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번째 이야기- 쪼개진 심장
내팽개쳐 버리고 싶어 열 번도 더 패대기를 쳤는데, 죽어도 버려지지 않고 끝끝내 살아남는 것, 그래서 때론 밥처럼 절실했다. 때로는 친구처럼 편안했다. 그리고 도박처럼 공허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첩보원 같아 의문도 많이 품었다. 혀를 대는 순간 미치게 달콤해서 그냥 녹아들었는데 눈을 뜨니 카악 뱉어내고 싶도록 쓰디썼다. 보듬었다가 욕하고, 차버렸다가 다시 끌어안고 사는 것, 괴로운 소용돌이, 바로 사랑이다. 나도 모르게 사로잡혀 어쩌지 못하는 이것을 연애라고 부른다. 많고 많은 단어 중에서 ‘사랑’처럼 솔깃한 건 없다. 하도 닳고 닳아 식상할 대로 식상한데도 함부로 던지지 못하고, 꼴도 보기 싫은데 돌아서면 가슴 한 켠이 싸해져서 그냥 또 받아들이는 사랑이라는 이 감정을 어쩌랴.
그래서일까. 사랑 때문에 괴로워 할 만큼 괴로워 한 사람은 사랑을 믿는다. 인생의 가장 난점인 사랑을 모르면 삶도 모르는 거라면서.
그래, 그렇다니까. 부루는 혼잣말로 내내 중얼거렸다. 두 시간 전부터 깡통집 앞에 앉아 저 멀리로 무연한 눈길만 보내고 있던 청년의 뒤통수에 대고. 헝클어진 머리에 빈티지 워싱 셔츠를 걸친 청년의 완강한 등허리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루는 청년의 팔이라도 확 잡아끌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고정되어 있었고 건장한 청년을 끌어당기기엔 자력이 너무 약했다. 이미 해는 산 너머로 달아나버렸고 저녁이 오고 있었다. 깡통집 이마의 할로겐 등이 켜졌다. 빛의 샤워가 부담스러운지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 말 많은 입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그가 힐긋 뒤돌아보았다. 깡통집 안으로 들어가 시시콜콜 묻고 싶은 것은 많았으나 그것이 질문이 되는지 조차 의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그는 다가가고 싶은 사랑의 감정을 부정했고, 다가오는 사랑의 모습도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것을 잡아들이려 채집망을 휘둘러대고, 급기야는 사랑을 얻었다며 환호성을 지르지만, 그가 보기엔 모두 안개만 건져 올렸을 뿐이었다. 감정은 사기였다. 따라서 사랑이란 언어도 위선이었다. 배경과 빛의 굴절을 이용해 그럴듯하게 찍어놓은 사진처럼. 보자마자 탄성을 지르겠지만 뒤집어 보는 순간, 탄식을 토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부루의 마음이 급해졌다. 청년이 걸음을 떼자 우르르르 굉음이 울려 퍼졌다. 다시 그의 눈길이 깡통집을 향했을 때, 청흑빛 밤하늘에는 초저녁별이 뜨고 검은 창문은 스크린이 되어 있었다. 야외극장이라는 말이 어울리도록 부루는 석양의 장대한 영상을 띄웠고 돌비 서라운드 음향으로 그를 그 자리에 눌러 앉혔다. 나레이션 대신 검붉은 하늘가에 나눔 고딕체가 떠올랐다.
서쪽 바위 골짜기에 독수리들이 무리지어 살고 있었다. 많은 독수리들 중에서 유독 어깨 깃이 우뚝한 독수리의 이름은 고였고, 그의 여자 친구는 부리가 날카로운 유였다. 고는 단도직입적이었으며 망설임 없는 행동으로 유명했다. 그의 결단력은 때때로 무리를 위험으로부터 구해주었으며, 때때로는 무리를 고립시켰다. 나이 많은 독수리들은 그를 염려했고, 젊은 독수리들은 그를 추앙했다. 유의 눈에도 그는 뿌리칠 수 없도록 매력적이었으며 그로부터 받는 모든 상처를 가리고도 남을 만큼 대단했다.
봄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던 어느 날, 고와 유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비행하기에 알맞게 바람은 불었고 머리 위의 햇살은 다정하게 날개깃을 쓰다듬어주었다. 유는 고의 옆으로 다가가 그의 날개에 그녀의 날개를 살짝 포갰다. 그러나 고는 그녀의 애교일랑 아랑곳하지 않고 쏜살같이 땅으로 내려갔다. 유는 아쉬운 한숨을 내쉬고 고의 하강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그의 예상치 않은 행동에 대해 불만을 터트리면 그는 차갑게 내뱉었다.
“뭐가 불만이야! 그렇게 못마땅하면 헤어져!”
그의 한 마디에 그녀의 고개는 아래로 떨어졌다. 거칠 것 없는 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떠나고 말테니까. 헤어질 수 없으면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것을 굳이 순정이라고 이름 붙이며 그에게 복종했다.
그녀는 고의 파르르한 꽁지깃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고.”
“빨리 내려와. 내가 다 먹어 치우기 전에.”
고의 목소리가 땅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의 하강 지점에 누가 한 마리가 죽어있었는데, 이미 갈빗대와 몸통은 깨끗하게 발라 먹힌 뒤였다. 그래도 아직 먹을 것은 남아있어서 고는 넓은 날개를 접으며 갈빗대 위로 내려섰다.
“벌써 이틀이나 지났군. 날씨가 더워지기 전이라 다행이야.”
고는 누의 목덜미 안쪽으로 부리를 들이밀었다. 탄력을 잃은 살은 그다지 맛있지 않았지만 주린 배는 채울 만 했다. 고가 누의 목뼈 사이를 헤집으며 살을 발라 먹고 있을 때, 유가 내려앉았다.
“맛있어?”
“먹을 만 해. 너도 먹어.”
고는 고개도 들지 않고 선심 쓰듯 말했다. 유는 펄쩍 뛰어 누의 허벅지로 가 그 아래 말라붙은 살을 잡아 뜯었다. 사실 그녀의 부리는 아주 날카로워 목뼈에 끼인 살을 누구보다 잘 발라 먹을 수 있었지만 고는 결코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누의 남아 있는 살 중에서 가장 맛있는 것인데 고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유는 질긴 살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고의 완강한 어깨를 바라보았다. 작게 날개 짓을 하며 점점 더 머리를 들이미는 것으로 보아 누의 고기 맛에 취한 것 같았다. 유는 질긴 것이나마 많이 먹어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실컷 먹고 난 후 고는 유를 취하러 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흥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유는 살짝 꽁지를 떨며 누의 다리를 파고들었다.
“다 먹었어? 적당히 먹어. 살찌잖아.”
어느 사이 다가온 고가 유의 꼬리를 건드리며 말했다. 그의 장난만으로도 전율이 일었다. 그러나 유는 먹는 것을 그만둘 수 없었다. 있을 때 충분히 먹어두지 않으면 언제 또 먹이를 만날지 모르니까. 고는 계속 치근덕거리며 부리로 유의 꼬리를 치켜올렸다. 유는 더 빨리 살점을 잡아 뜯었다. 고가 하겠다고 하면 해야 하고 마치겠다고 하면 마치는 것이 둘 사이의 규약이었다. 유는 누의 무릎 아래에 있던 살점을 끌어내 힘줄까지 꿀떡 삼켰다. 그리고는 땅으로 내려와 가만히 어깨를 기울였다. 발톱으로 타타닥 바닥을 치고 있던 고가 훌쩍 뛰어 올라탔다.
고는 사랑을 나눌 땐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험한 산지를 떠돌던 자가 비로소 안착을 한 것처럼 긴 숨을 내쉬고 천천히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어쩌면 고는 사랑을 나누는 동안 가장 포근한 기억을 떠올리는지도 모른다. 그 기억을 따라가며 사랑의 날개를 퍼덕이는 것이겠지. 그는 부드럽게 움직이고 달콤한 신음소리를 내며 유를 파고들었다. 그의 숨겨진 감정이 펌프질을 할 때마다 유는 그를 처음 만나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고와 유가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였다. 돌 구르는 소리가 나는 듯 싶더니 시커먼 물체가 쓱 나타났다. 모자를 쓰고 공기총을 든 사냥꾼이었다. 그가 총구를 겨누었다. 고는 번개처럼 날아올랐다. 유도 따라서 재빨리 날아올랐다. 총구가 불을 뿜었다. 고는 속력을 내 창공 위로 치솟았다. 유도 고를 따라 솟아올랐으나 총알이 발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두려움과 함께 통증이 몰려오고 유는 중심을 잃었다.
“고!”
유의 외침에 고는 쏜살같이 내려와 그녀의 날개를 물어 위로 끌어올렸다. 그 사이 몇 사람이 더 나타났고, 그들은 다짜고짜 공중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독수리들의 넓고 완강한 날개가 공기를 치며 높이 날아올랐다.
사냥꾼의 사정거리를 벗어난 고는 유의 날개를 놓더니 혼자서 날아가 버렸다. 그녀는 또 그가 일러준 수칙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사냥꾼이 공격해오면 양쪽으로 달아나 헷갈리게 해야 한다는 수칙 말이다. 그렇지 않았다간 함께 몰살당할 수도 있다고 했지만 두려움이 닥치자 그 모든 것을 잊고 유는 그를 따라 갔던 것이다.
무리 사이로 돌아온 고는 사냥꾼이 나타난 사실을 알렸다. 이미 총소리를 들은 독수리들은 그렇잖아도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냥꾼들이 독수리를 겨냥하고 들어온 것 같다는 말에 모두 두려움에 싸였다. 사방이 온통 돌 뿐이라서 사냥꾼도 들어오지 못하는 철옹성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한참 후에 나타난 유는 다리를 절룩이며 둥지로 들어갔다. 사냥꾼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놀라 아무도 유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유는 다친 다리 보다, 독수리들의 무관심보다, 고의 싸늘한 눈길에 더 마음이 아렸다.
새로운 사냥철이 닥친 것이다. 어쩌면 오늘 내일 사이에 사냥꾼들이 들이칠지도 모른다. 무리 중에는 어린 독수리도 많았다. 아직 날 때가 되지 않아 보호해주어야 하는데, 누가 어떻게 그들을 보호해야 할 지 모두 걱정이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독수리는 즉시 어린 새들과 함께 터전을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젊은 독수리들은 어린 새들을 높은 둥지 위로 올려놓고 침입자들과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속 쫒겨 다니며 살 수 없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갈수록 먹을 것은 줄어들고 무리지어 살만한 터전도 찾기 힘들었다. 때문에 끝도 없이 달아나기 보다는 맞서 싸워야 할 때가 되었다는 주장은 젊은 독수리들의 의기에 불을 질렀다.
그렇지만 정말 그럴까? 늙은 여자 독수리는 유를 데리고 왔다. 그녀의 뼈가 드러난 상처를 들추며 살짝 스친 정도가 어떤지 여실히 보라고 했다. 고는 힐끔 유를 보고는 차갑게 내뱉었다.
“그녀는 사정거리 안에 있었어요. 그만한 상처가 다행일 정도지요. 우린 그들을 교란시킨 후 그들이 무기를 쓰기 전에 혼을 빼놓을 겁니다.”
고의 말이 총알처럼 유의 마음을 뚫고 지나갔다. 그는 그녀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 했던 것이다.
고는 늙거나 어린 독수리들은 높은 둥지로 피하라고 한 후, 날갯짓이 힘찬 독수리들은 싸울 준비를 하라고 외쳤다. 유는 고에게 다가갔다.
“넌 내가 죽어도 좋다는 듯이 말했어.”
“죽어도 좋을 짓을 했지만 내가 살려주었다는 사실을 잊었군. 총알을 정면으로 받고 싶지 않다면 빨리 피해!”
고가 소리쳤지만 유는 꼼작도 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우린 도대체 뭐야! 너와 난 뭐냐고!”
“지금 그런 소리를 할 때야!”
고가 눈을 부릅뜨고 유를 노려보았다.
“총알보다 네가 더 무서워!”
유가 외치자 고의 노란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당연하지. 난 총알보다 백배는 더 강해!”
차갑게 뱉은 고는 휙 돌아서서 젊은 무리에게로 가버렸다.
무거운 바람이 바위골짜기를 휩쓸고 지나갔다. 높은 둥지 속에서 눈만 내놓은 한 어린 독수리가 작게 외쳤다.
“누가 와요!”
모두 골짜기 입구를 향해 목을 곤두세웠을 때, 달각, 달각, 달각…… 돌멩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고, 사냥꾼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전한 공기총을 어깨에 맨 사냥꾼들이 눈을 굴리며 골짜기 안으로 들어왔다. 골짜기에는 독수리 깃털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으며 골짜기 위 키 큰 나무 끝에 둥지들이 보였다. 높은 나뭇가지 위에 앉은 독수리들이 사냥꾼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타앙, 사냥꾼들이 총을 쏘았다.
대기를 찢는 소리가 무시무시한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어린 독수리들이 모가지를 빼든 채 꺼억꺼억 거렸다. 또 다시 타앙, 총소리가 울렸다. 정신이 빠져나가버린 독수리들이 둥지에서 홰를 치며 퍼덕거렸다.
“모가지 떨어지지 않으려면 정신 차리란 말이야!”
창공에서 고가 외쳤다. 젊은 독수리들이 일제히 목청을 찢으며 고의 말을 반복했다. 그러나 얼이 빠진 어린 독수리들은 목을 쳐들고 울부짖었다. 아무도 이 두려운 상황을 설명하지 않았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불안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냥꾼들은 연속으로 총을 쏘았다. 독수리들의 울음소리와 엉켰고, 삽시간에 바위 골짜기는 공포의 심연으로 변했다.
꾸악, 꾸아악! 고가 힘껏 목청을 찢었다. 그리곤 번개처럼 날아 내려와 억센 발로 한 사냥꾼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사냥꾼이 비명을 지르며 휘청거렸다. 다른 사냥꾼이 재빨리 고를 향해 조준을 했지만 고는 쏜살같이 공기를 치고 날아올라 사정거리를 벗어났다.
고의 거침없는 행동은 젊은 독수리들의 용기를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젊은 독수리들이 창공으로 치솟아 오르며 결의를 다짐했다. 고가 꾸욱, 꾸- 꾸아악! 소리 높여 울며 경고했다.
“전면전은 안 돼! 오직 교란이 있을 뿐이야.!”
고의 울음소리를 따라 모든 독수리들이 울음을 토해냈다. 골짜기를 울리는 울음소리에 사냥꾼들은 갈팡질팡거렸다. 아무데나 대고 함부로 총을 쏘고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고가 번개처럼 날아와 긴 날개로 한 사냥꾼을 후려쳤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젊은 독수리들은 높이 솟아올랐다 쏜살같이 내려와 사냥꾼들을 공격했다. 고가 외쳤다.
“안 돼! 자리를 지켜!”
그러나 이미 늦었다. 사냥꾼들은 미친듯이 방아쇠를 당기고 총알을 쏘았다. 총알이 돌팔매처럼 날아다녔고, 독수리들을 스치고 관통하고 찢었다. 독수리들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내렸고, 그 모습에 모든 독수리들의 눈에 불이 일었다. 미친듯이 공중을 빙빙 돌며 울음을 토해냈다. 총소리가 골짜기를 완전히 뒤집었다.
이러다가는 완전히 멸족하고 만다는 위기감에 몰린 고는 날개를 휘두르며 독수리들을 막아섰다. 총알은 계속 콩을 뿌리듯이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기다려! 곧 총알이 떨어질 거야. 가까이 다가가지 마! 안전거리를 지켜!”
고는 공중을 선회하며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그러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점점 공기총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갔으며, 사냥꾼의 총구도 고를 따라 방향을 틀었다. 사냥꾼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걸 본 유가 외쳤다.
“고, 달아나!”
고가 소리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방아쇠는 당겨졌다. 유는 번개처럼 날아갔다. 총알이 공기를 가르며 고의 목줄기를 향해 쏜살같이 날았다. 유는 번개보다 더 빨리 날아 고를 덮쳤다. 유는 모든 힘을 다해 고를 밀었고, 둘은 삼나무 뒤로 떨어져 내렸다.
“유!”
고는 쓰러져 헐떡거리는 유를 끌어안았다. 총알은 유의 몸통을 가로질러 어깨 죽지를 찢었다. 피가 콸콸 흘러나와 고를 적셨다.
“너 무슨 짓을 한 지 알아!”
“당연한 짓이지.”
“왜 이렇게 무모해!”
“무모하지 않았다면 내 사랑이 사라질 테니까.”
유의 말이 고의 돌과 같은 마음을 찔러 뒤집어 버렸다.
“이 바보야! 고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이 바보야, 나 같은 거 한테 왜 이랬어?”
유를 품에 안은 고가 몸부림을 쳤다.
“네가 곧 나, 니, 까.”
유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난 나일뿐이었어!”
“아 니 야. 너는 나이고, 나는 너야.”
“오오오, 아니야. 나는 나쁜 놈이야. 내가 널 이렇게 만들었어. 내가 이렇게 했다고!”
“아 니야. 네가 나- 나-쁘면 나도 나쁘고, 네가 좋으면 나도 좋은 거야. 사랑은 너와 나를 나눌 수 없는 거야.”
“말도 안 돼. 난 나만 생각했단 말이야.”
“그렇 지 아 않 아. 넌 가 장 멋진 독 수 리였어. 네 눈- 눈물이 너무 뜨거워. 아주 뜨 거 워. 나 를 덮 고 있 어. 따뜻해. 따뜻……”
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고, 고의 심장이 딱, 소리를 내더니 둘로 쪼개져버렸다.
“유!
유!
유!”
고의 울부짖음이 바위 숲을 뒤흔들고 골짜기를 찢고 나무를 관통하여 모든 것을 찔러 무너뜨렸다. 사랑이 이렇게 무모하고 어리석고 한량없는 것이었단 말인가! 사랑의 방식이 이렇게 다른데, 왜 나는 몰랐냐고!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사랑이라고 말해서 미안해. 나 같은 건 사랑하지 말았어야 해. 왜 사랑했어? 바보같이, 왜! 왜 그랬냔 말이야! 고는 외쳤지만 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상처 입은 발을 꼿꼿이 벋으며 고에게서 멀어져갔다.
고는 유를 안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독수리 무리는 일제히 날개를 퍼덕이며 구슬피 울었다. 바람은 멎고 공기는 습습하고 풀들은 불안하게 뒤척였다. 독수리 울음소리만이 대기를 날카롭게 짓눌렀다. 공포에 질린 사냥꾼들은 뒷걸음질을 치고 급기야는 서둘러 골짜기를 빠져나갔다.
며칠 후, 독수리 무리는 더 깊은 골짜기를 찾아 떠났다. 언제나 가장 앞에서 날던 고는 자리를 바꾸어 맨 끝에서 동료 독수리들이 안전하게 날고 있는지, 위험한 것은 없는지 살폈다. 늙고 어린 독수리들을 격려하며, 지쳐 뒤쳐진 독수리는 업고 무리를 이끌었다. 그의 몸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독수리의 것이었다. 쪼개진 심장 중 한 개가 그건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면, 또 한 개의 심장이 맞다고 말해주었다.
영상이 꺼지자 침묵이 백년 된 삼나무처럼 내려앉았다. 할로겐 등이 조도를 낮추자 흑기사의 망토처럼 어둠이 펄럭였다. 청년의 입은 여전히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부루가 하고 싶은 말은 딱 한마디였다.
모든 사람은 무모하다 싶은 사랑에 빚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불같은 사랑이 사랑의 보편적 인식을 한층 순정하게 빚어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