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울증에 걸린 공무원입니다 26
우울증에 걸린 사람도 당연히 감기에 걸립니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보다 더 자주 걸릴 수도 있겠지요. 면역력이 떨어져 있으니까요. 꼭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지만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감기에 걸려서 콜록콜록 고생 중입니다.
그래서 감기약을 찾았습니다. 마침 올해 초 일본여행을 갔을 때 사온 감기약이 있더군요. '파브론 골드 A'라고, 워낙 유명한지라 아는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정량대로 세 알을 먹고 잠이 들었지요.
다음날 반쯤 기절한 것처럼 잤습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뭔가 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그간 수많은 감기약을 먹어 보았지만 그렇게까지 잠에 취한 적은 없었거든요. 그래서 인터넷을 열심히 검색한 결과 마침내 이유를 알았습니다.
대부분의 감기약이 그렇듯이 파브론의 주성분도 아세트아미노펜입니다. 흔히 타이레놀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요. 이건 항불안제나 항우울제와 함께 먹는다 해서 딱히 문제가 생기는 성분은 아닙니다. 다만 문제는 파브론에 들어 있는 '디히드로코데인'이라는 성분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기사화가 된 적이 있어서 알고 계신 분들도 많을 겁니다. 디히드로코데인은 한외마약이라고 해서 마약 성분에서 추출해 의료용으로 쓰는 약품입니다. 이 성분이 든 감기약은 일본에서는 처방전 없이 구입 가능하지만, 한국에서는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만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 여행간 사람들이 파브론을 많이 사 온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 성분을 대표적 항불안제인 벤조디아제핀 계열과 함께 복용하면 부작용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식품의약안전처 홈페이지에 이렇게 적혀 있네요.
마약류와 벤조디아제핀계 약물 또는 알코올을 포함하는 중추신경계 억제제의 병용 투여는 깊은 진정, 호흡 억제, 혼수 및 사망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마약류와 벤조디아제핀계 약물의 병용 투여는 적절한 대체 치료 방법이 없는 환자의 경우에 한하여 처방하도록 한다. 이 약과 마약류의 병용 투여가 결정되면 최저 유효용량으로 최단기간 처방하도록 하고 호흡 억제 및 진정의 징후와 증상에 대해 환자를 면밀히 추적 관찰하도록 한다.
또 이렇게도 적혀 있습니다.
이 약과 벤조디아제핀계 약물, 다른 마약성 진통제, 전신 마취제, 페노티아진계 약물, 신경안정제, 수면제, 삼환계 항우울제, 신경근육 차단제, 또는 알코올을 포함한 다른 중추신경억제제를 병용 투여하면 추가적인 중추신경 억제 작용이 유발되고, 호흡 억제, 저혈압, 깊은 진정, 또는 혼수, 사망과 같은 중추신경 억제 작용이 증가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약물과 병용 투여하는 경우에는 2가지 약물 중 하나, 또는 둘 다 용량을 감량해야 한다.
예입.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항불안제와 함께 먹으면 안 되는 디히드로코데인 성분의 약을 먹었고, 그 부작용 때문에 하루 온종일 헤롱거렸습니다. 두 약 모두 중추신경계를 억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의미에서 시너지가 생겨버린 거죠.
만일 제가 으레 그랬듯이 국내 종합감기약을 사다 먹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겁니다. 또 집에는 타이레놀도 있고 또다른 감기약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일본에서 사 온 파브론이 눈에 띄는 바람에 이 사달이 난 거죠. 이후로는 감기약을 바꿔 먹으면서 더 이상은 부작용을 겪지 않고 있습니다만, 항불안제를 드시는 분들은 알고 계시는 게 좋겠다 싶어서 이렇게 경험담을 공유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