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 종종 귀여운 어르신들을 발견한다. 그중 하나가 마트에서 잡지 사는 어르신들이다. 독일의 마트나 편의점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지 오래인 잡지를 살 수 있다. 패션이나 디자인 잡지가 아니라 각종 뉴스와 가십, 퀴즈를 한데 모아놓은 잡종 장르가 대부분이라 표지부터 촌스럽고 현란하다. 이런 걸 누가 사나 싶지만 정말로 여전히 이런 잡지를 찾는 어르신들이 있다. (참고로 독일 마트에선 한참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게 일상이다 보니 앞사람 카트에 뭐가 담겼나 저절로 살펴보게 되는 것 같다.) 의외로 이런 광경에 나는 독일이 정말 선진국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스마트폰이 아무리 편리해도 마트의 코너 중 어떤 곳은 과거처럼 여전히 늙은 나와 친구들의 향수를 달래주고 기호를 채워주고 있다는 것, 선진국에서나 가능한 일 아닐까.
우리나라의 70, 80대 어르신들은 젊은 시절부터 해오던 취미 중 몇 가지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티비와 인터넷이 없던 시절의 여가시간을 채워준 아날로그 취미들은 우리나라에서 왜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려야 했을까? 친구나 이웃과 꼭 함께 해야 했던 바둑, 장기, 공기 같은 (오프라인) 놀이들, ‘마실 나가기’처럼 집 밖에 나가는 것 자체가 목적인 활동들은 디지털화와 비대면 서비스가 첨단 수준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에서 설 자리를 잃은 것 같다. 우리나라는 전후 복구부터 새마을운동을 통한 도시화 및 산업화, 인터넷의 빠른 보급 등 80년 안에 많은 변화를 엄청난 속도로 받아들였다. 그 속도가 엄청났던 나머지 우리는 어딘가 체한 걸지도 모른다. 지금도 진행형인 급속한 사회변화 속에서 우리것, 옛것은 너무 저평가되었다.
경북 칠곡의 농촌 마을에서 베이비부머 세대로 태어난 우리 아버지가 집에 전기가 처음으로 들어온 게 열세 살 때 일이라고 하니, 우리 할머니 세대는 서른이 넘도록 집에 냉장고와 세탁기가 없는 삶을 살았다는 뜻이다. 집안일과 농사의 대부분을 전기 없이 해결해야 했던 당시 농촌의 어르신들은 취미란 걸 가질 물리적 시간이 사실 적었을 것이다. 반대로 지금은 기계가 많은 일을 도맡아하는 대신 그로 인해 남는 시간을 사용하는 또다른 기술을 터득해야 하는 세상인 것 같다.
유럽에서 시작되어 어느 순간 우리 일상을 잠식한 카페 문화는 반대의 예다. 유럽에는 카페 문화가 역사가 깊다 보니 유럽 어르신들은 '요즘 사람들' 못지않게 카페에서 여가시간의 많은 부분을 보낸다. 유럽에서 카페라는 것은 아주 예전부터 동네마다 꼭 있던 것이고 그 전통과 라이프스타일이 여전히 세대를 초월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독일의 카페에는 친구나 가족과 함께 카페를 찾는 어르신은 물론 혼자 앉아 신문을 읽는 할머니, 혼자 와서 커피와 조각 케이크를 음미하는 할아버지와 같은, 우리나라에서는 언뜻 상상하기 힘든 광경도 흔히 볼 수 있다.
반면 한국은 카페 문화가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고 젊은 층을 위한 소비문화의 일부로 성장해 왔기 때문에 카페가 가지는 의미가 확연히 다르다. 2000년대 이전에도 다방이나 빵집 같은 공간이 도심에서 흔하긴 했어도 지금처럼 친구나 연인을 만나는 주된 장소는 아니었다. 21세기 한국의 카페는 분위기 좋은 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사람을 만난다는 차원에서 비싼 음료 가격을 감수하는 곳이다. 어르신들이 좋아할 만한 음료가 적고, 메뉴판에 어르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음료 이름 자체가 많지 않다. 어르신들은 밥 한 끼 값에 맞먹는 커피값을 기꺼이 내고 카페에 가는 '라이프스타일'이 젊은 세대만큼 장착되어있지 않으니 불만이 있으면 안 가면 그만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노년층은 카페문화의 주 소비층이 아니기 때문에 업계에서는 노년층의 입맛을 신경 쓸 이유가 더욱 없어진다. 그나마 농어촌의 어르신들은 마당이 있는 집에 살거나 마을회관 같은 공간이 있어 동네에서 사람들과 만나 차 마실 공간이 있다 쳐도 대도시의 어르신들은 시간은 많은데 갈 곳이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다.
노키즈카페 같은 것도 잔인하지만, 한국에 00세 이상 출입금지와 같은 규칙이 있는 카페가 있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는 참 암담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규칙을 버젓이 써붙여놓은 카페는 극소수일지 몰라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세련된 카페에 앉아있으면 왠지 흘끔 쳐다보게 되는 것이 우리 대다수의 반응일 것이다. 노인이 사회문화적으로 소외되고 배제되는 이런 현상은 지금의 어르신들이 카페 문화라는 걸 새로운 규범으로 인정하고 배워나간다거나 스스로 카페의 소비자로서 존재감을 키워나간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지금 카페를 줄기차게 찾는 세대가 노년층이 되면 분명 새로운 어떤 것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이걸 못하거나 좋아하지 않으면 집 밖에 나가도 할 게 없는 그런 현상이 분명 반복될 것이다. 자본주의의 물결은 새로운 유행을 쉼 없이 우리 코앞에 들이미니까.
카페뿐만 아니라 베를린에서 서울보다 훨씬 많은 어르신이 눈에 띄는 곳은 무엇보다 길거리에서다. 지팡이를 짚거나 보행 보조기를 밀거나 휠체어에 앉은 어르신을 비롯해 정정하게 걸어 다니는 어르신은 물론 손 꼭 잡고 데이트하는 어르신들도 흔하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이 도시에는 늙은 사람도 산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어느 날 베를린에서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중이었다. 멀리서 자그마한 할머니가 보행 보조기를 밀며 정말 느린 속도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러려니하고 계속 책을 읽었는데 한참 후 (그제야) 내가 있는 곳에 다다른 할머니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책을 읽고 있냐, 어디서 왔냐 그런 걸 물어보시기에 짧은 대화를 나눴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에 책을 아주 좋아해서 집에 책이 5천 권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사는 양로원에는 그렇게 많은 책을 가지고 오지 못했다고. 할머니는 본래 체구도 작아 보였지만 매우 말랐고 등까지 굽어 정말 정말 자그마했다. 재미있게 읽으셔, 하고 가던 길을 가는 할머니의 느리지만 처절한 발걸음이 기억에 남는다. 5분쯤 지났을까, 집에 가려고 가방을 챙겨 자리를 떠났다. 큰 사거리에 도착해 신호등 앞에 섰는데 세상에나, 길 반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일 것이라 생각했던 그 자그마한 할머니가 아직 여기까지밖에 못 와서 신호등 아래, 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늙고 작고 느려진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한참을 생각했다.
독일에서는 미술관, 박물관, 클래식 공연장, 심지어 라이브 재즈바 같은 곳에서도 흰머리 관객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어르신들이 젊었을 때는 그런 걸 즐길 경제적 여유가 없었고 또 그런 공간들 자체가 없었으니 독일과 비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제 이런 문화 공간들이 적어도 수도권과 대도시 위주로 갖쳐줘 있고 경제적 여력이 충분한 어르신들도 많은데, 게다가 수명도 길어져 은퇴 후 여생에 주어진 자유시간은 엄청나게 늘었는데, 그럼에도 후손 세대인 우리가 여가시간에 (카페가 됐든 미술관이 됐든) 같은 공간에서 어르신을 마주치는 순간이 얼마나 되는가. 인구 고령화가 심각하다는 통계자료는 쏟아지는데 우리 세대의 일상에 어르신들은 왜 보이지 않으며 그 많은 어르신들은 그 많은 시간 동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