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반평생을 중증 장애인으로 사셨다. 그런 아버지에게 주말 정오의 ‘전국노래자랑’ 시청은 큰 즐거움이었다. 장거리 여행이 어려웠던 아버지는 ‘전국노래자랑’을 보면서 공간 이동의 욕망을 충족하고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랜선 여행이랄까? 변함없이 일요일 12시 10분이 되면 텔레비전에서 딩~동~댕 경쾌한 소리가 울렸고, 아버지 얼굴은 환해졌다.
아버지께서 이 말을 듣는다면 서운하시겠지만, 사실 ‘전국노래자랑’은 촌스러운 방송이다. 무대 장치도, 참가자들도, 초대 가수도, 연주하는 악단도 촌스럽다. 흥에 겨운 관객들이 무대 앞으로 나와서 춤을 추곤 하는데, 이 또한 촌스러운 막춤이다. 하긴, 사회자 송해 아저씨도 세련된 멋쟁이로 보기는 어렵다. 이처럼 촌스럽기 짝이 없는 프로그램이 사십 년 넘도록 전파를 탔다니 불가사의하다. ‘전국노래자랑’과 같은 동갑내기인 '전원일기'도 이미 오래전에 전설이 되었는데 말이다.
‘전국노래자랑’은 B급 오락프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묘한 것은 리모컨을 이리저리 누르다가도 이 촌스런 방송을 만나면 채널이 고정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끝까지 시청하는 일은 드물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전국노래자랑’이 없는 일요일이란 상상되지 않는다. 숱한 방송 프로그램들의 생멸 속에서도, ‘전국노래자랑’은 엑스맨의 울버린처럼 죽을 때까지 죽지 않을 것만 같다.
#2
요 몇 년간, 다양한 종류의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등장했다. 이러한 방송을 볼 때면 뭔지 모를 불편함이 느껴졌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출연자들의 안쓰러움 때문이다. 선택받기 위해 애쓰는 그들의 얼굴은 땀에 젖었고, 목에는 핏대가 서 있다. 관객들도 감동했다는 듯 과장되게 입을 벌린다. 오징어 게임과도 얼핏 닮았다.
물론 ‘전국노래자랑’과 오징어 게임은 거리가 멀다. 출연자들은 가창력 과시보다는 자신의 끼를 뽐내는데 열중한다. 참가자를 따라온 동네 사람들은 떼를 지어 응원의 현수막을 흔들기도 한다. 어떤 이는 ‘땡’ 소리에 화를 내면서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떼를 쓰는데, 진짜로 기회를 주기도 한다. 딱히 불공정이란 항의나 외침도 없이 객석에는 웃음이 퍼져나간다.
#3
진행자 송해 아저씨는 영원한 오빠였다. 언제가 손주뻘인 여중생이 “오빠”라고 부르자, 그는 남자 친구 흉내를 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사춘기 남학생이 등장한 것이다. 관객들은 배꼽을 움켜잡고 웃었다. 짙은 석양이던 송해 아저씨는 기꺼이 우리의 오빠, 형님, 아저씨가 되어 주었다. 고목 나무에서 꽃들이 행복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송해 아저씨를 보면 에니메이션 영화 <쿵푸펜더>의 대사부 늙은 거북이 ‘우그웨이’가 떠오른다. 송해 아저씨와 거북이 대사부는 주름부터가 닮았다. 게다가 긍정과 여유의 시선도 비슷하다. 대사부 우그웨이가 손제자인 포에게 오늘을 살라며 Present의 의미를 일깨워주듯. 진행 자체가 기네스 기록이었던 송해 아저씨도 오늘 하루가 곧 선물임을 보여주었다.
개그를 코메디라 불렀던 라떼 시절. 송해 아저씨는 B급 코메디언 이었다. 그 시절 시청자들은 구봉서, 배삼룡, 이주일과 같은 큰 별들만 바라보았다. 그는 이 별들이 빛날 수 있도록 받쳐주는 캔버스였다. 없어도 되고, 있어도 되는 B급이었다. 그는 큰 별들 사이에 함께 하는 것에 만족할 뿐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저 무색무취의 하얀 도화지였다.
#4
송해 아저씨는 만만하다. 그 만만함이 그를 최장수 방송인으로 만든 비결이었으니, 인생이란 역설법이다. ‘전국노래자랑’의 참가자들은 그 만만함에 기대어 노래를 불렀고, 몸을 흔들면서 끼를 펼쳤다. 얼굴도, 키도, 인기도 B급이었던 그는 그렇게 만만한 무대의 일부가 되어갔다.
송해 아저씨의 마음에는 두 가지의 그리움이 아프게 자리하고 있다고 했다. 하나는 황해도 재령에 두고 온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다. 학생 시절 옹진반도의 서해를 헤엄쳐 남으로 건너온 그에게 어머니는 그리움이자 아픔이었다. ‘송복희’라는 본명 대신 바다 해의 ‘송해’라는 가명의 탄생에는 사모곡이 담겨있다.
다른 하나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다. 송해 아저씨는 그때 자살을 생각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 같은 그리움이 아흔이 넘도록 무대를 서게 하는 힘은 아니었을까? 저 나이에도 돈을 번다며 그를 부러워했던 세상의 눈은 그 내면의 그리움을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5
고목 나무에는 여전히 꽃이 피어있건만, 자연의 순리를 벗어날 수는 법이다. 아내는 송해 아저씨가 화면에 나오면 “아휴, 아흔이 넘었으면 그만 해야...지”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자는 논리이다. 시비를 따질 일도 아니지만 그다지 고운 말도 아니다. 어찌 보면 그 연세에도 자신의 몫을 감당했다는 사실은 앞으로 늙어갈 모든 이들이 감사할 일이다. 더위가 시작되던 얼마 전. 송해 아저씨가 향년 95세로 돌아가셨다. 큰 병치레 없이 떠났다니 축복된 생의 마감이었다.
한 인터뷰에서 송해 아저씨는 자신을 가리켜‘행복한 딴따라’라고 했다. 어깨 힘 빼고 살았던 지난 세월에 대한 고백일 것이다. 그나저나 그가 떠난 ‘전국노래자랑'의 빈자리는 누가 채울까? 바라건데, “서울만 있냐? 지방도 있다!”를 만방에 선포할 또 다른 만만한 딴따라의 등장을 그려본다.
문득,‘전국노래자랑’에 내 고향 완도가 등장할 차례가 되지 않았나 싶다. 언제든지 출연할 준비는 되어 있을 것이다.“전~국~노래자랑, 완도 군민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일요일의 남자 저 송해, 인사드립니다.”라는 행복한 딴다라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