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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Oct 03. 2023

<무소유>를 소유하며

이번 여름 학기에 '사유재산'이라는 수업을 들었다. 로크와 헤겔이 주장한 사유재산의 필요성부터 마르크스시즘을 기반으로 한 사유재산 비평론과 현대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대안까지를 아우르는 세미나였다. 이 수업에서 학점을 온전히 따려면 방학 동안 학기말 과제인 ‘하우스아르바이트’(하우스 Haus는 집, 아르바이트 Arbeit는 일, 즉 하우스아르바이트는 집에서 하는 학업, 학기말 과제/논문을 뜻한다)를 써야 했다. 나는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와 엥겔스(1820 - 1895)가 <독일 이데올로기>(1845 - 46)에서 '분업과 사유재산은 동의어'라고 논설한 부분을 주제로 글을 쓰기로 했다. 구체적으로는 자본주의에서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은 분업과 차별화된 임금을 정당화시키고 계급 간의 분리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주장을 다루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유재산은 '내 것'이라는 라벨을 통해 나의 소유물을 타인의 손길로부터 보호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소유하는 만큼 누군가는 덜 소유해야 하는 제로게임을 전제로 하는 문제가 있다. 궁극적으로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대안은 공동소유, 즉 공산(共産)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구 소련의 붕괴를 통해 공산이 자본주의를 견제할만한 대안이 아니란 것을 전 세계가 지켜봤지 않은가. 사유재산이 문제긴 한데 그렇다고 공동재산 또한 답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사실은 논문 쓰는 내내 들었다. (이러한 의구심은 당연히 논문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의구심을 제기한 순간 그에 관한 내 입장을 설명하고 근거를 대야 하기 때문에, 그 의문과 대안에 관해 거의 새로운 논문 하나를 써야 할 수준으로 일이 커진다.)


과제가 마무리되어 갈 즈음, 우연히 재독 한인 커뮤니티에서 누군가 한국 책을 정리한다는 글을 발견했다. 독일에서는 한국어로 된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만큼 나는 이런 글은 꼭 관심 있게 본다. 백 권 가까이 되는 한국 책을 싼 가격에 내놓은 걸 보니 판매자가 일명 '귀국 짐 정리'를 하는 것 같았다. 무슨 사연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백 권 모두 한국에서 가져온 거라면 그 정성이 대단하고, 반대로 이걸 독일에서 중고로 구해 조금씩 모아온 거라고 해도 그 열정이 보통이 아니다. 아무튼 빽빽한 책 판매 리스트에서 눈에 띄는 책이 있었다. 법정 스님(1932 - 2010)의 <무소유>라니!


마르크스가 주장한 사유재산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한 달 넘게 관련 서적을 찾아 읽고 그 주제에 몰두하느라 '소유'라는 개념에 약간 이골이 나 있는 상태에서 '무소유'라는 단어는 단번에 내 머리를 식혀주는 것 같았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구하기 힘든 이 책을(<무소유>는 법정 스님의 유언에 따라 스님이 돌아가신 이후 절판되었다) 이렇게 저렴하게 살 수 있다니, 이걸 당장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즉시 판매자에게 연락했고 이틀 후 택배로 책을 받을 수 있었다.


책은 1970년에서 1976년 사이에 쓰인 에세이를 묶은 것이다. 첫인상은 우선 1970년대에 이미 각박한 세상을 논하는 스님의 관점이 재미있다는 점이었다. 그 당시엔 전 지구 인구가 삼십몇 억이었다고 하고, 한반도 인구는 남북한 통틀어 5천만 정도였다고 하니, 우리는 50년 사이 인구가 두 배 가까이 불어난 개체가 된 것이다. 그 사이에 일어난 변화를 글을 통해 간접 체감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지금은 당연한 것들이 그때는 새롭고 충격적인 문제의식의 주제가 되는 모습도 흥미로웠다. 예를 들면 "흙과 평면 공간"이라는 꼭지에서 서울을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늘어가는 고층 아파트의 모습을 보며 한탄하는 스님의 모습은 매우 반가웠다. 이제 그런 걸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드물어진 시점에서, 고층 아파트 같은 것들이 막 생기기 이전의 한국을 기억하고 있고, 그래서 더욱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하는 어른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위로가 되었다. 줄곧 산사에서 살던 법정 스님은 어떤 일 때문에 아파트에서 합숙해야 했던 때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8층에서 단추만 누르면 삽시간에 지상으로 내려온다. ... 물론 연탄불을 갈 시간 같은 것에 신경을 쓸 필요도 없다. 이렇듯 편리하게 사는 데도 뭔가 중심이 잡히지 않은 채 겉돌아 가는 것 같았다.
... 잘산다는 것은 결코 편리하게 사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우선 우리는 보행의 반경을 잃은 것이었다. 그리고 차단된 시야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몸의 동작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활발한 사고 작용도 따른다. 툭 트인 시야는 무한을 느끼게 한다.
그곳에는 수직 공간은 있어도 평면 공간은 없었다. 그래서 이웃과도 온전히 단절되어 있었다. ... 그리고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흙이다. 그렇다, 인간의 영원한 향수 같은 그 흙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늘 추상적으로 살았던 것이다. 마치 온실 속의 식물처럼. (p. 42 - 44)


출근길의 빽빽한 만원 버스와 달리 듬성듬성 채워진 조조할인 극장의 객석이 참 정답다는 감상을 전하는 "조조할인", 현대인들이 대중매체의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을 통해 들은 피상적인 말, '소음'을 재생산하는 현상을 관찰한 "소음 기행"과 같은 꼭지들의 사회 비평은 2023년에 적용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아 보였다. 또한 어린 왕자에게 편지를 쓴 꼭지에서는 스님의 풍부한 문학적 감성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스님은 모국어가 너무 좋아 다음 생에도 한반도에서 태어나고 싶다고도 하셨다. 그래서인지 단어 하나하나가 정갈하고 정감이 갔다. 번역투와 외래어에 상당히 오염된 현대의 한국어와 달리 <무소유>의 한국어는 '진짜 한국어'같은 느낌이었다.


수도승으로서의 삶의 장면이 묘사된 몇몇 부분에서는 그때의 세상은 얼마나 달랐는지를 보고 놀라기도 했다. 산중에 사는 스님들이 식료품이 떨어지면 민가로 내려가 탁발하는 식으로 생존했다는 내용이나, 너무도 자비로웠던 수연스님이 어느 날 몹시 아팠던 법정스님을 위해 약국이 있는 옆도시까지 걸어가 동냥해 얻은 돈으로 약을 사고 또 걸어오느라 하루가 꼬박 걸렸다는 이야기. 또 어느 절의 곳간에서 쌀을 훔쳐 도망치려는 도둑이 있었는데 쌀자루가 너무 무거워 들쳐업지 못하고 낑낑거리고 있는 찰나, 주지스님이 마침 이 모습을 목격하고 소리치기는커녕 도둑의 뒤로 다가가 무거운 자루를 쉽게 들어 올릴 수 있게 슬쩍 아래서 밀어주었다는 설화 같은 이야기까지(이 도둑은 나중에 신도가 되었다고 한다). 모든 것에 가격이 있고 철저한 기브 앤 테이크식 계산을 바탕으로 하는 지금의 한국에서는 이와 같이 자본주의논리를 초월한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은 불가능할 것 같다.


책의 제목이 된 "무소유"라는 꼭지는 고등학교 때 국어시간엔가 읽어봤던 글이라 내용이 새롭지는 않았지만 스님이 말씀하신 무소유라는 개념이 서구식 자본주의를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왜 와닿았고 이 책이 왜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알 것 같았다. 소유만큼 집착도 커진다. "무소유"는 스님이 난초를 선물 받고 기쁜 마음으로 돌보고 가꾸다가, 화분을 비로부터 제때 대피시키지 못해 난초가 시름시름 앓는 모습을 보고 괴로워하는 자신의 모습에 관한 성찰이다. 스님은 난초를 다른 이에게 줘버리고 나서야 홀가분함을 되찾는다.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소유하는 일이 언제까지나 소유자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건 빠른 경제성장을 이룬 한국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경험해 본 현상이었을 것이다. 많은 것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비참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 사회의 비정한 논리를 개인이 한 순간에 엎어버릴 수는 없지만,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조금만 욕심을 적게 부리면 가지지 못한 자의 비참함의 크기도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책의 거의 끝자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인간 존재에 있어서 기본적인 구조는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있다는 것은 함께 있음을 뜻한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는 없다. 서로서로 의지하여 관계를 이루며 살아간다. 그러기 때문에 저쪽의 불행이 내게 무연하지 않다. (p.157)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펼친 사유재산을 향한 비판도 본질이 같다. 사유재산은 함께가 아닌 각자도생과 단절을 불러일으킨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핵심적인 문제는 누구는 점점 가난해지고 누구는 점점 부유해지는 경제적 불평등 자체보다 이러한 구조로 인해 사람이 다른 사람을 경쟁상대로 혹은 이윤 창출의 도구로 여기는 사회심리적인 현상인 인간 소외였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붕괴와 노동자의 혁명을 통한 공산주의의 도래라는 다소 극단적인 꿈을 가지긴 했지만 그는 자본주의의 논리에서 소외된 인간을 공동체 안으로 이끌어내고 그 공동체 속에서 인간의 본모습을 찾는 사회를 소망했다는 점에서 법정 스님의 <무소유>와 ‘무연’(이 책에서 알게 된 단어다) 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는데 완벽한 마무리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이질적인 색감이었던 것이다. 마지막 장이 파손되었거나 누가 찢어가기라도 한 모양인지, 아이보리 빛을 띠는 책 전체 페이지와 달리 창백한 A4용지에 복사 혹은 출력된 페이지가 책의 끝에 접착제로 붙여져 있었다. 귀한 책을 너무 싼 가격에 구했다는 일종의 양심의 가책이 다행히도(?) 이로써 사라졌다.

접착제로 붙여진 마지막 장 (오른쪽)


내용은 잘 보존되어 있으니 한 장 정도 딴 데서 오려붙여진 건 아무렇지도 않다. 우리말로 쓰인, 우리나라 사람의 우리 문화를 꿰뚫어 보는 지혜, 이 귀한 책을 독일땅에서 얻을 수 있는 이 세상이 나는 아직도 신기하다. 이 책을 손에 넣게 된 일이 집착을 부르는 헛된 소유가 아니라 내 삶에 물결과 흔적을 남기는 어떤 인연의 씨앗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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