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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Aug 10. 2023

태풍과 함께 불어오는 우울감

나는 우울증에 걸린 공무원입니다 28

태풍이 북상하고 있습니다. 지난 밤부터 비가 내리더군요. 가느다란 빗줄기가 빼곡하게 들이찬 아침 하늘은 흐리고 축축했습니다. 출근길에 일부러 경쾌한 노래를 틀었지만, 알고리즘은 하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던 우중충한 노래를 다음 곡으로 골라 주었습니다. 아마도 제목에 ‘rain’이 들어가 있었기에 그랬나 봅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출근길을 달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곳에 차를 세웠습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토스트집에 들어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메뉴를 먹었습니다. 아침에 보고를 끝내고 나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업무를 처리하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러는 내내 비가 계속해서 내렸고 저는 살짝, 아주 살짝 기분이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말이죠.      


예전에는 비가 오면 감성적인 기분이 되곤 했습니다. 이제는 비가 오면 우울증의 여파가 느껴집니다. 두 가지 약물로 뚜껑을 덮고 자아 성찰로 둘둘 말아 단단히 밀봉해 놓은 유리병인데도, 어째서인지 그 안에서 내용물이 흐물흐물 스며 나오는 기분입니다. 예전에 우울증 증세에는 날씨가 상당한 영향을 준다는 글을 쓴 적이 있지요. 08화 우울증과 날씨에 대해 (brunch.co.kr)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걸 굳이 반복해서 직접 체험하는 건 그다지 유쾌한 경험이 못 됩니다.      


최근에 연달아서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저는 합계 여섯 캔의 사이다를 마셨습니다. 혈중알콜농도를 0으로 유지하는 대신 당뇨병에 걸릴 가능성을 약간 끌어올렸습니다. 의사가 아직 술은 마시면 안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상당히 말을 잘 듣는 환자거든요. 심지어는 의사에게 칭찬까지 받았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오늘처럼 기분이 조금씩 내려앉는 날에는 종종 술이 생각납니다. 평소에는 딱히 술을 즐기지도 않는 주제에 말입니다. 샴페인도 좋고 맥주도 좋습니다. 과실주도 괜찮고 증류주도 무방하죠. 어쨌든 몇 잔 마시고 알딸딸해진 채, 약간 거나해진 기분으로 어딘가에 누워 한잠 자고 싶은 딱 그런 느낌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시간이 되면 퇴근해서,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저녁을 먹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아이랑 놀아주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잠을 청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생각대로 되었습니다. 이런 규칙적인 생활 습관은 우울증 증세를 다스리는 데에 아주 좋습니다. 의사가 칭찬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도 가끔은 술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내일은 해가 뜨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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