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울증에 걸린 공무원입니다 28
태풍이 북상하고 있습니다. 지난 밤부터 비가 내리더군요. 가느다란 빗줄기가 빼곡하게 들이찬 아침 하늘은 흐리고 축축했습니다. 출근길에 일부러 경쾌한 노래를 틀었지만, 알고리즘은 하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던 우중충한 노래를 다음 곡으로 골라 주었습니다. 아마도 제목에 ‘rain’이 들어가 있었기에 그랬나 봅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출근길을 달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곳에 차를 세웠습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토스트집에 들어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메뉴를 먹었습니다. 아침에 보고를 끝내고 나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업무를 처리하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러는 내내 비가 계속해서 내렸고 저는 살짝, 아주 살짝 기분이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말이죠.
예전에는 비가 오면 감성적인 기분이 되곤 했습니다. 이제는 비가 오면 우울증의 여파가 느껴집니다. 두 가지 약물로 뚜껑을 덮고 자아 성찰로 둘둘 말아 단단히 밀봉해 놓은 유리병인데도, 어째서인지 그 안에서 내용물이 흐물흐물 스며 나오는 기분입니다. 예전에 우울증 증세에는 날씨가 상당한 영향을 준다는 글을 쓴 적이 있지요. 08화 우울증과 날씨에 대해 (brunch.co.kr)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걸 굳이 반복해서 직접 체험하는 건 그다지 유쾌한 경험이 못 됩니다.
최근에 연달아서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저는 합계 여섯 캔의 사이다를 마셨습니다. 혈중알콜농도를 0으로 유지하는 대신 당뇨병에 걸릴 가능성을 약간 끌어올렸습니다. 의사가 아직 술은 마시면 안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상당히 말을 잘 듣는 환자거든요. 심지어는 의사에게 칭찬까지 받았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오늘처럼 기분이 조금씩 내려앉는 날에는 종종 술이 생각납니다. 평소에는 딱히 술을 즐기지도 않는 주제에 말입니다. 샴페인도 좋고 맥주도 좋습니다. 과실주도 괜찮고 증류주도 무방하죠. 어쨌든 몇 잔 마시고 알딸딸해진 채, 약간 거나해진 기분으로 어딘가에 누워 한잠 자고 싶은 딱 그런 느낌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시간이 되면 퇴근해서,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저녁을 먹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아이랑 놀아주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잠을 청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생각대로 되었습니다. 이런 규칙적인 생활 습관은 우울증 증세를 다스리는 데에 아주 좋습니다. 의사가 칭찬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도 가끔은 술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내일은 해가 뜨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