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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Aug 13. 2023

우울증과 미각의 변화

나는 우울증에 걸린 공무원입니다 29

태풍이 지나간 후, 덥고 습한 날씨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에어컨을 켜지 않고 하루를 지내 보았는데 어김없이 땀투성이가 되었네요. 그럴지라도 맑고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집니다. 


예전에 우울증이 한참 심했을 때는 미각에도 이상이 찾아왔습니다. 그동안 계속 먹어왔던 김치가 갑작스럽게 너무 맵게 느껴진다거나, 분명 똑같은 라면인데 갑자기 역겹게 느껴지는 식입니다. 하지만 꾸준히 약을 먹으면서 그런 증세도 없어졌지요. 그런데 태풍이 지나가면서 온종일 비가 내렸던 지난 이틀 동안, 기분이 좀 가라앉았다 싶더니 증세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우울증이라는게 참 희한한 질환이라는 걸 새삼 다시 느낍니다. 


처음에는 매일 먹던 토스트가 갑작스럽게 질기게 느껴지더군요. 그 당시에는 비가 많이 와서 식빵이 눅눅해졌겠거니 하면서 별 생각 없이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삼겹살을 먹는데, 괴상하게도 흡사 민물생선 구이처럼 비린 맛이 확 느껴지더라고요. 아. 예전처럼 또 그런 증상이 나타나는구나 싶은 직감이 들었습니다. 


비리게 느껴지는 돼지고기를 먹고 나니 단맛이 엄청 땡기더라고요. 그래서 카페에 가서 제가 환장하는 민트초코 프라푸치노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한 입 먹는 순간, 너무 짜서 도저히 못 먹을 지경이더라고요. 하도 이상하서 아내에게 슬쩍 밀어주며 짠 맛이 나는 것 같다고 했지요. 맛을 본 아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기 입에는 달기만 한데 왜 그러냐고 되묻더군요. 뭐라 설명하기도 그렇고 해서 그저 남기고 말았습니다. 


토스트도, 삼겹살도, 민트초코도 하나같이 제가 좋아하는 음식들입니다. 그런데 셋 다 맛이 이상하게 느껴지니까 상당히 괴로웠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맛있는 걸 먹는 건 인생의 즐거움 중에서도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런 즐거움이 통째로 날아간다면 어떤 기분이 드실 것 같으신가요? 유감스럽게도 저는 그런 경험을 종종 해 보았습니다. 결코 남에게 권하고 싶은 체험은 아니지요.  




다행히도 태풍이 지나가고 비가 그치면서 그런 증세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오늘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었지요.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면서,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게 참 행복한 일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울증이란 사람에게서 행복을 앗아가는 질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기분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각도 이상해지고, 책이나 영화를 보아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지요. 심지어 그 강력하다는 성욕마저 사라집니다. 그리고 기쁨과 즐거움이 비어버린 그 공간에 대신 좌절과 허망함이 스며들지요.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짤막하고 소소했던 이틀짜리 미각 이상을 극복하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계속해서 먹고 있는 약의 도움이 컸겠지요. 그래도 마치 조그만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 같은 이런 감각은 제게 희망을 줍니다. 언젠가는 우울증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그런 희망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새롭게 시작되는 일주일도 잘 버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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