 재미있는 걸 찾아 하던 때가 기억난다. 딱딱하고 자로 잰 듯한 시간 속에서 그렇게 학교 가기 싫다고 난리를 쳤어도, 한편으로는 우리 반만의 소소한 재미도 같이 만들고 그랬지. 색깔 펜이 없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색깔 펜 공구하고, 하루 종일 앉아만 있는데도 그렇게 배고프다면서 다 같이 돈 걷어서 간식을 박스채로 같이 사서 나눠 먹었잖아. 그럴 때 너무 웃기지 않았니? 힘 좋은 친구들 서너 명이서 박스 들고 와서 뜯으면 이거는 누구 것, 저거는 이 친구 것 하며 자기가 샀던 거 가져가고. 그런데 자기 것 챙겨간 게 무색할 정도로 다 같이 그렇게 많이 산 과자와 간식을 한 자리에 뜯어서 먹었지. 그때 소연이 너는 참 웃겼어. 다른 간식은 자기가 못 먹어도 다른 친구들 다 나눠주면서 그렇게 키위 젤리는 주기 싫다고 다람쥐 마냥 꼼꼼 숨기는 게. 그게 아마, 네가 몇 번이나 입이 닳도록 알려준 다래 맛이랑 비슷하다고 그랬었지.
소연이 너는 정말 조용하고 담담하다가 네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그렇게 달뜨면서 이야기했잖아. 평소엔 정말 고요한 윤슬이 비치는 호수 같다가도 네가 좋아하는 주제를 퐁당 하고 던지면 크게 물이 일렁이는 그런 애였어. 그래서 얼마나 다래 얘기를 많이 들었는지 몰라. 그 키위 젤리를 먹을 때마다 그렇게 7살 때 할머니랑 뒷산 가서 처음 먹었던 야생 다래 맛을 잊을 수 없다고. 동생이랑 앞다퉈서 먹다가 배탈 나면 할머니가 혼 한번 내지 않고 둘이 배 쓰다듬어 주었다고. 그러면 할머니의 거친 손에서 그렇게 부드러운 온기가 퍼져 솔솔 잠이 온다 고했었지. 네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네가 친구에게 보여주고 싶고, 먹여주고 싶은, 단순한 장소가 아닌 너의 경험 속에 데려가고싶다는 너의 마음이 보여.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의 기분은 뭐랄까, 내가 그래도 네 마음속 소중함을 넣어두는 자리를 조금이나마 차지한 들뜬 기분이 들었어. 쳇바퀴같이 딱딱 맞게 굴러가는 평범한 생활 속에 소연이 너는 참, 그 쳇바퀴가 사실 동글동글 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알려주는 친구 같았어. 긴장되고 굳어서 잘못하면 부러질 것 같아 보이는 위태롭고 불안한 삶이 네 덕분에 조금 유연하다고 느꼈어.
내가 너에게 먼저 말을 건 지난날의 선택이 참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낯선 곳에서 전학왔다고 괜히 움츠러들어서는 누군가와도 눈을 못 마주치던 너였잖아. 그때는 그저 동정심이 올라와서, 어쩌다 내 옆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말을 걸고 이것저것 챙겨줬지. 시내에 놀러 갈 때도 약속 장소가 있는 역으로 어떻게 가야 할지 한참 형형색색 복잡하게 그어놓은 노선을 보고 있을 네가 생각나서 손 꼭 붙잡고 혼자 길을 잃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다녔던 게 기억나. 그때까지만 해도 미안할 정도의 오만한 생각을 가지며 너를 대했었어. 내가 이 곳에 더 오래 살았고, 소연이 너는 나만 따라오면 된다는 생각하면 잠시 이기적이게도 내가 우리 둘 사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경멸스럽지만, 들뜨는 우월감도 느꼈어. 그런데 그게 참 잘못된 생각이라고 느낀 건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어.
너희 할머니 집에 놀러 갔던 때였던 것 같아. 너는 정말 조심스럽고 숨어있는 친구라 남들에게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았는데, 너는 그런 나에게 너의 추억의 장소를 데리고 갔었지. 그때 땡볕이 짓누르는 버스터미널과 오래된 가죽 냄새가 풀풀 나는 버스 안에 있던 너의 모습이 기억나. 진실로 자신을 도와주는 친구에게만 꺼내는 소중한 것들을 모아놓은 보물상자를 보여주는 기쁜 얼굴. 그런데 한편으로 그 보물상자 안에는 번쩍거리는 것들이 아닌, 해변에서 주운 조개껍데기, 길 가다 주운 도토리 같은 것들이 있어 실망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뜯던 손가락의 거스름들. 너의 붉게 상기된 얼굴과 더듬거리는 말투, 뭐부터 설명해 줘야 할지 눈동자를 위로 올리고 곰곰이 생각하는 그 모습 하나하나에 참으로 너는 다정한 사람이구나 생각했어.
그곳에서 생전 몇 번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을 느꼈어. 그리고 그곳에 있는 너는 갑갑함 속에 풀린 새와 같았고.
어렸을 때부터 계속 할머니 밑에서 자라다가 할머니께서 위독해지시고, 아빠에게 끌려오듯 전학왔었다는 너의 눈에는 한숨이 같이 섞인 게 느껴졌어. 마치 매연 같은 탁한 연기를 내뱉는 것 같았어. 몸이 약한 동생과 할머니를 챙기며 시골에서 살았던 일. 할머니와 달리 마음의 교류를 느낄 수 없었던 아버지. 할머니 돌아가시고 낯선 곳으로 이사왔을 때 네가 느낀 수많은 이질감이 너를 지치게 만든 것 같아. 우리 몸에 에너지가 있듯이, 마음에도 한정적인 에너지가 있어서 소연이 너는 항상 동생과 할머니, 추억들을 생각하며 마음에 있는 에너지를 쓰는 것처럼 보였어. 그래서였을까. 그저 작은 우월감으로 다가갔던 너에게, 이제는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그 깊은 마음속에서 한숨 쉬는 너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건.
우리에게 더욱 같이 함께하는 시간이 있었으면 지금의 너는 조금 달라져 있었을까. 동생의 장례식에서 봤던 너의 모습은 정말빛이 꺼져버린 쓸쓸한 무대같아 보였어. 학교에서 함께 했을 때만 해도 자신이 사랑하는 것과 관련된 일에는 눈에 스포트라이트 같은 반짝이던 빛을 낸 너였는데. 다 잃어버려서 아무것도 없는 텅빈 눈이 아직도 생생해. 소연이 너에게는 애정과 추억을 나눌 사람이 필요한데 이제 다 사라졌다는 허망감이 나에게도 시큰하게 전달되었어. 물론 네가 느끼는 감정에 비해 내가 너를 보며 느낀 그 시큰함은 한조각의 돌맹이와 같겠지만.
나에게 없는 시간과 여유를 탓했어. 회사 신입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너의 안부를 물어보는 일도 줄어서 괜히 내가 야속했지. 괜찮은지 아무리 물어도 그저 괜찮다는 너의 말소리에 물기가 가득 찬 말이 내 마음 속에 스며들어와 물먹은 솜처럼 한없이 무거워지더라. 더 직접, 더 자주 찾아가 얼굴을 마주 보고 손을 잡으며 안부를 물었어야 했는데. 정말 여러 복잡한 생각이 들었어. 시간은 왜 내 소중한 사람을 돌볼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인지. 왜 우리는 각자의 생활을 챙기는 것조차도 급급해야 하는 건지. 세상은 점점 주변을 돌아볼 수 없게 만들어. 그저 내 앞만을 보게 시야를 막아버리지. 이렇게 쓰고 있는 이 말이 내 변명같이 들릴 수 있을 것 같아. 그렇다면 미안해.
너는 요즘에 어떻게 지낼까. 아꼈던 이들이 사라진 그 삭막한 곳에서 혼자 어떻게 지낼까. 유난히 입을 먼저 열지 않는 너는 어떤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까. 점점 각자가 세상살이에 사로잡혀 볼 수 없게 되었잖아. 그래서 너와 지금까지 소통하지 못한 안타까운 마음을 넣고 싶어 이 편지를 쓰고 있는지도 모르지. 편지야말로 마음이 가장 잘 넣을 수 있는 선물 상자같으니까.
힘들면 언제든지 연락해.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멀리 있고 자주 보지 못하지만 내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민폐일까, 근무 시간일까 걱정하지 말고 연락해. 언제든 최대한 받을 거니까.
만약 이 편지를 읽게 된다면, 꼭 나에게 털어놓고 싶은 마음들 한껏 모아 전달해 줘. 메시지든, 전화든, 편지든 언제든 받고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 예전에 푸릇푸릇하고 시원한 바람이 밀려 들어왔던 할머니 집에서 나에게 털어놨던 것처럼. 뭐든 기다리고 있을게. 아니면 조만간 너의 집으로 한 번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잠시 일을 쉬기로 했거든. 그때가 오면 네가 좋아하는 걸 잔뜩 들고 한번 찾아갈게. 그때까지 꼭 건강해야 해.
멀리서도 언제나 응원하는 지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