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사랑하시죠?
오늘 (25년 8월 25일) 고양 체육관에서 아이돌들과 팬을 모아놓고 하루 종일 촬영하는 아이돌 스타 선수권 대회 (이하 아육대) 촬영이 진행되고 있다. 아육대는 MBC에서 주관하는 명절용 방송 프로그램이다. 2010년 추석에 파일럿으로 방영한 것이 반응이 좋아 설, 추석 명절 특별 고정 프로그램이 되었다. 내용은 아이돌들의 미니 운동회다. 대략 20여 팀이 참여해서 육상, 양궁, 리듬체조, 스포츠댄스, 씨름 등 다양한 종목을 겨룬다.
역사가 오래된 방송인만큼 아육대를 통해 아이돌들은 케이팝 팬들 사이에서 인지도를 높일 수도 있다. 잘생겼으나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한 아이돌의 경우 전광판에 비춰주는 모습이 잘생겨서’ 아육대 전광판 걔’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이외에도 양궁에서 화살로 카메라를 명중시킬 경우나 국가대표로 나가도 손색이 없을만한 실력을 자랑하면 유명세를 얻을 수 있다. 그 외에도 아이돌들 전원이 커다란 이름표를 달고 있기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에 좋은 기회이다.
다만 MBC에서 방영하는 음악방송 ‘쇼! 음악중심’의 제작진들이 만드는 프로그램인 탓에 아육대에 출연을 원하지 않는 경우에도 음악방송의 원활한 출연을 위해서라면 울며 겨자 먹기로 참석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프로그램에 무료 인력으로 동원되는 것이 바로 팬들이다.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이루어지는 아육대 촬영은 하루 종일 진행된다. 팬들의 인원 체크는 새벽 4-5시에 시작 돼 경기가 끝나면 밤 11시 정도쯤 집에 갈 수 있다. 그렇게 종일 붙잡혀 있으면 식사는 어떻게 하냐고? 각 아이돌들은 자신의 팬들을 위해 ‘역조공’을 준비한다. 이 ‘역조공’의 구성과 퀄리티에 따라 무명 아이돌이 인터넷에서 칭찬을 듣기도 하고, 돈 많이 버는 유명 아이돌이면서 팬들에게 돈을 쓰지 않는다며 욕을 먹기도 한다. 여러모로 쉽지 않은 프로그램이다.
아이돌들이야 방송국과 여러 이해관계가 있어 참여한다지만 팬들은 오직 자신이 응원하는 아이돌을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돈? 당연히 주지 않고 팬들 역시 받을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 팬들이 받아가는 것은 아이돌이 주는 아침, 점심, 저녁 식사 및 간식과 아이돌이 좌석가까이에 와서 행해주는 팬서비스가 전부이다. 아이돌의 방송촬영은 대부분 이렇게 팬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무료 인력 공급으로 진행된다.
팬들이 무료로 인력을 제공하는 것으로는 ‘사전녹화’가 있다. 아이돌들은 앨범을 발매하고 나면 다양한 음악방송에 출연한다. 짧으면 1주 길면 3주까지 음악방송에 출연하는데 매주 컴백하는 아이돌은 쏟아지고, 출연할 수 있는 팀의 숫자는 정해져 있다. 유명하지 않은 그룹의 경우 시간 관계상 생방송 무대에서 노래 전곡을 처음부터 끝까지도 채 보여주지 못하고 짧게 편집된 노래만을 보여주고 내려가기도 한다.
반면 인지도가 있는 그룹의 경우에는 특별히 ‘사전녹화(이하 사녹)’를 진행하며 퀄리티 있는 무대를 송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사녹은 음악방송의 전날 밤~당일 오전 사이에 촬영된다. 보통 3-4번 정도 무대를 촬영하고 그중 하나를 선택해 생방송 때 촬영한 영상을 송출하는 방식이다. 사녹 역시 정해진 시간 안에 몇 개의 팀만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기에 인지도가 낮은 아이돌들은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 사녹에서도 팬들은 공짜 인력을 헌납한다. 예를 들어 SBS에서 일요일에 방영하는 인기가요의 경우 보통 사녹은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새벽에 찍는다. 사녹이 새벽 2시에 시작된다면 팬들은 인원체크를 위해서 저녁 10시 정도부터 모인다. 방송국 건물 밖에서 아이돌 소속사의 직원들에게 신청자와 참석자의 인적사항이 맞는지 확인받고 줄을 서서 질서 정연하게 세트장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수고스러운 사녹의 경우에도 원한다고 아무나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은 팬클럽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100-300명 정도의 제한된 인원 안에 선착순으로 들어야 한다. 당일 신원확인 역시 꼼꼼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단순히 당첨 내역만을 가지고서는 참석이 어렵고 신청자와 참석한 사람이 동일하다는 것을 최종 기획사 담당자인 ‘팬 매니저’에게 확인받아야 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팬들은 방송국과 기획사가 요구하는 모든 것들을 군말 없이 따른다. 눈, 비가 내리는 바깥에 몇 시간이고 세워두고 사전에 안내한 시작 시간보다 딜레이 되어도 컴플레인을 걸거나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방송국에는 자신 때문에 아이돌이 불이익을 당할까 봐 아무 말을 할 수 없고, 기획사에는 팬인 자신이 불이익을 받게 될까 봐 그렇다. 요즘 케이팝 팬들의 주류는 20-30대 여성들로 사회생활을 하는 직장인들도 다수 포진해 있는데, 그들은 컴플레인을 거는 법을 몰라서 걸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이돌을 위한 마음으로 참고 넘기는 것이다.
이 모든 시간 낭비를 오직 ‘팬심’ 하나로 설명 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최저시급으로 환산해도 하루에 10만 원은 받을 수 있는 시간을 아이돌을 위해 기꺼이 낭비한다. 나 역시 아이돌을 보기 위해 연차를 사용하고, 밤을 새워서 음악방송 사전녹화에 참여했으며, 아육대 촬영에 참석해 하루 종일 체육관에서의 셀프감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가운데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오직 길고 지루한 기다림 끝에 내가 좋아하는 '최애'를 만날 수 있는 시간만을 기다렸을 뿐이다. 팬들의 애정은 이렇게 맹목적이다.
그렇기에 케이팝에서 팬들은 언제나 을 중의 을이다. 갑을병정 중에 당연히 ‘정’에 해당할 것이다. 팬들은 자신이 정이라는 것 알아도 상관하지 않는다. 기획사와 방송국은 그 마음을 이용해 팬들을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사용하지만 팬들은 기꺼이 사용당한다.
케이팝이 전 세계적으로 흥한 데에는 팬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한 기획사의 기획력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매력적인 무대를 위한 아이돌의 보이지 않는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는 것 역시 부인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현재 케이팝 산업이 돌아갈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아무 조건 없는 애정을 무한하게 제공하고 있는 팬들 덕분이라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들이 아무리 기획을 잘하고 멋진 무대를 보여주더라도 그것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그건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이 된다.
그러나 기획사는 물론이거니와 유명한 아이돌의 일부는 팬들이 있기에 자신들이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 것 같다. 그 사실을 기억한다면 자신을 보러 오기 위해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팬들을 그런 식으로 대우할 수는 없을 테다. 어르신 팬들이 많은 트로트가수 '임영웅'의 경우 콘서트에 입장하기 위해 대기하는 팬들을 위해 천막을 치고 난로를 여러 대 가져다 놓은 미니 쉼터를 공연장 밖에 만들고 전 좌석에 방석을 깔아 준 것이 '팬사랑'으로 한 때 이슈가 된 적이 있다. 보통 콘서트 티켓은 평균 20만 원 정도 한다. 그중에서 방석 구입비는 1-2천 원일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가 '팬사랑'을 보여줬다고 칭찬한다. 이것만 봐도 케이팝 산업에서 팬들이 받는 대우의 수준이 얼마인지 알만하다.
팬들은 아이돌을 위해 불편과 힘듦을 얼마든지 감수하며 충성고객으로 돈을 쓴다. 그러나 참 신기하게도 아이돌 산업은 이러한 '충성고객'들에 대한 대우가 좋지 않은 편에 속한다.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배우 변우석의 경우 역시 그렇다. 스탭이 공항 내의 항공사 라운지에서 변우석을 따라온 팬들을 거르겠다는 목적으로 탑승권 티켓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를 확인했던 것이 이슈 되었다. 변우석을 핸드폰으로 촬영하는 사람들이 그를 처음부터 따라온 극성팬이건, 아니면 우연히 여행을 가려다 변우석을 발견한 사람이건 간에 항공사 라운지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 사람 역시 정당하게 항공권을 구입하고 라운지를 이용할 자격을 갖춘 일반 승객이란 뜻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은 상관하지 않고 팬을 그저 성가신 존재로 여겼기에 공항 내에서 아무 권한 없는 일반인인 스탭이 그런 행동을 저질렀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이렇게 무게가 다른 애정은 종종 팬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일로까지 연결된다. 케이팝 산업에서는 참으로 흔하고 익숙한 일이다.
그 외에도 경호원의 과도한 아티스트 보호로 고소를 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공항에서 연예인을 보고 따라온 사람을 과하게 밀쳐서 상해를 입힌 경우다. 그 사람이 극성맞은 위험한 팬인지 그저 지나가던 일반인인지 상관하지 않고 그저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이러한 행태로 보았을 때 케이팝 종사자들은 팬들을 소중한 존재로 여기지 않음이 분명하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무한한 사랑이 보답이 아닌 오직 팬이란 이유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선을 견디는 것으로 돌아오는 것이.
그러나, 그럼에도, 팬들은 여전히 자신의 아이돌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