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사랑하시죠?
케이팝 팬 활동을 열심히 하다 보면 고장 나는 게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시간감각이다. 노래 한 곡도 끝까지 들을 수 없는 1분이 때론 영겹의 시간만큼이나 길다는 걸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카톡’
[안녕하세요 ㅁㅁ뮤직입니다. 19시부터 이벤트가 진행될 예정이오니 반드시 본인의 네트워크 환경을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상통화로 진행되는 팬사인회 이벤트가 시작되기 직전 받는 안내 메시지 중 일부이다. 곧 차례가 돌아올 테니 전화를 받을 준비를 하라는 안내이다. 저 문자를 받은 뒤부터는 1시간 같은 1분이 시작된다. 전화가 오기까지 기다리는 동안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고 손 끝은 덜덜 떨린다. 너무 긴장되어 먹은 것도 없는데 금방이라도 속에 든 것이 다 쏟아져 나올 것 만 같다. 옆에 있는 친구가 손을 꼭 잡아 주어도 떨리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영상통화 팬사인회 (이하 영통)가 뭐길래 그렇게 긴장하냐고? 문자 그대로 영상 통화를 활용해 아이돌과 팬사인회를 하는 것이다. 코로나 때 오프라인 현장에서 면대면으로 만날 수 없으니 시작된 팬 이벤트 방식 중 하나다. 집합금지명령이 해제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영통은 이제 새로운 팬 이벤트 중 하나로 자리를 완벽히 잡았다. 영통을 통해 팬과 아이돌은 아이돌과 평균 2분가량의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음반사에서는 녹화 녹음을 금지하지만 대부분의 팬들은 영상통화 순간을 녹화한다. 순간의 기쁨을 오래도록 곱씹기 위해서다. (1초라도 날릴수 없을만큼 비싼 가격도 이유 중 하나가 된다.)
때문에 통화하는 1초도 놓치기 싫은 팬은 전화가 걸려 오면 빠르게 녹화 버튼을 누를 준비를 하며 긴장하며 기다린다. 전화가 걸려 오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수신을 허락한다. ‘시작하겠습니다’ 하는 음반사 직원의 무미건조한 멘트와 함께 화면 너머로 최애의 얼굴이 보인다. 재빠르게 녹화, 녹음 버튼을 누르고 준비한 대본을 손에 쥔다.
‘ㅁㅁ야!’
잔뜩 들뜬 내가 최애의 이름을 부른다. 최애가 나를 보고 ‘ㅇㅇ누나~’ 하고 반갑게 내 이름을 부른다. 이미 여러 차례의 사인회를 통해 얼굴을 익혔기 때문이다. 인사와 함께 이번엔 세상에서 제일 짧은 1분이 이어진다. 스탭은 칼같이 사전에 안내된 시간을 지키기 위해 연결이 시작됨과 동시에 스톱 워치를 킨다. 나 역시 나대로 스톱워치를 킨다. 제한된 시간 동안 준비한 말을 다 전달하기 위해서다. 이벤트의 공식적인 통화 시간은 1분 30초에서 2분 사이, 아티스트의 재량으로 그것 보다 더 진행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얄짤없이 통화가 종료된다.
째깍째깍. 시계가 돌아간다. 준비한 몇 개의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들으면 어느새 삐비빅-하고 건너편 화면에서 시간이 다됐음을 알리는 알람음이 울린다. ‘종료하겠습니다’ 스태프의 안내와 함께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ㅁㅁ야 안녕 또 보자’ 2분의 행복은 2초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내가 최애를 처음 만난 것도 바로 이 영통팬싸에서였다. 사실 나는 처음부터 이런 팬 이벤트에 응모할 생각이 없었다. 팬 사인회에 당첨되기 위해서는 앨범을 아주 많이 사야 한다고 알고 있었고, 그렇게까지 돈을 쓰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컴백을 기념해서 앨범을 몇 장 샀는데 그게 덜컥 팬사인회에 당첨 됐다. 그 사실을 당첨 안내 메시지가 도착하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당첨 됐다고? 믿을 수 없어 음반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정말로 당첨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다. 소위 말하는 ‘N장의 기적’이었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아이돌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렇게 태어나 처음으로 참여한 팬사인회 이벤트는 생각 이상으로 어마무시하게 재밌었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이내가 부탁하는 애교나 멘트들을 해주고, 내 이름을 불러주다니! 무언가 한 번으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딱 한 번만 더 해보고 싶었다. 두번째는 우연에 기댈 수 없었기에 아주 많은 앨범을 구매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두 번째 팬싸에서 최애가 나를 기억하고 아는 척을 해왔다. ‘저번에 보라색 옷 입었었죠!’
최애가 나를 기억하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너무 흥분되었다. 아이돌과 팬의 일방적인 관계에서 쌍방의 관계가 된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세 번째, 네 번째 사인회에 계속해서 응모하기 시작했다. 참여한 팬사인회 횟수가 쌓여 갈수록 최애와 라포를 쌓아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에게 존댓말을 하던 최애가 말을 놓으니 친해진 것 같았고, 나누었던 대화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것엔 내가 최애에게 기억되는 특별한 팬이 된 것 같았다. 최애가 나를 기억하고 있단 사실을 확인받을 수 있는 팬사인회가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음을 갈망하며 시간이 빨리 흐르길 바라던 나는 이제는 다음번 팬싸에 얼른 참여하고 싶어서 시간이 빨리 달려 주길 바랐다. 이벤트 공지가 뜨기를 기다리고, 당첨자 명단에 내가 있기를 기다리고, 팬사인회 날을 기다리고. 설레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내일을 기대하지 않았던 내가 최애와의 만남 때문에 다음 주를, 다음 달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아이돌 그렇게 따라다니면 걔네가 널 알아주기라도 해? 안다. 열심히 따라다니면 내 이름도 알고, 내 생일도 안다. 수많은 팬들 1,2,3,4,5,6,7…100,000,000명 중에 특별한 1명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수많은 이름 없고 얼굴 없는 팬 중의 이름 모를 아무개가 아닌, 하나의 얼굴과 이름을 가진 존재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게 뭐라고 견딜 수 없이 즐거웠다. 수많은 새우젓 중에 특별한 칵테일 새우가 된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물론 그 한 번의 만남인 팬사인회에 응모하기 위해서는 한 번에 사회초년생 월급과 비슷한 비용을 지불해야 했지만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어차피 정해놓은 나이까지 가진 돈을 다 쓰고 죽을 생각이었기에 스스로 합리화를 했다. 어딘가 고장 나기 시작했지만 이미 고장 나 있던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지 못했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별천지의 세상이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갈망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마비된 금전 감각 속에서 중독처럼 팬사인회에 끊임없이 응모했다.
가끔 당첨되지 못하고 떨어질 때면 며칠을 후유증을 앓고 나면 도박처럼 더 큰 금액으로 다음번 팬사인회를 응모했다. 처음에는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응모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응모를 위한 응모를 했다. 마치 판돈을 거는 것처럼 많은 돈을 지불하고 당첨 명단에 내 이름이 오르길 기다렸다.
한 번의 팬 사인회를 위해 지불하는 비용을 환산하면 초당 몇만 원의 돈을 쓰는 것과 다름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비싼 1초를 사며 생을 유지했다. 그런 나를 부채질하고 더 황홀하게 만드는 것은 최애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는데, 그건 바로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팬사인회에 당첨되는 사람은 영상통화는 평균 30명, 대면으로 만나는 사인회는 50명이다. 한국인만 뽑는 것이 아니라 중국, 일본, 남미, 유럽 등 등 타국적을 가진 외국인도 얼마든지 응모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전 세계 팬들끼리 순위 다툼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수많은 팬들 중 30등 안에 든 사람들이 녹화한 팬싸를 가지고 무엇을 하겠는가. 자신과 최애가 팬사인회 한 것을 전시한다.
SNS인 X에 몇 초로 편집된 영통팬싸 영상을 올리면 천 단위, 만 단위로 리포스트 되고 각국의 언어로 인용 메시지들이 달린다. 팬들은 내 후기를 좋아하고 부러워해준다. 이 팬은 매우 운이 좋나 봐, 이 팬과 대화하는 모습은 늘 편해 보여. 오 그녀는 행운아야.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관심에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내가 수많은 팬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최애가 기억해 주는 특별한 팬이 된 것을 모두가 인정해 주는 것 같았다. 그게 뭐라고.
당시의 나는 스스로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외부의 반응에서 자존감을 채우는 법 밖에 알지 못했다. 최애와의 관계를 많은 사람에게 자랑하고, SNS의 팔로워가 늘어날수록 무언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허접한 우월감으로 바닥난 자존감을 돈을 쓰며 채우려 애썼다. 명품을 사며 허영심으로 자신을 속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이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꽤나 비싼 수업료와 긴 시간을 써야 했다.
아이돌들은 한 활동에 적게는 네, 다섯 번부터 많게는 몇십 번까지 대면과 영통 팬싸를 한다. 아이돌 기획사와 음반사는 사전에 얼마간의 앨범을 팔기로 이야기 한다. 활동이 끝나도 계속되는 팬사인회는 약속된 물량을 털어내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인 것이다. 이제 웬만한 아이돌의 앨범 몇백만 장의 판매 기록은 우습다. 그 기록은 이런 식으로 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어딘가 고장 난 소수의 팬들의 잘못된 팬심과 돈을 착취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주객이 전도된 어긋난 마음은 애정이란 이름의 가면을 쓰고 조금씩 나를 좀 먹고 있었다. 그러나 이 달콤한 1분은 자제와 절제를 잃어버린 케이팝 생활의 서막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