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번째 이야기- 족장 앞에서 그린 그림
아가씨 셋이 숲 안쪽 벤치에 앉아 재잘거리고 있었다. 아웃도어룩으로 한껏 멋을 부린 그녀들은 연신 까르륵댔다. 사람들은 그녀들의 명랑한 목소리를 귀거리처럼 귀에 걸고 산길을 걸었다. 친밀한 사람들과 신나게 떠들 수 있다는 건 하루의 선물로 아주 좋은 것이다.
소나무 가지를 뚫고 들어오는 햇빛이 설핏해지자 명랑한 목소리 또한 2옥타브 쯤 내려앉았다. 그녀들은 먼지가 올라앉은 바지 아랫단을 몇 번 털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솔길을 따라 나왔다. 그런데 벤치에서 일어나기 직전에 뭔가 진지한 얘기를 나눴는지 그녀들의 뺨은 상기되어 있었고 눈빛은 낮게 반짝였다.
연둣빛 떡갈나무가 늘씬하게 벋어 있는 길을 따라 내려간 그녀들은 배드민턴장을 지나 마을 뒷길로 접어들었다. 여전히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고개를 젓거나 마구 손을 흔드는 것으로 보아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석류나무집 건너 붉은 대문 집까지 걸어온 그녀들은 꺾어지는 길목에 서서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깡통집의 무연한 눈길과 다르게 그녀들은 진지했다. 언덕길은 가팔랐지만 숨이 턱에 찰 정도로 험하지는 않았다.
그녀들 중 가장 발랄한 표정으로 깡총거리던 숙녀가 깡통집의 출입 버튼을 피아노 건반처럼 밟았다. 오른쪽 다섯 번째, 그러니까 그녀가 밟게 시작해서 맨 끝 버튼에서 강화유리문이 지잉, 소리까지 내며 양쪽으로 열렸다. 그건 스터워즈 비행선이 새로운 행성에 착륙했다는 신호음 같았고, 그녀들은 그것이 다소 불안하여 끼득끼득 웃어 보였다.
“아무도 없네.”
발랄한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선뜻 발을 내밀었다.
“어쨌든 조심하자. 잘 살펴보고.”
키가 큰 그녀가 발랄한 그녀의 뒤에 붙으며 말했다.
“괜찮아. 문제가 있었다면 벌써 돌 맞고 사라졌을 거야.”
눈이 바다처럼 시원해 보이는 그녀가 말했다.
“오, 그거 괜찮은 말이군. 아직 멀쩡하니까.”
그녀들 사이로 부루가 끼어들자 깜짝 놀란 그녀들은 한데로 모여 방어태세부터 취했다.
“안 잡아먹는다니까~요. 난 식욕 제로라고요.”
부루가 익살을 떨었지만 그녀들의 출입구 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누구세요?”
키 큰 그녀의 공격적인 어투로 물었다.
“나라니까요.”
“나?”
발랄한 그녀는 눈을 깜박이더니, 친구들의 팔을 풀고 소리 나는 쪽으로 다가가 벽에 살그머니 손을 댔다. 벽이 말을 하는 건가? 울림이 살짝 전해졌다. 그녀는 손바닥을 펴 위 아래로 쓱쓱 쓸었다.
칵칵, 칵칵, 아이구, 간지러워~요. 숙녀의 터치를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벽이 물결지고 웃음소리가 팝콘처럼 터졌다. 희한한 광경을 놓칠세라 그녀들은 종종 걸음으로 다가와 일제히 벽에 손을 댔다. 벽이 바르르 물이랑지다 진저리를 쳤다.
어머? 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 이걸 어쩌면 좋아! 그녀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미안, 미안. 간지러워서 그랬어요. 예쁜 손님들이 한꺼번에 들어오자 정신이 아찔했거든요. 자, 자, 저기 소파에 앉으세요.”
아가씨들이 나가 버릴까봐 조바심이 나는지 부루는 호들갑스럽게 자리를 권했다. 오후의 햇살이 주홍빛 천처럼 늘어져 있는 왼쪽 벽에 침대로 사용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크고 넓은 소파가 있었고, 소파가 자리를 권하듯이 앞으로 밀려나왔다. 그녀들은 소파에 앉아 조금 전에 만져본 벽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모두 빤히 바라보지 말아요.”
맞은편 벽에 어리던 그림자가 붉어지더니 스르르 사라져버렸다.
어머머? 소리와 함께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어쩜 좋아, 되게 수줍음 타나봐.”
“그러게, 그러게, 그림자가 수줍음 타는 건 처음 본다.”
“귀엽지 않냐? 아우 귀여워!”
이렇게 한 마디씩 떠들어대고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기 딱 좋을 정도로.
“궁금한 게 있어서 왔어요. 연애상담씨.”
눈이 바다처럼 시원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무슨 씨?”
“아이, 다 듣고 왔다고요. 당신은 연애박사, 그러니까 그런 일에 대해서 빤하잖아요. 그래서 우리 궁금증 좀 풀려고요. 연애에도 여러 유형이 있잖아요. 소극적인 연애부터 적극성을 띤 연애까지, 각 사람마다 자기에게 맞는 형태대로 연애를 하는 건데…”
“아, 뭐야? 또 말을 늘어 빼고 있네. 있잖아요. 집씨, 진정한 사랑은 뭐죠?”
바다처럼 눈이 시원한 그녀의 말허리를 뚝 자르고 발랄한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집씨? 집시?”
부루는 크흠, 헛기침을 하고는 되물었다.
“집이 말을 하니까 집씨잖아요. 그러니까 진정한 사랑이 뭐냐고요?”
발랄한 그녀가 부루에게 새 이름을 지어주고는 다시 물었다. 그녀들은 모두 그 질문에 몰두해 있었던 것처럼 똑같이 물었다.
“진정한 사랑은 뭐예요?”
잠깐 침묵이 흐른 뒤 부루가 입을 열었다.
“‘진(眞)’이란 낱말은 몹시 어려운 거예요. 그건 잘 보이도록 탁자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로 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쁘게 포장해서 선물할 수도 없는 거예요.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모두 그걸 말하고 모든 일의 정점처럼 여기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정한 보석과도 같은데, 무엇보다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 간절하게 바라마지 않는 것이니까요. 즉 진(眞)은 사람의 본(本)과 같은 것이지요. 그렇지만 어떤 사이를 가리키며 여기에는 ‘진정한’이 들어가 있다. 라고 딱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어요. 진정(眞正)은 물리적 성질의 것이 아니며 수치 등으로 확인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오로지 스스로만이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내가 어떻게 진을 운운하고 진정한 사랑은 이런 것이다 라고 말 할 수 있겠어요.”
부루가 말을 마치자 모두 어이없는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다. 뭔가 정의를 내릴 것처럼 말을 이어가더니 결국 못한다고 꼬리를 빼고 있었다.
“거봐, 애초에 그런 말은 성립이 안 된다고 했잖아.”
발랄한 그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성립이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라니까. 무엇이다 라고 증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일 뿐이지. 그만큼 찾기 힘드니까”
키 큰 그녀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마치 '진정한'이란 단어가 훼손이라도 입을까봐 걱정된다는 말투였다.
“어쨌든, 진정한 사랑이니 뭐 그딴 말은 물고기 하품 하는 소리야.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것 자체가 진부하다고.”
“그래, 내가 그 말 꺼냈다. 그러니까 난 진부하고 쿨한 사랑만 떠들어 대는 넌 시크하다 이거야? 아이구, 그래, 시원……한 사랑만 하다 아예 얼어 죽어라.”
발랄한 그녀와 키 큰 그녀는 불꽃까지 튀기며 으르렁댔다.
“또 싸울래? 도대체가 너희들은 부딪쳤다하면 끝장을 보려고 작정을 하냐? 있잖아요, 집씨, 사실 우리 모두 사랑에 있어서 ‘진정한’ 이란 단어가 그 무엇보다 절실하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런데 어쩐지 그 단어가 구태의연하게 느껴졌고, 어떤 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말 할 수 없다는 의문이 제기 되었어요. 그건 문학에서나 쓰이는 어휘고, 현실성이 없다, 있다 라고 다투다 여기까지 온 거에요. 그러니 집씨께서 그게 무엇인지 한 마디만 해줘요. 너희들은 집씨께서 어떻게 말하든지 간에 더 이상 논쟁 하지 않아야 해. 약속이야. 이후에 또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이다로 다투면 그땐 절교야!”
눈이 바다처럼 시원한 그녀가 그녀들을 갈라놓으며 부루에게 또 한번 물었다.
“그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에요. 나도 해보지 않았거든요.”
“그렇죠? 누구도 제대로 말할 수 없는 것이죠? 그저 사랑할 땐 신나게 사랑하고, 헤어지게 되면 쿨하게 바이바이하고, 또 사랑을 하는 게 인생이라니까.”
“그건 연속적인 연애를 위한 변명일 뿐이야. 진정한 사랑만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발랄한 그녀의 말에 키 큰 그녀가 반박했고, 부루가 그녀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두 사람의 논쟁을 끝내기 위해서 내 의견이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뭐라고 말할 수 없어요. 난 그게 어떤 것인지 피부로 느껴보지 못했어요. 해보질 않아서 말이죠. 그렇지만 알 수 없는 어떤 곳에서는 ‘진정한’ 이란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모양인데 필요하다면 그 이야기라도……”
이렇게 해서 ‘족장 앞에서 그린 그림’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부루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녀들은 입을 다문 채 무채색의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은 소리가 나는 곳이기도 했고 스크린이기도 했다. 이야기의 서두를 따라 끝도 없이 넓은 평원이 그녀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우얌니 부족은 너른 평원에서 가축을 기르고 작물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대지와 대지의 소산에 감사를 드리며 하루를 열었다. 하루해를 보내고 땅거미가 슬금슬금 몰려오는 저녁이면 마을사람들은 각자의 식사를 챙겨들고 부족장의 뜰로 모였다. 모두 함께 즐겁게 떠들며 느리게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나면 누군가는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는 북을 치고, 누군가는 춤을 추었다. 그들에겐 가수가 따로 없었으며, 춤장이 또한 따로 지정하지 않았다. 모두가 가수였고 춤장이였으며, 언제라도 흥이 나면 노래를 부르고 북을 쳤다. 그러다 바람의 휘파람 소리가 거칠어지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하루를 내려놓는 것이었다.
그들은 열여덟부터 결혼할 때까지를 ‘늑대의 나이’ 라고 불렀다. 여자든 남자든 인생의 가장 팔팔한 시기는 늑대의 야성성과 닮았고, 거침없이 달리지만 제 자신을 책임지고 이웃을 살 필 줄 아는 때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나이가 되기 전에 곡식의 경작과 가축의 방목과 산에서 먹을 것을 채취하는 법과 강에서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 법, 그리고 너와 나 사이의 경계와 일치점은 무엇인지 등을 충분히 배우게 된다. 배워야 할 것을 배운 후엔 무조건 ‘늑대의 시기’를 맞아들였고 스스로 제 먹을 것을 해결했다.
만약 게으름을 피워 제 입을 충족시키지 못하거나, 다른 이들과 나눌 것이 전혀 없다면 그것은 가족 모두를 모욕하는 일이었다. 마을엔 어리고 늙고 병들고 어딘가가 부족하여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마을 사람 모두의 책임이었고 그것을 피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늑대의 나이’ 들은 자신의 일에 책임을 다하는 만큼 배려 받고 자유를 만끽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하면 결코 거절당하지 않았으며, 연거푸 실수를 하더라도 크게 따지지 않았다. 누군가를 향해 우렁차게 사랑을 고백해도 웃음거리가 되지 않았고, 나무 위에서 결혼식을 한다 해도 말리지 않았다. 모든 것을 스스로가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팔팔한 ‘늑대의 나이’들은 마음에 드는 이성을 향해 윙크를 날리거나, 고백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세상에 그보다 더 ‘늑대적’인 것은 없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청춘은 연애와 함께 뛰놀 때 더 푸르렀으며, 피가 용암처럼 들끓는 시기에 사랑은 더 뜨거운 법이었다. 초원의 밤이 깊도록 ‘늑대의 나이’들은 상대를 향해 휘파람을 불고 깔깔거렸다.
그리하여 서로의 사랑을 인정하고 다짐 할 때가 되면 둘이 함께 대족장을 찾아갔다. 그것은 부족의 오랜 전통으로 족장 앞에서 그림을 그린 후에야 사랑을 맹세할 수 있었다. 물론 그때까지 부모와 친구 등 모든 사람들은 ‘늑대 나이’들의 구애와 거절과 데이트를 전혀 모른 체 했다. 그들이 아무리 떠들고 알아 달라 해도 눈길도 주지 않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늑대 나이’들 중에 후놀이라는 건장한 청년과 얀니라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있었다. 후놀은 스무 네 살 청년으로 벌써 수 백 마리의 소와 양을 가진 부자였으며, 얀니는 스무 세살 아가씨로 매우 아름다웠다. 후놀은 일찍부터 얀니를 알고 있었다. 코밑이 짙어가는 ‘늑대 나이’들은 모두 얀니를 알았다. 얀니를 차지하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라는 암묵까지 생겼을 정도였다.
지난 가을 수확의 축제 때 후놀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얀니에게 줄 선물로 사파이어 목걸이를 준비했는데, 언제 그것을 그녀의 목에 걸어줘야 할 지 몰라 조바심을 쳤다. 그리고 얼마 후, 후놀은 여인들이 대지의 춤을 추기 위해 준비를 하는 뜰 뒤편으로 찾아갔다. 의상과 장식품을 매만지고 있는 얀니에게 다가간 후놀은 사파이어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여자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아름다운 청보랏빛은 처음 보았던 것이다. 깜짝 놀란 얀니의 눈에도 물안개가 어리듯이 감탄이 밀려들고 있었다.
축제가 끝나도록 후놀은 얀니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수줍게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것이 얀니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짜릿함을 안겨주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가운데 감정들은 기포를 뿜으며 올라와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채웠다.
그 후로 후놀과 얀니는 자주 마주쳤다. 일부러 후놀이 얀니의 집 앞으로 지나갔고, 얀니는 후놀이 지나가는 시간에 핑계를 대며 집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후놀은 싱긋 웃었고, 얀니도 살짝 웃으며 그에게 답을 했다. 어떤 때는 안녕, 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오늘의 날씨에 대해 몇 마디 나누기도 했다.
며칠 후에 후놀은 말린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있는 얀니 앞에 나타났다.
“안녕? 밀이 잘 말랐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얀니는 두 손에 밀을 가득 퍼서 바람이 부는 쪽으로 날렸다. 꺼럭들이 후놀 쪽으로 날아갔다. 후놀은 피하지 않고 꺼럭을 맞으며 작은 주머니를 꺼내 얀니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말 등에 훌쩍 올라타 손을 흔들더니 평원을 가로질러 달아나버렸다.
후놀이 준 주머니에는 금빛 링이 일곱 개 들어 있었다. 일곱은 정표의 숫자인데, 후놀은 얀니에게 정표를 준 것이었다. 그녀는 링을 한 개 한 개 손목에 끼우며 그의 마음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했다. 일곱 개의 링은 그녀의 가느다란 팔목에 꼭 맞았으며 매끈한 피부와 잘 어울렸다.
얀니는 일곱 개의 돌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그녀는 몇 번이나 ‘늑대의 나이’들과 사귀었고, 여러 번 상처를 받았다. 그들은 한 번도 얀니가 원하는 그런 사랑을 주지 않았다. 용감하면 거칠기 짝이 없고, 다정하긴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고, 변변치도 않은 선물에 온갖 생색만 내고……. 도무지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러나 후놀은 달랐다. 얀니를 보는 눈빛부터가 다른 늑대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는 부자지만 거들먹거리지 않았다. 과장되지 않게 친절했고 조급하게 굴지 않았으며 얀니에게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또한 선물을 고르는 안목도 탁월하여 한 번도 얀니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만족스럽지만 그래도……. 얀니는 후놀이 잘 볼 수 있도록 여섯 개의 돌을 쌓아 올린 후 한 개는 그 옆에 놔두었다.
다음 날 후놀은 얀니와 만났던 장소로 나갔다. 그가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돌은 여섯 개 밖에 올려져있지 않았다. 마지막 한 개는 무엇 때문에 남겨두었을까? 그에게 한 번 더 돌진하라는 의미였을까? 후놀은 기분이 나쁘지도 좋지도 않았다. 그녀에겐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후놀은 그녀를 위해 산 장식핀을 돌 틈 사이에 끼워놓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두 달을 기다린 후에 후놀과 얀니는 불꽃나무 숲에서 만났다. 짧은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후놀은 차가워진 얀니의 손을 잡아 그의 품속에 넣었다. 후놀이 얀니의 손을 문지르며 덥혀지도록 애를 쓰는 동안 얀니의 얼굴은 점점 빨개졌다. 후룰의 셔츠 안에 숨겨진 단단한 근육들이 손에 잡히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나무 사이를 걸으며 서로에게 대해 묻고 귀 기울여 들었다. 한 발 한 발 걸음을 뗄 때, 서로의 마음속으로도 걸어 들어갔다. 마치 처음 들어간 숲처럼 조심스러웠지만 숲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듯이 자연스러운 걸음이었다.
첫 데이트 이후 후놀은 거의 매일 얀니를 만나러 왔다. 날마다 양과 소를 돌보고 도시로 나가 적당한 가격에 팔고 필요한 일을 배우느라 바쁜데도 불구하고 데이트에 열성을 다했다. 그 모습에 얀니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한 번 집적대보는 여느 늑대들과는 다르게 후놀은 그녀를 깊이 사랑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랬다. 후놀은 얀니를 몹시 사랑했다. 그녀의 환한 얼굴을 보면 모든 걱정이 가시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힘이 났다. 그의 하루 일정에는 얀니를 만나는 일이 꼭 들어가 있었다. 대부분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이었는데, 그녀를 만나러 가려면 멀리 돌아서 가기 때문에 피곤이 가중되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를 보지 않으면 허전하여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얀니 또한 갈수록 후놀이 좋았다. 후놀처럼 한결같은 모습을 보인 남자는 만나기 어렵다는 것도 잘 알았다. 후놀이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것처럼 그녀도 그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재료부터 까다롭기 짝이 없고, 수없는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비로소 만들 수 있는, 그래서 그녀가 그토록 배우기 싫어했던 ‘까오까오’도 후놀을 위해 기꺼이 배웠다. 아름다운 얀니는 더욱 몸단장에 신경에 쓰고 모아놓은 돈을 다 들여 사향노루의 향을 사는 정성도 보였다.
두 사람은 한 쌍의 앵무새처럼 붙어 다녔다. 어느 날은 아침 일찍부터 만나 함께 떠오르는 해를 보았다. 붉고 찬란한 해가 지평선 위로 떠오르면 나무들은 두 팔을 펼쳐들고 하루를 맞이했다. 그 모습은 언제나 후놀의 가슴을 뛰게 했고, 후놀은 얀니의 귀에 이렇게 속삭였다.
“얀니, 해와 나무는 영원한 연인 같아. 매일 아침 둘이는 뜨겁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곤 해. 우리도 그럴 수 있지?”
“해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도 곧 나올 것을 믿으며 사랑을 맹세하지. 우리처럼.”
얀니는 빙긋 웃고는 상기된 후놀의 얼굴을 만지다 입을 맞추었다. 세상에 얀니의 입술보다 더 달콤하고 부드러운 건 없었다. 후놀은 발끝부터 사르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며 그녀에게로 무너지곤 했다.
때로는 다투고, 때로는 섭섭한 마음 그대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어느 한쪽이 사랑의 마음을 버리진 않았다. 때문에 다음 날, 혹은 며칠 후에 다시 만나고 이전보다 더욱 뜨겁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세상은 후놀과 얀니를 위해 형성된 것만 같았다. 넓은 들판도 들판 너머 숲도 숲 뒤의 황무지도 모두 후놀과 얀니를 위한 장소였다.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이 지나가면 길을 비켜줄 뿐 못 본 척 했다. 가족들은 두 사람을 자주 보면서도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과 가족들은 두 사람의 사랑을 ‘아직 여물지 않은 향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단단한 사랑을 보여주어야 했다. 지금이 바로 대족장에게 가 사랑을 확인해야 할 때였다. 얀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후놀, 대족장에게 언제 갈 거야?”
후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얀니의 얼굴에 손을 대고는 가만히 웃었다. 조금 더 기다려 보자는 듯이.
“내 친구 누란 알지? 지난주에 걔네 커플이 족장님께 다녀왔는데, 그렇게 힘든 건 아니라고 했어.”
“그래?”
“나도 자신 있어.”
얀니가 턱을 쳐들고 다짐하듯이 말했다. 후놀은 얀니의 눈빛에 당황했다. 그녀보다도 용기가 없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참을 수 없다는 건 사랑 아니면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데 왜 주저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나도 자신 있어. 다만 난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신중하고 신중하다 백발 할머니가 된 후에야 가겠다는 건 아니지?”
얀니의 말에 후놀은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히 아니었다. 사랑을 확인한 후에 모든 사람들 앞에서 사랑을 인정하고 축하를 받는 건 늑대들에게 있어 최고의 기쁨이란 건 후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종종 어긋나는 친구들을 보자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족장을 방문하기로 한 날, 아침부터 비가 오더니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오후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후룰은 양털 숄을 얀니의 어깨에 둘러준 후 함께 말에 올랐다. 대족장의 집은 평원 한가운데 있어 말을 타고 한참이나 가야 했다.
대족장은 반갑게 후룰과 얀니를 맞아주었다. 그의 주름진 얼굴과 새하얀 수염은 마치 초원에 엎드린 늙은 양 같았고, 그의 미소는 무척이나 온화해서 긴장마저 풀어지게 했다.
“얀니, 더 예뻐졌구나. 몇 해 전만 해도 꼬마 아가씨였는데 언제 이렇게 숙녀가 되었지?”
족장님의 칭찬에 얀니는 어쩔 줄 몰랐다. 대족장님의 칭찬은 부족 전체의 칭찬과 다름없으니 얼굴이 빨개질 만도 했다. 족장님은 후놀을 격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후놀, 올해도 네 가축들은 건강하게 새끼들을 낳았겠지? 네가 정성을 다해 돌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올해는 소를 더 늘일 계획입니다. 남쪽 초지에 새 풀이 돋아나고 있으니까요.”
“그렇지. 올 겨울은 더 짧을 것 같으니 그렇게 하는 게 좋지. 아무튼 넌 목축사업에 소질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라.”
그러는 중에 족장님은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하고 차를 내왔다. 족장님의 홀은 크지도 작지도 않았으며 화로에서는 숯과 함께 잘 마른 허브가 타고 있었다. 허브 냄새와 차 잎 냄새는 막연히 스멀거리던 불안을 어느 정도 가라앉혀주었다. 족장님은 후놀과 얀니가 그곳에 무엇을 하러 왔는지 잊은 것처럼 이것저것 물었다. 세 번이나 차를 우려 마신 후에야 족장님은 두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후놀, 얀니, 여기 있는 동안 마음이 변했다면 말해주렴. 아직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지금 방금 들었다고 해도 좋아. 오늘은 그만 돌아가고 다음에 해도 되니까.”
족장님의 말에 후놀과 얀니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가라앉았던 불안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얀니의 표정은 평화로웠다. 그러자 후놀은 더 불안했다. 선조들은 ‘진실은 때로 최악이다.’ 라고 표현했는데, 후놀은 자신의 진실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예전에도 여자 친구와 함께 족장님께 왔다가 돌아간 적이 있었다. 그보다 더한 사랑은 없다고 믿었는데, 막상 족장님 앞에 앉자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그렇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간 후에야 알았지만 그녀를 사랑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그녀와 떨어질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녀와 끝나자 어느 면에서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었다.
사실 건들거리며 족장님께 왔다가 내빼는 ‘늑대의 나이’들이 꽤 많았다. 확신이 바위처럼 단단해지기 전에는 섣불리 덤벼들지 마라는 족장님의 말에 정신이 확 들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큰 상처를 입을 수 있고, 사랑의 자연스런 과정을 혐오할 수도 있으니 진심으로 확신이 서지 않으면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 후놀은 다시 한번 자신에게 물었다.
얀니를 사랑하지?
당연하지.
진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
그걸 말이라고 해? 얀니보다 더 사랑한 여자는 없었잖아.
그런데 왜 망설이지?
진심이 두렵기 때문이야. 진심은 생각을 배반하기도 하니까.
생각이 진심을 꿰뚫어 보는 것이겠지. 그리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후놀은 다시 얀니를 바라보았다. 얀니는 가만히 후놀의 손을 잡았다. 후놀은 지나치게 신중한 것이 흠이었다. 처음 키스도 얀니가 먼저 했으며, 족장님께 빨리 오자며 날짜를 잡은 것도 그녀였다. 얀니는 자신이 있었다. 지금까지 후놀보다 더 사랑한 늑대들은 없었다. 오직 후놀 만이 그녀의 사랑이었다. 그리고 설령 가혹한 사실이 드러난다 할지라도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얀니는 족장님을 향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룰도 하는 수 없이 얀니를 따랐다.
족장님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종이와 붓과 물감을 꺼내왔다. 두 사람 앞으로 도구들을 밀어놓으며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설명해 주었다. 평원의 안개처럼 부연 빛깔을 띤 종이와 일곱 가지 물감은 오늘 후놀과 얀니를 진실의 세계로 데려다 줄 것이다.
후놀은 종이를 펴고 붓에 물감을 적셨다. 붓을 잡고 얀니의 작은 얼굴과 큰 눈과 붉은 입술을 정성껏 그렸다.
얀니는 후놀의 각이 진 얼굴과 짙은 눈썹과 다부진 어깨를 그렸다.
후놀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얀니를 그렸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선이 아름다워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얀니는 후룰의 크게 웃는 모습을 그렸다. 그의 눈은 거의 감겼으며 코는 넓게 벌어져 있고, 얼마나 크게 웃는지 목젖이 다 보였다.
멀리 떨어져 앉은 족장님은 아예 돌아앉아 밖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바람이 휘이잉 말 울음소리를 내며 어딘가로 달려갔다.
두 사람은 속도를 내 서로를 그렸다. 두 장, 세 장, 네 장을 넘어가자 그들의 모습은 아름다움을 잃어갔다. 후룰과 얀니의 표정이 몹시 진지해졌다.
이제 후놀의 손은 얀니를 몹시 사납게 그리고 있었다. 상냥함은 온데 간 데 없고 잔뜩 가시 돋친 눈과 비웃는 입매가 눈에 거슬렸다. 그러나 후놀은 아무렇지도 않게 새 종이를 가져오고 붓에 물감을 듬뿍 묻혔다. 후놀의 손에서 얀니는 점점 더럽고 교활해졌다. 잔소리를 쏟아내느라 입술은 바짝 말라붙고 양 볼은 심술자루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후놀은 또 그렸다. 얀니의 얼굴 뿐 아니라 온 몸에 종기가 나 차마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얀니 또한 후놀을 숨을 헐떡이는 뚱보로 그리고 있었다. 두터운 입술을 앞으로 쭉 빼물고 있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후놀은 갈수록 험악해졌다. 뚱뚱한 배는 터질 것 같았고 친절은 사라지고 험상궂은 눈으로 노려볼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그림에서 후놀은 모든 재산을 다 잃고 거지가 되어 있었는데 병까지 걸려 비틀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붓을 놓았다. 서늘한 바람이 물감에 젖은 종이를 쓸고 지나갔다. 두 사람 앞에 다가앉은 족장님은 주문을 외웠다. “카르햔 밀롤트루야…” “카르햔 밀롤트루야…” 물에 흠뻑 젖은 듯 무거운 주문이 네 번 반복 되는 순간, 그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림 속 코가 실룩이고 눈이 꿈벅이더니 그림이 종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족장님은 다시 주문을 외웠다. 두 사람은 족장님의 주문을 따라 각자의 그림과 함께 알 수 없는 세계에 갇혔다.
얀니의 아름다운 얼굴이 후놀을 마주보며 활짝 웃었다. 복숭아처럼 발그레한 그녀는 깨물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후놀이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뒷걸음질 치며 눈을 흘겼다.
“뭐가 못마땅한 거야. 우리 얀니.”
후놀이 큰 걸음으로 다가가 그녀의 볼을 두 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그냥. 그냥 장난치는 거야.”
얀니가 그에게 볼을 잡힌 채 종알거렸다. 작은 새처럼 귀엽고 예쁜 그녀를 후놀은 꼭 끌어안았다. 그녀가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와 이렇게 있는 것보다 더 행복한 때는 없었다. 얀니는 후놀의 귀에 숨을 불어넣으며 계속 종알거렸다. 긴장해 있던 관절과 근육이 풀리고 후놀은 구름 속을 떠다니는 기분에 휩싸였다. 얀니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기쁨을 선물할까. 후놀은 얀니를 품은 채 눈을 감았다. 세상이 푸딩처럼 부들부들해 보이고, 아무 걱정 없는 둥지 같았다.
얀니가 그린 후놀은 푸근한 눈빛으로 얀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해.”
얀니의 입에서 저절로 고백이 흘러나왔다. 얀니는 그가 이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기를 빌었다.
“사랑해 얀니, 걱정 하지 마. 시간이 흐르면 내 모습은 변하겠지만 너를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그대로야.”
후놀이 얀니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얀니는 후놀을 껴안으며 글썽이는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후놀은 어쩌면 이렇게 자상할까. 후놀은 얀니를 깊숙이 품었고, 둘이는 들판길을 걸었다.
후놀은 자신의 뒤로 다가와 셔츠 속으로 차가운 손을 집어넣고 까르륵 대는 얀니를 붙잡았다. 얀니가 돌아서며 그를 안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젖가슴이 후놀의 가슴에 닿아 눌렸다. 후놀의 숨이 가빠졌다. 얀니가 후놀의 귀에 속삭였다.
“나 예뻐?”
“당연하지. 당연하고말고.”
“얼마큼?”
“말 할 수 없을 마안크음, 흠.”
가쁜 숨이 혀를 눌러 후놀은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그녀처럼 사랑스런 존재가 있을까? 후놀이 입술을 내밀었을 때, 복숭아빛 볼을 가진 얀니는 사라졌다.
얀니는 그림 속에서 얼굴이 검게 그을린 후놀이 튀어나와 얀니의 팔짱을 꼈다.
“얼굴이 왜 그래?”
얀니가 물었다.
“목장에서부터 걸어왔어. 깜박 잊고 모자도 안 쓰고 말이야.”
“누구랑? 다른 여자랑?”
“무슨 말이야. 다른 여자라니. 난 얀니 너만 있으면 돼. 다른 사람은 내게 의미가 없어.”
후놀은 얀니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그의 눈빛은 힘이 없었다. 얀니는 그가 피곤해서 그렇다고 생각하고는 그의 얼굴을 쓸어주었다. 후놀의 피부는 예전과 다르게 말라비틀어진 나무껍질 같았다.
또 다른 얀니가 그림 속에서 튀어 나왔다. 그런데 얀니는 눈꼬리를 찢으며 후놀을 노려보았다. 그런 모습이 처음이어서 후놀은 당황했다. 얀니는 후놀의 팔을 꼬집으며 뭔가를 내놓으라고 다그쳤다.
“얀니, 천천히 말해봐.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천천히.”
“귓구멍이 막혔어? 왜 말을 못 알아들어! 이 멍충아!”
얀니의 새된 소리에 후놀은 놀라 입을 벌리고는 아무 말도 못했다. 어떻게 얀니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 후놀은 기가 막혀 뒷걸음질을 쳤다.
“어딜 도망가. 이 비겁한 놈아!”
그녀는 또 다시 욕을 퍼부으며 후놀의 팔을 잡아뜯었다. 차마 그녀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추하고 역겨웠다. 그 사실이 그를 몹시 아프게 했다. 후룰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
“얀니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괴로운 거야.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어서 그런 거지? 그렇다면 말을 해봐. 내가 몰라서 그럴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얀니는 이빨을 빠드득 빠드득 갈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런 얀니의 모습에 후놀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얀니, 내가 뭘 그렇게 섭섭하게 한 거야? 말해줘. 잘못한 건 바로 잡을 테니, 제발 말해줘.”
후룰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괴성을 지르며 그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피부가 찢겨지고 피가 배어나왔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후놀이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이 배신자야!”
“뭐?”
후놀은 더 말 할 수도 없었다. 얀니가 달려들어 또 그의 팔을 물어뜯었기 때문이었다. 화가 불같이 치민 후룰은 그녀를 팔을 잡아 꺾어 팽개쳤다. 구석으로 동댕이쳐진 얀니는 죽지가 찢긴 새처럼 떨며 캑캑거렸다. 후룰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후룰은 달려가 얀니를 끌어안았다.
“얀니, 얀니, 미안해. 너를 싫어해서 그런 것은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넌 어제도 젊은 여자를 보며 히히덕댔어. 모든 여자만 봐도 침이 질질 나오지?”
“얀니, 또 왜 그러는 거야. 다른 여자들도 우리의 이웃이잖아. 친절하게 인사는 할 수 있는 거잖아. 그렇지?”
“싫어! 싫다고! 넌 아무도 바라봐선 안 돼! 난 이제 예쁘지 않단 말이야!”
얀니가 부르짖었다.
“얀니, 넌 내 눈에만 예쁘면 돼. 난 언제나 네가 예뻐. 너를 결코 버리지 않을 거야. 절대로 말이야. 그러니까 나를 믿고 마음을 누그려 뜨려봐.”
그녀가 독사처럼 노려보았지만, 후룰은 그런 그녀가 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녀의 마음 어딘가가 무너져버렸고, 그 두려움을 견디지 못해 몸부림을 치는 것이란 생각에 후놀 또한 똑같은 고통을 느꼈다. 사랑은 너와 나를 엮어 한 몸을 이루게 한 것이다. 얀니의 모습은 결국 후놀이었다. 얀니가 어떤 모습을 보여도 그녀는 후놀의 사랑이었고, 그녀가 없다면 후룰 또한 아무 의미가 없었다. 오, 얀니, 얀니, 후놀은 가랑잎처럼 말라 비틀어진 얀니를 안고 소리 내어 울었다.
얀니의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후룰은 몹시 뚱뚱했다. 얼마나 먹고 마시고 놀았는지 뒤뚱뒤뚱거리는 것이었다. 얀니의 눈이 저절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얀니는 상냥함을 잃지 않고 후놀의 배를 안으며 속삭였다.
“나의 후놀, 네가 너무 무거워지면 난 납작이가 되고 말거야. 그래도 좋아?”
얀니의 농담에 후놀은 크게 웃으며 얀니를 끌어안고 아무데나 침을 묻히고 아무데나 키스했다. 게다가 입 냄새는 어찌나 지독한지 옆에 붙어있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봐줄 수 없을 만큼 후놀은 지저분해졌다. 얀니는 어쩔 줄을 모르며 후놀에게 운동을 해야 한다고, 제발 예전의 후놀로 돌아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후놀은 눈을 찡긋하더니 사라져버렸다.
얀니가 한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거지 후룰이 다시 나타났다. 얀니는 깜짝 놀랐다. 후놀이 이런 모습을 할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후놀은 장작개비처럼 마른데다 심한 병에 걸렸는지 기침을 할 때마다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주춤 주춤 다가온 후룰이 비굴한 웃음을 띠더니 얀니를 끌어안으려고 했다. 때가 새카맣게 묻은 그의
손이 그녀의 옷에 닿자 금방 더러워졌다. 얀니가 소리쳤다.
“넌 진짜 후놀이 아니야. 그렇지?”
“난, 우얌니족의 후놀 비히이티야. 거짓과 질병이 나를 파멸로 이끌고 말았어. 얀니, 난 곧 죽을 거야. 죽기 전에 나를 한번만 안아줘. 제발 예전처럼 단 한번만 안아줘.”
후놀이 고통스럽게 애원했다. 얀니는 믿어지지 않았다. 누가 후놀에게 이런 벌을 내렸단 말인가? 세상에, 누구도 그럴 수는 없었다.
“악마가 후놀로 변해 나를 농락하는 거 다 알고 있어. 빨리 사라져! 그리고 진짜 후놀을 데려다 줘! 오오, 제발 부탁이야!”
얀니가 뒷걸음질을 치며 흐느꼈다. 그녀가 사랑하던 후놀은 사라져버렸다. 다시는 후놀을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녀는 두려워 소리쳤다.
“부탁이야, 후놀을 데려다 줘! 진짜 후놀을 데려다 주란 말이야.”
얀니가 애원해 마지 않을 때, 거지 후놀이 엉금엉금 기어와 그녀의 옷자락을 잡았다.
“얀니, 나야. 나 후놀이야. 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거야. 금빛 옷자락을 휘날리던 후놀이 악마의 꾀임에 빠져 홀랑 발가벗겨졌다고 해서 후놀이 아닌 건 아니잖아. 매끈하던 얼굴은 흉측하게 변하고 말았지만 마음은 그대로야. 아직도 널 사랑하고 있어. 얀니, 날 한번만 안아줘. 네 품에서 죽게 해줘. 그것이 나의 마지막 소원이야.”
후놀은 모든 힘을 다해 그녀의 품으로 기어들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그녀의 품에 울컥 피를 토했다.
“으으, 더러워! 저리 가지 못해!”
기겁을 한 얀니가 소리쳤다. 얀니의 앞자락은 피범벅이 되었고, 후놀의 병에 전염되었을지 모르며, 후놀처럼 쓰러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그녀를 덮쳤다. 얀니는 울부짖었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아무도 없어요! 제발 이 거지 좀 데려가 주세요!”
울림도 없는 목소리가 되돌아와 얀니의 심장을 찔렀다. 후놀은 마지막 신음을 쏟으며 얀니의 발을 붙잡았다. 얀니는 후놀의 손을 매섭게 차냈다. 그 순간 주술이 깨졌다.
돌아서던 얀니는 ‘사랑은 거짓의 옷을 입기도 하며 진실은 마음속에 있다.’ 라는 말을 떠올렸다. 얀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후놀이 얀니를 안았지만 얀니는 후놀의 손을 뿌리쳤다. 흐느끼며 주저앉는 얀니를 족장님이 붙잡았다.
“얀니, 괜찮아. 괜찮아. 누구나 그럴 수 있단다. 진실은 몹시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우린 간혹 외면하고 혼동한단다. 그 때문에 우리의 선조들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찾았으며 때로는 시간이 가르쳐줄 때까지 기다렸단다. 얀니, 머지않아 시간이 네게 친절하게 가르쳐줄 테니 그때까지 섣부른 생각은 하지 않기로 하자. 넌 이제 겨우 어린티를 벗었을 뿐이잖니. 결코 네 잘못이 아니란다.”
족장님은 얀니를 안고 다독여주었다. 얀니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누구나 자신의 생각과 진심의 범위를 가늠할 수 없는 것이라고, 혼란을 겪고 수 없이 헤아리는 중에 심지가 단단해지는 것이라고 족장님은 위로해주었지만 얀니의 괴로움을 온전히 싸매주지는 못했다.
후놀 또한 충격을 받았다. 얀니와의 사랑은 믿었는데, 그 기대가 깨지는가 싶어 마음이 찢어졌다. 아니, 얀니의 지금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다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외짝 사랑의 고통이 떠올랐고, 곧 다시 얀니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것은 얀니의 잘못이기보다는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라고 자신을 달래도 마음이 찢어져 너덜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우얌니족은 ‘진정한 사랑은 그와 그녀의 모든 것’이라고 믿었다. 사랑은 그와 그녀의 기쁨을 함께 하는 것이며, 다가오는 괴로움도 부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와 그녀의 모든 것은 다 사랑의 모습이었다. 사랑은 서로가 서로에게 깃들어 네 개의 팔을 노처럼 내저으며 시간의 변덕을 견디는 일이었다. 평원처럼 펼쳐진 세상은 그러나 평원처럼 일률적이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절벽이 곳곳에 숨어 있는 수수께끼의 섬이었다. 그렇지만 그에게 그녀가 있어서, 그녀에게 그가 있어서 절벽은 구릉이 되고 삶의 모호한 의문들은 기쁨의 기호로 변하는 것이었다.
도시의 문명이 평원까지 흘러들어와 여러 가지 전통을 해치기도 했지만 우얌니족은 사랑의 믿음만은 버리지 않았다. 그것이 부족을 보호하고 부족민 개개인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각각 지독히 앓을 것이다. 그 기간이 짧을지, 아니면 아주 오랜 시간이 될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얀니와 후놀이 다시 사랑을 회복 할 수 있을지, 서로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날지 그것도 모른다. 다만 고통을 견디며 침잠하는 중에 사랑은 새로운 움을 틔우고 잎을 피워 올리고 줄기를 벋으며 마가목처럼 끈기 있게 자랄 것이다.
부루가 이야기를 마치자 깡통집에도 저녁 어스름이 내려왔다. 스크린이 꺼지자 부드러운 조명등이 네 귀퉁이를 따라 한 점 한 점씩 켜졌다.
“잔인한 부족이야. 사랑을 시험대에 올려놓다니!”
발랄한 그녀가 몸을 비틀자 그 모습을 힐긋 일별한 키가 큰 그녀가 입술을 비죽였다.
“사랑이란 말이 흔하니까 쉬운 일 같지만, 그게 어디 그렇게 만만한 일이냐? 공동체 생활을 하는 저들에게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삶의 요소라고.”
그녀들의 눈빛이 잠깐 부딪쳤다가 바다처럼 시원한 그녀의 눈과 마주치자 제자리로 돌아갔다. 부루의 이야기는 ‘진정한 사랑’의 답은 아니었다. 알지 못하는 먼 부족의 원시적인 주술이 감내할 수 없는 사랑을 강요하고 있었지만 깊은 곳까지 도달하려는 사랑의 의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정적이 바닥에서부터 차올라 그녀들의 무릎 위로 기어오르는 게 보일 정도였다. 그녀들은 다리에 손을 얹은 채 각자의 생각에 잠겨들었다. 부루 또한 쉬는 중인지 부시럭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눈이 바다처럼 시원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 잘 들었어요. 저흰 이만 가볼게요. 야, 빨리 일어나. 캄캄해지고 있잖아.”
눈이 바다처럼 시원한 숙녀가 두 숙녀의 팔을 잡아당기며 재촉했다. 그녀들은 목소리가 흘러나오던 쪽을 보며 어색하게 웃고 손을 흔들고 깡통집을 나왔다. 짙어진 땅거미가 언덕 아래로 구부러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