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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댓츠올 Sep 06. 2023

힘든 문장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

8월의 사슴탐사


안 좋은 문장 몇 개를 품고 한 달을 보냈다. 전반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 지난 한 달을 돌이켜 보니 그것 때문에 오래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아 후회된다. 몸이 힘든 건 며칠 푹 자면 회복되는데 마음이 힘든 건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일상을 살아가는 내내 생각이 나서 삶을 방해했다. 다 문장 때문이다.

별 것도 아닌 말을 여러 번 곱씹는 것 같아 몇몇 친구에게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하면서는 마음이 쪼개지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말했까. 왜 상관도 없는 나를 괴롭게 할까. 그러나 말하다 보니 그 고민도 별 것도 아닌 문제처럼 여겨지고, 상대방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안고 있던 문제가 별 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말하고는.


훌훌 털어버렸다 훌훌.

(라고 쓰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 또 글을 쓰는 나도 참 뒤끝이 길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정말 잊어버려야지.)


마음 안에 눌러만 두면 돌덩이는 추처럼 깊이를 모르고 가라앉는다. 그 돌덩이를 자근자근 쪼개서 공기 중에 풀어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이야기들아, 부스러져서 모래알이 되렴. 알알이 흩어져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라. 세상의 온갖 기쁜 일과 슬픈 일 사이에서 갈피도 잡지 못하고 사소해져 버려라. 그렇게 마음을 갈무리하고 나서는 참 별일 아닌 일로 오래 시간을 썼구나 싶어져 다시 살짝 괴로웠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들과 보내버린 시간을 어쩌겠나 싶어 15분 정도만 괴로워하기로 한다.


"있잖아, 나는 내가 지금 하는 말이 100퍼센트의 진실이 아니란 건 알아. 객관적이려 하지만 분명 편파적일 거야. 일부는 나도 모르는 자기변호를 했을 거고 머릿속에서 각색도 되었을 거야 거야. 가급적 진실만을 전하고 싶지만 쉽지 않아. 미안해, 알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상대방이 반은 내 편을 들어주길 바라고 반은 현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해 주길 바란다.


그럼에도, 기록해야만 마무리되는 일들이 있다.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쓰지 않은 것은, 어제의 문장을 먼 미래까지 기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 크다. 나중에 읽어보면 왜 이렇게 슬프고 울적했을까, 되짚으며 멀리 떨어져서 지금의 나를 바라보는 미래의 내가 있겠지. 좀 우스울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편이 좋다. 정확한 일들은 알지 못한 채 그저 흐릿함만으로 지금을 기억하면 좋겠다. 마침내 훌훌, 잘 털어버렸구나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팔월의 좋았던 날들을 기록해야지.

우울만을 품고 살았다고 생각되지 않게.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1.

이제 한 타임 수영을 하면 자유형으로 1킬로 정도는 헤엄칠 수 있게 됐다. 뭐든 하면 느는구나. 이제 자유형을 하면 아무런 생각이 없어지고 수영장 바닥만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간다. 오직 이편에서 저편으로, 저편에서 다시 이편으로 오는 일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된다. 이 몰입의 순간이 좋다. 스트림 라인을 잘 잡았을 때 몸이 앞으로 훅 나아가는 느낌을 사랑한다. 오래 수영하면 여전히 숨이 차지만 전보다는 덜하다. 옆 레일에서 밀려오는 물결이 나의 속도에 영향을 준다는 걸 느끼곤, 타인의 물결에 영향받지 않고 나의 물결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더불어 동시에 범람하는 물결까지도 컨트롤할 수 있도록 영법이 자연스러워졌으면 좋겠다. 세상 사는 것도 비슷한 것 같다. 남이 일으킨 물결을 어쩔 수 없이 맞게 되지만 그것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2.

전라북도 익산에 다녀왔다. 미륵사지 석탑이 보고 싶었는데, 미륵사지 석탑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전라북도 지역의 광활한 평야에 매료되었다. 주위를 둘러봤을 때 사방이 산인 동네에서 자라온 나와 주위를 둘러봤을 때 지평선만이 보이는 곳에서 자라온 사람은 아마 생각하는 게 많이 다르겠지?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기억나는 장면은 모두 깊은 산속에 있다. 어느 저녁 나는 깊은 산속을 한 친구와 함께 걸었다. 산에는 밤이 빠르게 내려왔는데 우리는 그 어둑해지는 풍경이 좋아서 천천히 걸었었다. 점방에서 산 조그마한 책에 실린 괴담 이야기도 나누었던 것 같다. 살짝 무섭고 어쩐지 싱거운 결말에 양팔을 감싼 채 어깨를 부르르 떨며 웃었다. 한 동네에서 다른 동네로 가기까지는 아주 먼 길이었고, 옆으로는 짙푸른 산이 높게 서 있고, 앞으로는 겨우 도로를 낸 아스팔트만이 쭉 깔려 있는 그런 길이었다. 아마 학교를 마치고 하루종일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테다. 친구의 동네로 빠지는 길과 우리 집으로 가는 길 사이엔 삼거리가 있었는데 그 삼거리 한쪽에 작은 정자가 하나 있었다(이 글을 쓰며 그 정자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져 찾아보니 고려 충신을 기리는 신도비였다고 한다). 그곳을 기점으로 친구는 안쪽 마을로 나는 우리 동네 방향으로 헤어져 쭉 걸었다. 혼자 걷는 길은 무서워서 뛰듯이 걸어갔다. 밤이 되면 개구리 소리가 귀가 아프도록 들려오고, 드문드문 선 가로등에는 조그마한 하루살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그런 밤. 하루살이들이 코나 입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코를 꼭 틀어막고 걸어간 기억들.

산속 동네에는 그렇게나 밤이 빠르게 찾아왔는데, 평야가 있는 동네의 아이는 어떻게 자랐을까. 이곳엔 밤이 천천히 왔을까. 노을이 오래 아이들의 머리 위를 비추었을까.

드넓은 왕궁리 유적을 돌아다니며 잠시 그런 생각에 잠겼다.


3.

뒤늦게 본 애스터로이드 시티가 정말 좋아서 한 번 더 보고 싶어진다. 정말 좋아하는 작품들은 생활하는 내내 불쑥불쑥 특정 장면이 떠오른다. 이 영화도 그랬다. 횡단보도에 서서 다음 신호를 기다리면서, 작업실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직선거리를 걸으면서, 아침에 일어나 환기를 시키면서 영화 속 장면이 계속 생각났다. 내 앞에 불쑥 외계인이 나타나 주었으면. 내가 거대하게 생각하는 의미들을 잘게 부수어주었으면, 바랐다.

우리는 자꾸만 삶의 의미를 찾지만, 그것이 없어도 삶은 살아질 거라는 것. 그러다 우연히 의미를 찾게 될 수도 있지만 영영 못 만나도 괜찮을 거란 걸. 영화에 깔려 있는 그런 메시지들이, 모든 것에 이유를 찾고 인과를 만들려는 나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 외에 영상미도 너무나 아름다웠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고.


4.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요즘은 작업실에 있는 게 편안하다. 전에도 좋긴 했지만 이제야 뭔가 진득이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고, 스스로도 루틴이 잡힌 것 같다. 작업실이 생긴 지 만 6개월이 된 셈인데 나의 적응 기간은 이 정도인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회사도 수습기간을 3개월 정도 두는 걸까.

여하튼 낯선 공간에서 초반에는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며 갈피를 잡지 못했던 날도 있었고, 왜 이렇게 집중이 안 되지 고민한 시간도 있었는데. 지금은 일단 앉아서 아무거나 한다. 아무거나 쓰고. 아무거나 정리하고. 그러다 보면 나름의 조각들이 맞춰진다. 얼마 전에는 작업실을 같이 쓰는 친구에게 "저녁 먹고 와서 집에 가기 전까지 네 시간 동안은 정말 집중이 잘 되는 것 같아" 하고 말했다. 최근 몇 주간 그렇게 느끼다가 그 말을 뱉고 나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침에 특히 집중을 한다고 하던데, 나는 그런 작가가 될 그릇은 못 되는 듯. 아니더라도 내가 그 사람과 같아야 할 이유도 없으니 나만의 루틴과 길을 찾으면 될 일이다.


5.

"계속하는 것"에 대해 피력한 글들을 자주 읽는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런 말들은 나를 한번 더 독려한다. 너무나도 당연하지, 계속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은. 그러니까 9월에도 계속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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