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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Jun 16. 2023

잔소리 코리아

2023년의 한국을 여행하며

한국에 잠깐 들어왔다가 한국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다. ‘잔소리 대마왕’ 한국이다. 어느 공중 화장실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는데, 바로 화장실 칸 마다 문 안쪽에 붙어있는 ‘불법촬영 금지’ 스티커였다. 한국에만 살 때는 늘 보면서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던 것이, 해외 생활 조금 했다고 낯설게 보였다. 화장실에서 누군가를 촬영하는 일은 당연히 불법이고, 이처럼 도덕적, 상식적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면 독일에서는 캠페인과 홍보물로 강조하지 않는다. 너무 당연하니까. 한국에서는 다른 나라에 비해 몰래카메라 범죄가 더 심한 건지 어쩐지 통계적인 사실은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정말 슬픈 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화장실 칸마다 이런 스티커를 붙이는 게 얼마나 범죄 예방에 도움이 될지 잘 모르겠다.


아무 잔소리가 없는 공중 화장실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촬영 금지 경고문이 없는 화장실이라도 ‘휴지는 변기에’ 또는 반대로 ‘휴지는 쓰레기통에 등등 저마다의 요구사항이 깨알같이 꼭 붙어있다. 규칙이 아니라 상식인 변기를 앉아서 사용해 주세요 라든가 ‘변기에 휴지 외 이물질 투입 금지’, 금연 안내문, 분실물 찾기를 위한 화장실 칸번호와 연락처, 혹은 광고 스티커들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동안 잠시도 머리를 비울 수 없게 한다. 세면대와 거울 주변에도 핸드타월은 한 장만 사용해 주세요’, ‘쓰레기 분리배출 등 공중도덕을 한치라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훈계가 이어진다. 한국의 공중 화장실은 손을 몇 초간 씻어야 하는지도 알려주고, 때로는 구닥다리 명언이나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라는 식의 무의미하고 쓸모도 없는 말을 속삭이기도 한다.

지하철역도 마찬가지다. 열차 도착 안내 전광판에는 틈틈이 ‘꼬리물기 승차 금지’, ‘출입문 끼임 주의’ 등의 각종 걱정과 염려가 표출되고, 내릴 사람이 먼저 내린 후에 탈 사람들이 탈 수 있도록 바닥에는 동선을 안내하는 스티커와 안내문이 붙여져 있다. 지하철 승강장에서 출구로 나가는 내내 바닥과 벽에는 행여나 누가 길을 잃을까 화살표와 안내문이 도배되어 있다. (길이 낯선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서비스고, 독일에는 부족한 부분이기도 하다.) 우측통행은 얼마나 중요한지, 한 발짝도 반대 방향으로 내딛지 않도록 바닥과 계단의 화살표가 끊이지 않아서, 엉뚱한 데로 새지 않고 여기서 저기까지 걸어가기 미션을 수행하는 기분이기도 하다. 서울 같은 과밀 도시에서 우측통행 같은 작은 에티켓이 모두의 안전을 지키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해외의 많은 대도시들이 스티커와 안내문, 각종 경고문과 잔소리 없이 어떻게 그럭저럭 생존하고 있는지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한국에서는 사회 전체가 이러한 마이크로매니징을 통해 개인을 쉴 틈 없이 통제하고 이끈다. 정도(正道)와 정방향을 벗어나지 않도록 말이다. 지하철역 계단을 한 칸 오를 때마다, 화장실이라는 가장 은밀한 공간에서조차 지침이 주어진다. 이러한 독특한 문화 덕분에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이라는 전지구적 위기에서도 방역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조금 다른 영역인 패션이나 기술 발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존재하는 것 같다. 패션이나 기술에서는 경고문과 안내문 대신 광고가 있을 뿐이다. 트렌드를 알려주는 광고라는 거대한 지침을 사람들이 순응적으로 따르는 모습은 공공시설의 도덕적 잔소리가 작용하는 방식과 비슷한 맥락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짧은 시간에 산업화와 현대화를 이루면서 물질문명에 비해 조금 뒤처진 공중도덕의식을 이런 식으로 키워온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처음으로 서구식 화장실을 접하게 된 사람은 양변기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정말 모를 수 있다.) 옛날에는 화장실에서 한줄 서기나 에스컬레이터 왼쪽 통로 비워놓기 같은 소소한 규칙들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부터 상식이 된 것처럼, 한 세대 정도 지나면 화장실 깨끗하게 쓰기나 불법촬영 하지 않기 정도는 시민들이 스스로 지키지 않을까?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서로를 배려할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고 내버려 뒀다간 나라가 정말 엉망진창이 될까? 각종 안내문과 스티커가 미관상 그리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은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이 수많은 지침을 보고 있으면 의아하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불미스러운 만행과 사건 사고가 있었기에 이렇게나 빽빽한 경고와 안내문을 마주해야 하는 건지, 머지않은 미래에 이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The Subject and Power(주체와 권력)>에서 현대 서양 국가가 가지는 권력의 특징은 기독교에서 목자로 묘사되는 예수가 가지는 역할과 매우 유사하다고 설명한다. 푸코가 ‘목가적 권력’이라고 칭하는 이 권력은 목자가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놓치지 않고 올바른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처럼 개인의 일상 속, 개인의 발걸음 한 짝마다 파고드는 국가의 위력이다. 개인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 국가가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듯 목자처럼 행동한다면, 개인은 무지몽매하며 통제와 감시가 필요한 존재로 전락한다. 우리나라는 기독교에 기반한 서양국가가 아님에도 정치권력이 전통적으로 가부장적인 성격을 띤 탓에 푸코가 말하는 목가적 권력에 아주 가까운 형태를 보이는 것 같다.


목가적 권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목적지와 방향을 아는 것이고, 무엇이 공동의 목적지와 방향인지를 정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힘의 논리가 작용한다고 푸코는 주장한다. 푸코는 심지어 현대의 시민이 마주한 가장 중요한 투쟁은 이렇게 짜인 권력관계에 맞서 싸우는 일이라고 말한다. 물론 푸코는 공중화장실의 경고문에 관해 논설하지 않았다. 그가 대표적인 예로 든 것은 국가의 훈육 기능을 담당하는 학교, 군대, 감옥 등이다. 누가 우등한 학생이고 누가 열등한 학생인가, 누가 모범수고 누가 구제불능의 사회악인가,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인가와 같은 문제를 국가 권력이 결정하는 것을 당연하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 푸코의 입장이다.


범죄자나 공중도덕을 어기는 사람이 비정상이라면, 불미스러운 사건 사고를 경고문을 도배함으로써 막으려 하는 권력 기관은 정상인가? 혹은 광고나 홍보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한 뼘, 한 줄 생길 때마다 공공선을 위한 어떤 잔소리를 집어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각종 시설들의 관행은 정상인가? 이 정도의 안내/경고문 공해는 정말 시민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생각해낸 것이라기보다는 사건 사고가 일어났을 경우 면피하려고 취한 액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공공질서를 지키는 일은 물론 바람직하지만 권위자, 책임자의 통제와 간섭에 관대한 현상은 바람직하지만은 않다. 잔소리와 경고문들을 보고 있자면 권력이 우리를 시민이 아닌 엄격한 기숙학교의 학생 정도로 다루는 것 같다.


특히 불법촬영 금지와 같은 경고문이 일상에 스며든 것은 정말 희한한 현상이라는 생각을 모두가 꼭 해봤으면 좋겠다. 그 화장실을 사용하는 사람의 99.999%는 범죄자가 아닌, 그냥 볼일을 보고 싶은 평범한 시민이다. 몰래카메라가 존재하는 우리 사회의 일면을 볼일을 보는 와중에, 잠재적 피해자의 입장에서 되새겨야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몰래카메라 범죄의 심각성은 인정한다. 또 범죄를 예방하고자 하는 사회의 노력은 가상하다. 그러나 학교에 땡땡이 금지, 은행에 ‘강도 행위 금지’, 외진 골목에는 살인 금지와 같은 문구가 쓰여있는 한국을 보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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