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음감 Oct 21. 2024

학원 강사 나부랭이가 순진한 내 아들을 꼬셨지

드디어 이혼_14

지창이 1박 2일 출장을 간 날, 세화는 오랜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어두운 방에서 핸드폰이 울린다.


힘겹게 눈을 떠보니 시어머니 황은자 전화다. 이 밤중에?


은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야아, 나 좀 데리러 와라. 서랍 열다가 넘어졌는데 몸이 말을 안 들어."


울먹이며 짜증 섞인 목소리가 세화의 귓가를 찌르고 있었다.

세화는 잠시 망설였다. 툭하면 학원 강사 나부랭이가 순진한 아들을 꼬셨다는 말을 20년 동안 해오던 은자다. 정이 갈래야 갈 수가 없었다.


세화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계를 흘깃 바라보았다. 자정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찰나의 침묵 속에서 전화기 너머 은자는 서럽게 흐느끼고 있었다.


“어머니, 잠시만요. 제가 곧 갈게요.”


세화는 그렇게 말하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알 수 없는 감정의 물결을 억눌렀다.




응급실은 고요한 어둠 속에서 불안이 피어나는 공간이었다. 형광등 아래, 사람들의 얼굴엔 피로와 걱정이 서려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의료진 사이로 환자들의 신음이 흩어졌고, 긴장감이 공기처럼 퍼져 나갔다. 이곳엔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과 끊임없이 흐르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교차하고 있었다.


옅은 신음만 흩어지던 응급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다섯 명의 환자가 들어왔다. 모두 교통사고로 긴급 이송된 사람들이었다. 두 명은 들것에 누워 의식 없이 창백한 얼굴이었다.


나머지 세 명은 충격에 휩싸인 얼굴로 스피커 폰을 켜놓은 채 할딱거리며 통화하고 있었다. 환자의 목소리와 전화기 너머 목소리가 스피커로 울리면서 그들이 겪은 참혹함이 되살아 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멈춘 듯한 순간 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은자는 침상에 누운 채, 끊임없이 주위를 둘러보며 초조해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느려? 나 지금 죽겠는데, 아무도 신경 안 쓰는 거야?"


은자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세화를 몰아붙였다. 은자 눈에는 방금 들어온 교통사고 환자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세화는 지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곧 오겠죠, 어머니. 아까 피투성이 된 사람들 들어왔잖아요. 아마 순서가 밀릴 거 같아요.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기다리긴 뭘 기다려! 네가 좀 더 신경을 써보라고. 맞다, 너 이 병원에서 청소한다며. 의사까진 아니어도 행정 뭐 그런 사람들한테라도 부탁해야 하는 거 아냐?"


은자의 짜증이 점점 더 거세졌다.


"지금 새벽 1시예요. 어머니, 행정직원들이 24시간 근무하나요."


세화는 은자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무심히 답했다.


"너, 지금 그게 무슨 태도야? 네 시어머니가 이렇게 아프다는데!"


은자는 세화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세화는 여전히 무심하게 대꾸했다.


"알겠다고요, 어머니."


25년간의 결혼생활로 터득한 노하우였다. 은자가 자기 성에 못 이겨 소리 지를 때는 최대한 무심한 게 상책이었다.


그 순간, 지나가던 간호사가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짜증 낸다고 순서가 바뀌지는 않아요. 모두 다 위급한 환자들입니다."


간호사의 말에 은자의 목소리는 가라앉았다. 세화에게만 들릴 정도로 툴툴거리지만 세화는 못 들은 척했다.


드디어 은자 차례다. 눈이 벌겋게 충혈된 의사가 피곤한 목소리로 모니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