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갈수록 늘지 않는 영어와의 갈등
운전하던 와이프가 큰아이에게 전화를 하려고 차량에 있는 음성 전화 연결 시스템에 말합니다.
"Call 0000!"
"Sorry, do you want to call 0000?"
"Call 0000!"
시스템은 와이프가 몇 번을 말해도 연결하지 못하고 급기야는 소리친 큰아이의 이름을 인식하지 못하고 저장되어 있는 엉뚱한 다른 사람인가를 묻다가 결국 스스로 시스템이 꺼져버립니다. 열받은 와이프가 씩씩거리며 이야기합니다.
"내가 이걸 정말 부숴버리던지 해야지. 내 발음이 그렇게 형편없나?"
큰 아이의 이름에는 영어 알파벳 'Z'가 들어 있는데 당연히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닌 우리 부부에게는 간단하지 않은 발음입니다. 캐나다에 와서 20년 넘게 살고 있는 저와 와이프는 항상 발음과 억양 문제로 엉뚱한 에피소드를 겪곤 합니다.
한국인에게서 가장 많이 나타난다는 P와 F, B와 V 그리고 R과 L의 발음 차이 외에도 단어에서 나타나는 묵음과 연음도 들 수 있는데 대화중 연음이 가장 마침내 토론이 끝나고 침묵이 찾아왔습니다. 캐나다에 전설(?)같이 내려오는 이야기로 영어를 잘 못하시는 분이 그로서리에서 장을 보고 계산 중에 캐셔가 계속 미역이 어쩌고 저쩌고 영어로 물어보길래 '여기 무슨 미역이 있다고 그러지?' 하며 의아해했는데 옆에 있던 어린 아들이 그러더랍니다.
"엄마, 캐셔가 밀크 이야기 하는 거야"
이민 초기 어떤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저보다 연배가 많으신 분들이 무슨 일인지 심하게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보간이야"
"아니야, 그게 어떻게 보간이냐? 번안이야"
"뭔 소리야! 바한이야"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토론토 외곽에 새로 오픈하는 대규모 쇼핑몰인 'Vaughan Mills'의 이름을 놓고 서로가 맞다고 주장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될 것을 오지라퍼인 제가 대화에 끼어들었습니다.
"아마 봔으로 읽을 겁니다."
"자네가 어떻게 알아?"
"Last name으로 많이 쓰는데 그 성을 쓰는 미국 배우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그래서 알게 되었습니다."
"...."
마침내 토론이 끝나고 침묵이 찾아왔습니다.
새 직원이 회사에 입사했는데 이름이 Cecil이라고 소개를 받아 혼자서 생각했습니다. '무슨 남자 이름이 여자 이름같이 세실이지?' 옆의 동료가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세실이 아니고 '시슬'로 발음해. 시슬의 여자이름은 Cecilia이고."
여러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이 살고 있는 토론토에는 미국식, 영국식, 동유럽식, 인도식, 히스패닉, 중국식 영어가 각기 다른 발음과 억양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각각의 발음이 자연스럽게 통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이태리 요리에서 많이 사용되는 허브인 'Basil'을 한국에서는 이태리 발음으로 '바질'로 부르지만 영어로는 '베이즐'로 부릅니다. 유명한 미술가인 'Michelangelo'를 우리는 '미켈란젤로'라고 읽고 부르지만 영어로는 '마이클안젤로'입니다. 또한 스웨덴의 자동차 회사인 Volvo의 티브이 광고를 자세히 들어보면 거의 '보보'로 들립니다.
프랑스어인 경우는 더 발음과 억양이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세계에서 프랑스를 사용하는 도시 중 파리 다음으로 큰 도시인 캐나다의 몬트리올 출신인 친구가 파리에서 사용하는 프랑스어가 캐나다와 달라서 무척 당황했다는 아이러니한 일도 있었습니다.
영국 출신의 배우들 중 Hughes Grant, Kate Winslet, Emily Blunt를 좋아하는데 그들의 초창기 영국식 발음과 억양은 할리우드 영화에 본격적으로 출연하면서 미국식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런 변화에 대해서 케이트 윈슬렛이 방송에 나와 바뀌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을 본 기억이 나는데 그래도 휴 그랜트는 많이 바뀌지 않아 아직도 영국식 억양을 그대로 사용하는 배우 중의 한 명입니다.
얼마 전 토크쇼에 나온 에밀리 블런트가 미국에 살면서 바뀐 아이들의 언어 습관에 대해 질문을 받는데 처음에는 'water'를 영국식 억양인 '우어터"로 발음하던 아이들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미국식인 '워-러'로 바뀌었다고 웃으면 이야기하는 모습에 같은 영어를 사용하지만 주어진 환경에 따라 언어 습관이 바뀐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를 볼 수 있었습니다.
영국식 발음과 억양을 생각하니 떠오르는 추억이 있습니다.
오래전 대학에 입학하고 시작한 교양영어 과목에는 영어 듣기 수업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먼저 수업을 받은 친구로부터 학생마다 유리로 칸막이가 된 책상에서 헤드폰을 끼고 앞쪽에 앉아있는 외국인 강사와 영어로 수업을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마침내 첫 수업이 있는 날이 되었고 앞 강의가 조금 늦게 끝나는 바람에 5분 안에 멀리 떨어져 있는 영어 듣기 강의실로 전력으로 뛰어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같이 듣는 친구와 함께 머리를 휘날리며 뛰었지만 결국 시간에 늦어 이미 시작한 강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를 찾으려고 헤매니 강의실 제일 앞에 위치한 책상에 앉은 외국인 강사가 이야기합니다.
"와서 맡아!"
"?"
"와서 맡아!"
부산출신인 친구가 제게 속삭입니다
"절마 뭘 맡으라는 기고?"
"니는 AFKN 마이 든는다문서 모르겄나?"
"모르겠는데..."
'아이엠 쏘리'를 연발하며 친구와 앞으로 나갔습니다.
"내는 아직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니는 무신 냄새 나나?"
"글쎄 안 나는데 뭘까?"
어쨌거나 어렵게 자리를 찾아서 늦게 들어간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영어 잘하는 다른 학생이 이야기해 줍니다. 강사가 너희들에게 물어본 말은 'What's the matter?'였다고. 그리고 그가 인도계 영국인인 까닭에 발음도 좀 애매했다고.
이야기를 듣고 친구와 서로 한참을 웃었습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시작한 영어로 듣기 말하기는 학창 시절, 카투사로 군복무시절 그리고 해외 무역영업을 했던 사회생활을 거쳐 마침내 영어를 쓰는 캐나다에 정착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영어에 관한 한 갈길이 한참 먼 것 같습니다. 그에 반해 요즘 한국 티브이 방송에 나오는 젊은 외국인들은 어떻게 그렇게 한국말을 정확하고 유창하게 잘할까요. 부럽지만 정말 궁금할 따름입니다.
(전면사진 출처: Goo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