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번째 이야기- 무인도의 두 사람
어느 초여름 오후에 두 사람이 깡통집 앞에 서 있었다. 세 시간 전에 흥에 겨워 산에 올랐던 커플인데, 산에서 한바탕 격전을 치렀는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요즘 들어 다툼이 잦긴 했다. 기념일이 어쩌고저쩌고 하다 투닥거리고, 쇼핑 목록을 정하다 눈 꼬리를 찢고, 데이트 늦었다고 핏대 올리고, 왜 만날 먹는 타령이냐는 퉁바리를 시작으로 언성을 높이고, 어떤 날은 그냥 서로 쳐다보다 대판 싸웠다. 당장이라도 깨질 것처럼 위태위태했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그래서 산에 오르며 처음 만날 때의 설렘을 회복하자고 결의했던 것이다.
구름산 입구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여자의 얼굴은 밝게 빛났으며 남자의 얼굴 또한 광채가 어렸다. 가리대에서 잠깐 쉬었다가 다시 고개를 넘어갈 때도 두 사람은 설렘의 끝판에 선 것처럼 초당 백번씩 하트를 날렸다. 그 동안 왜 그렇게 다투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해발 670m 정상은 식은 죽 먹기였다. 산봉우리의 정자에 앉아 사지가 노곤하도록 노닥거렸다. 주구장창 수다를 떨어도 이야깃거리는 끝도 없이 샘솟았다. 먹을 것도 다 먹고 냉커피까지 바닥을 본 후에 하산을 했다. 유월 하순의 해가 기세 좋게 타오르는 오후 두 시였다.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을 연거푸 갈아타는데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빨리 내려가 시원한 과일 주스 한 잔 마시자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새 등산화에 끼인 새끼발가락이 으스러지고 있어 더는 걸을 수 없었다. 몇 년 만에 산에 올랐는지 모르지만 무리한 건 사실이었다.
산행에도 단계가 있는데 그런 건 생각해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정상까지 잡아끌었다고 눈을 흘기자, 조금만 힘들면 눈초리부터 찢어지다니, 그럴 줄 알았다는 한숨이 맞섰다. 휴일이면 휴일답게 뒹굴뒹굴 거려야 하는데 무슨 개고생이냐는 생각에 입술이 꽉 물어졌다. 게으름뱅이와 산행은 무슨! 똬리를 틀고 있던 짜증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였던 것처럼 꽉 막아놓았던 참을성의 마개가 튕겨나갔다.
“아유, 더워. 이게 도대체 뭐야! 뭐냐고!”
“조금만 힘들어도 그저, 좀 참아라.”
“넌 말하는 게 꼭 그렇더라.”
“네 말은 듣기 좋고!”
“덥다는 말도 내 맘대로 못해!”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짜증내면서 말하는 게 문제란 생각은 안 하지?”
불평은 불만과 부딪쳐 스파크를 일으켰다. 점점 세게 부딪쳐 용접 불꽃처럼 튀고 터지고 튀고 터졌다. 오르막길을 따라 오르는 동안 그동안 쌓아놓았던 애정과 신뢰와 애틋함 들이 뿌리 채 뽑혔고, 내리막길을 따라 수만리 밖으로 굴러 떨어졌다. 다시 오르막을 오르기도 전에 헤어져! 라는 단발마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제 자리에 멈춰 섰다. 그 말이 누구 입에서 나왔든, 그 말의 위력은 굉장했다. 두 사람 다 바윗돌에 얻어맞은 것처럼 황망한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다. 동시에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앞으로 전개될 일, 즉 삽날이 우락부락한 포클레인이 가슴에 가득 들어차 있는 그녀와 그를 푹푹 퍼내는 광경이 떠올랐고, 송두리째 비어버린 마음을 부여잡고 쩔쩔 매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눈앞이 아뜩해졌다.
비록 머리통 깨지게 싸울 때도 있지도 그, 그녀가 내 마음속에 있었기에 행복했는데, 그, 그녀가 있어 등짝 깨지게 힘든 일도 어기영차 해치웠고, 서로가 서로를 불러주고, 서로의 손을 깍지 껴잡을 수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부빌 수 있어 시간의 울퉁불퉁한 길을 씽씽 달려왔는데…….
그러나 결별은 상처만 주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성숙의 기회다. 라는 명언 아닌 명언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 말을 뒷받침 하듯 어차피 하루가 멀게 싸울 바에는 일초라도 빨리 헤어지는 게 상책이다. ‘쿨’이라는 단어가 신봉되는 사회에서 3년을 사귄 건 세상을 부정한 것이다. 결별은 새로운 약속이다! 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장황히 늘어놓으며 두 사람은 헤어지기로 합의를 보았다.
두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발을 질질 끌며 구름산 입구까지 내려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깡통집”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으며 발을 끌다 두 사람은 문득 그 소문을 떠올렸다. ‘깡통집’이 쭉 찢어진 사랑의 마음을 봉합하기도 한다는 소문을.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눈치를 보며 잠깐 망설이다 길을 꺾어 들어갔다. 다리가 아파 쉴 곳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며 깡통집 앞에 이르렀다. 남자와 여자는 양쪽으로 갈라서서 깡통집의 새끼발가락부터 밟아와 문 앞에서 만났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남자가 노크를 하려다 여자를 돌아보았다. 여자가 남자의 등을 쿡 찔렀고, 남자는 반사적으로 똑똑 노크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실내는 석양빛에 물들어 있었다. 마치 주황빛 갓등이 수십 개 켜진 것처럼 아롱아롱한 빛들이 실내를 떠돌다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두 사람은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빛의 전당은 관객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을 펼쳐놓았다. 파노라마를 이루던 빛은 가닥가닥 흩어져 벽에 부딪치고 구슬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
말을 하지 않아도 말이 흘러나오고 흘러 들 것 같은 분위기였다. 두 사람은 떨어져 앉아 빛의 갖가지 형상을 바라보며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사랑은 점멸등 같은 것인가. 기분 좋으면 반짝반짝, 기분 나쁘면 까만 어둠. 사랑의 변덕은 왕지우개 같다. 그렇게 달콤하게 속삭였던 기억을 깡그리 지워버린다. 감정의 희석제는…… 온갖 생각들이 덤불숲을 이루었을 때, 맞은편 벽면에 그림자가 어렸다. 천창의 격자무늬덧문이 반 쯤 닫히고 작은 빛 알갱이가 공간을 떠돌았다. 겁을 집어 먹은 여자가 벌떡 일어났을 때, 맞은편 벽면이 지워지고 (순간적인 착각인지 모르지만 두 사람은 지워졌다라고 느꼈다.) 100인치 정도 되는 모니터가 드러났다. 누가 켠 것도 아닌데 모니터는 오늘의 날씨를 쏟아냈고, 곧이어 짧은 이야기 한편이 방영된다는 자막이 떴다. 도깨비에게 홀린 표정의 두 사람은 여차하면 나가려고 배낭을 끌어안고 ‘무인도의 두 사람’이란 제목이 클로즈업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팔월의 태양은 화염을 쏟아 붓고 백사장은 뚜껑 열린 냄비처럼 끓어올랐다. 열기에 휩싸인 바닷바람까지 홧홧하게 달라붙자 사람들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바글바글한 사람들과 함께 바다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멀리 있던 파도까지 쏜살같이 몰려와 사람들을 밀어 넘어뜨렸다. 구명조끼와 튜브와 바나나보트와 땅콩베개, 매트리스, 오리발, 물안경 등이 먼저 나가떨어졌다. 사람들은 허우적거리며 물 밖으로 나가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거대한 벽처럼 꼿꼿이 일어선 파도가 한꺼번에 쏟아졌고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쓸어갔다.
파도에 휩쓸린 여자는 물살이 약해지는 틈을 타 겨우 빠져나왔다. 여자의 손에 비닐보트가 잡혔다. 그녀는 모든 힘을 다해 노란색 바나나 보트를 잡아당겼다. 손끝이 마비되도록 부여잡았지만 여자도 보트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비된 손가락이 보트를 놓는 순간, 보트는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정신을 잃었다. 누군가 그녀의 치켜든 손을 잡아 끌어올렸지만 아무 것도 몰랐다.
두 사람을 태운 보트는 거친 물결에 휩싸였다. 이미 바닷가 백사장은 시야에서 사라졌으며 사람들의 아우성도 희미해졌다. 하늘에 뜬 태양은 여전히 이글거렸고 갈증과 두려움이 한계선을 넘을 때, 두 사람은 파도의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맹렬한 물의 회오리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졸도한 두 사람은 파도의 동굴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고, 휙 내뱉어져 나가떨어지는 순간에도 정신을 찾지 못했다.
으으으윽…
여자가 신음을 흘리며 먼저 눈을 떴다. 여자는 얼굴 위로 엉킨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눈을 껌벅여 초점을 맞춘 뒤 고개를 돌려 좌우를 바라보았다. 오른쪽 모래밭에 사람의 다리가 보였다. 여자는 고개를 더 돌려 쓰러진 사람을 확인하고 그대로 눈길을 다시 돌려 주변을 한 바퀴 훑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는 숲이 있고 발아래로는 망망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여자는 한동안 그대로 누워 눈만 깜박거렸다. 사람소리도, 동물 소리도……. 두 발로 걷거나 네 발로 달리는 것들이 내는 소리가 전혀 없었다. 천년도 넘는 적막에 놀란 여자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시큰거리는 무릎으로 기어 엎어져 있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모래속에 얼굴을 파묻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의 다리를 잡고 조금 흔들어보았다. 움직이지 않았다. 겁이 난 여자는 조금 더 세게 흔들어보다 남자의 팔을 잡고 세게 당겼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여자는 안간힘을 써서 남자를 뒤집었다.
아아! 남자의 입에서 외침이 터져 나오고 바로 누운 남자가 눈을 떴다.
“여기… 여기가 어디죠?”
여자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는 눈만 떴다 뿐이지 뒤집어진 눈은 흰자위를 드러낸 채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봐요, 눈 좀 떠요. 여기가 어딘지 알아야 하잖아요!”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남자의 얼굴을 찰싹 찰싹 치며 정신이 돌아오게 하려고 애를 썼다. 절벽 위에서 끼룩대는 갈매기 울음소리 외에 부스럭거리는 소리조차 없는 이곳은 무인도인 것이 틀림없었다. 육지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 지 가늠할 수 없었으며 지도에는 나와 있는 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여자는 발작적으로 남자를 잡고 흔들었다. 지금은 이 남자 외에 그 누구에게도 말을 걸 수 없으며, 이쑤시개만한 희망이라도 품으려면 아무 탈 없이 깨어나야 할 사람이었다.
“아아, 아 파 요.”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아떼며 입을 열었다. 남자는 팔 안쪽에 박힌 여자의 손을 풀어내고는 일어나 앉았다.
“여, 긴, 어, 디, 에, 요?”
남자가 띄엄띄엄 물었다. 여자와 바다와 숲과 모래밭을 번갈아 보며 이 단어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요? 눈 뜨니까 여기였다고요. 도대체 여긴 어디에요?”
똑같은 말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지만 여자는 저도 모르게 또 물었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고는 절망에 빠졌다. 낯선 곳이라는 것도 큰 문제였지만 오직 두 사람 밖에 없다는 사실이 까마득한 절망 속으로 몰아넣었다.
“설마 여기 무인도? 그건 아니지요?”
남자가 선생님에게 묻듯이 얼굴을 앞으로 밀었다.
“그 런 거 같은데…요. 아까부터 지금까지 사람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어요.”
“정말 그렇다면 큰일인데요. 파도에 휩쓸려 무인도로 떠내려 온 것 같은데 이제 어쩌지요!”
남자는 양 눈썹을 잔뜩 모으고는 호주머니를 뒤졌다. 어쩌면 휴대폰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전 휴대폰도 잃어버렸어요. 어쩌면 좋아요.”
여자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남자는 반바지 양쪽 주머니에서 휴대폰과 말라가고 있는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휴대폰은 먹통이었다. 배터리를 뺐다 다시 끼우고 물기를 닦아 말려도 전원은 들어오지 않았다. 모든 연락망이 끊겼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여자와 남자는 황망한 눈으로 전화기를 뒤집고 흔들고 문지르고 계속 터치해보고 할 수 있는 것은 다했지만 소용없었다.
두 사람은 결리는 몸을 일으켜 숲으로 들어가며 외쳤다.
“누구 없어요! 여기 좀 보세요!”
“아무도 없습니까! 아무도 없냐고요!”
두 사람이 사방에 대고 소리를 질러도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몇 마리의 새들이 놀라서 날아오르고 바위 뒤로 숨는 다람쥐 꼬리만 보였을 뿐이었다. 그래도 어쩌면 숲 저 안쪽에 누가 살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 사람은 계속 걸어 들어갔다. 우거진 풀숲을 헤치고 무성히 벋은 나뭇가지를 헤치고 맞은편 바닷가에 닿았다. 물결 일렁이는 바다 위로 갈매기들이 곤두박질치고 수평선 위로 떠오른 선박들은 점처럼 멀어져갔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여자가 주저앉아 끅끅 우는 동안 남자는 망연자실 바다만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파도에 휩쓸리는 순간, 그녀와 그가 품고 있던 모든 것이 그들을 배반해버렸다.
세상을 집어 삼킬 듯이 타오르던 해는 어느 듯 꼬리를 내리고 바다 속으로 떨어졌다. 장엄한 풍경이 절망 앞에서는 핏빛 구덩이로 바뀐다는 것을 확인했다. 잔영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등을 밀었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여자와 남자는 터벅터벅 걸어 다시 숲을 지나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완전한 어둠을 맞이했다.
반바지 차림의 남자와 핫팬츠와 헐렁한 티셔츠를 입은 여자에게 무인도의 밤은 잔인했다. 남자와 여자는 한 발 두 발 모래밭 뒤로 물러나 숲의 입구에 웅크리고 앉았다. 기온이 곤두박질을 쳤는지 몹시 추웠다. 숲을 더듬어 풀이 우거진 곳을 찾아냈고, 덤불을 병풍 삼아 앉아있다 그도 견딜 수가 없어서 잎이 우거진 나뭇가지를 꺾었다. 덤불 위로 나뭇가지를 얽어놓고 두 사람은 약간 떨어져 잔뜩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고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는 모래밭으로 달려갔다.
어쩌면 해경이 실종자 수색을 시작했을지도 모르고, 지나가는 배도 있을지 모르니 자리를 지켜야 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누군가 나타나거나, 뱃고동 소리가 울리거나 아니면 바다가 기적적인 장면을 연출해주기만을 기다렸다.
정오쯤 되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가 고팠다. 그러고 보니 꼬박 하루를 굶은 것이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자리를 지키라고 한 후 숲으로 들어가 먹을 것을 찾아보았다. 여름 숲은 나무 열매가 익어가는 시기인 만큼 먹을 만한 게 별로 없었다. 그래도 딱딱한 아그배열매와 붉게 익은 포리똥을 얼마간 찾아냈다. 그리고 놀랍게도 언덕 아래에서 작은 물웅덩이를 발견했다. 남자는 과일을 따 호주머니에 넣고 넓은 나뭇잎을 접어 물을 뜨고는 조심조심 여자에게로 갔다.
여자는 경이로운 눈으로 나뭇잎을 받아 두 숟가락밖에 안 남은 물을 마셨다. 포리똥을 한줌 집어 입 안에 털어 넣고 시큼한 맛에 부르르 떨면서도 깨물어 먹었다. 시큼 떱떱했지만 그래도 뒤끝이 달아 다행이었다. 덜 익어 아주 시고 딱딱한 아그배도 먹었다. 먹지 않으려고 해도 목구멍이 끌어당겨 어쩔 수 없었다. 여자와 남자는 씨만 남기고 모조리 먹어치웠다.
오후가 되도록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멀리서라도 뿔고동 소리 한번 울리지 않고 적막만 쌓여갔다. 산열매 몇 줌으로는 식사가 되지 않았다. 해 꼬리가 바닷물로 빠져들고 있었고, 허기는 배를 납작 눌러 백지장으로 만들고 있었다.
“구조를 기다리다가 먼저 굶어 죽을 것 같아요.”
남자의 말에 여자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서글픈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여자도 춥고 배고파 쓰러질 지경이었다. 남자는 라이터를 가동해 보았다. 천만다행으로 불이 일었다.
남자와 여자는 숲으로 들어가 나무 위를 훑으며 다람쥐를 찾았다, 다람쥐 두어 마리를 발견했고, 잽싸게 다가갔지만 다람쥐들은 나무와 나무 사이를 훌쩍 훌쩍 뛰어 한 나무 꼭대기로 쪼르르 올라가버렸다. 산새는 다람쥐보다 더 높이 있었고, 더 날쌔고 민첩했다. 한바탕 숲속을 뛴 덕분에 다리까지 휘청거렸다.
여자는 넝쿨을 잡아 뜯어 양쪽으로 당기다 어떤 생각이 나 남자에게 내밀었다. 남자가 넝쿨을 받아들자 여자는 대발견을 한 표정으로 말했다.
“바지를 묶어 물고기를 잡는 건 어때요?”
“아, 좋은 생각이에요.”
남자는 여자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배고픔만 면하면 무슨 궁리든지 해낼 것 같았으며, 궁리궁리 하다보면 섬을 빠져나갈 획기적인 묘안도 떠오를지 모를 일이었다. 적어도 구조되기 전에 실신은 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는 여자에게 라이터를 주었다. 여자가 마른 나뭇가지를 긁어모으는 동안 남자는 바지를 벗어 넝쿨로 양쪽 다리를 묶고는 물속으로 들어가 그물처럼 휘둘렀다. 여자가 모래를 파고 돌을 둘러놓은 다음 그 안에 나무를 얽어 놓고 불을 피우는 동안 남자는 필사적으로 움직여 꺽지 새끼 몇 마리와 쌕쌕이 두 마리를 잡았다. 나뭇가지에 물고기를 꿰어 불에 굽자 고소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창자가 쌍수 들고 환호했다. 두 사람은 손가락보다 작은 꺽지 새끼까지 구워 먹고 나중에는 뼈를 바삭바삭하게 구워 누룽지처럼 깨물어 먹었다. 그리고 뜨거워진 돌 위에 모래를 깔고 나뭇가지를 덮고 잠을 잤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구조선은 나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나뭇잎을 길게 묶어 긴 나무에 달아 모래밭에 세웠다. 나뭇잎이 바람을 따라 깃발처럼 흔들렸다. 또 모래밭을 파 나무를 채워놓고 불을 피워 뭉근 연기를 피워 올렸다.
다음 날에는 조금 더 빨리 먹을 것을 구하고 모래밭에 앉아 구조선을 기다렸다.
“우리는 영원히 이 섬에 묶이는 걸까요?”
여자가 물었다. 남자는 대답 대신 돌 던지던 걸 멈춘 채 막막한 시선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을 거예요. 분명히 이곳을 지나가는 배가 있을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구조될 거예요. 그런데 그때까지 어떻게 살아남느냐가 문제일거에요.”
“먹을 것은 충분할까요? 또 잠은…”
여자는 담이 결린 등을 문지르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린 섬이라도 만들 수 있는 젊은이들이에요. 어떻게든 살아나가요. 얼마나 더 머무를지 모르지만 우선 추위와 비를 피할 움막부터 만들어야겠어요.”
남자의 말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있어줘서 고마워요. 만약 나 혼자 있었더라면…”
여자는 그런 건 생각조차 하기 싫다는 듯 좌우로 고개를 흔들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 또한 그렇다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숲에는 아름드리 교목보다는 잔가지 많은 잡목들이 잔뜩 우거져 있었다. 나무가 아무리 많아도 칼도 톱도 없어 필요한 만큼 얻을 수는 없었다. 남자는 손으로 쥐어보고 가늘어도 단단한 나뭇가지를 꺾었다. 금세 손바닥이 까지고 팔목이 시큰거렸다. 그래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밖에 없었다. 남자는 숲으로 더 들어가 비바람에 꺾인 나무들도 끌어왔다.
남자가 몇 차례 나무 짐을 나르는 동안 여자는 숲 입구의 바닥을 골랐다. 잔돌을 걷어내고 엉킨 나무뿌리를 잡아 뜯어내 편편하게 다졌다. 두 사람은 가장 긴 나무를 골라 넝쿨로 묶고, 벌려 세운 다음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들을 엮어 둘레를 치고 덮었다. 선사시대의 모형물과 같은 움막 안에 마른 풀을 깔자 말할 수 없이 안온하고 편안한 침실이 되었다.
또 하루가 지나자 여자와 남자는 오래된 친구처럼 자연스러워졌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음식을 권하고 어떻게 이 황당한 상황을 견디어 낼지 의견을 나누었다. 그 다음 날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의 몸을 스치고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오자 나란히 누워 움막 밖의 밤의 스크린에 가득 돋은 별을 보고, 온기를 높이려 가까이 다가가 누웠고, 서로의 눈을 보며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를 깨달았다.
그 순간, ‘너’와 ‘나’라는 구분이 사라졌다. 두 사람은 서로의 세포를 잇대어 맞출 듯 세게 끌어안았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전히 맞대자 불처럼 뜨거워졌다. 두 사람은 불의 혀처럼 서로를 탐했다. 두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불안이란 낱말은 떨어져 나가고 희망이란 방울들이 서로의 갈비뼈 사이를 메웠다.
다음 날 두 사람은 그 섬이 무인도가 아니라 그들의 왕국이라는 것을 알았다. 눈을 떠 서로를 바라볼 수 있으며 함께 잠속으로 빠져드는 둘만의 공간이었다. 남자의 눈에 여자는 세상의 어떤 여자보다 아름다웠고, 그 자신보다 더 숭고해보였다. 여자 또한 남자가 그녀를 온통 차지해버린 것을 알았다. 그가 없다면 그녀도 없는 것이며, 그와 그녀가 한 몸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여자는 자신의 지난한 과거를 말하다 별로 쓸모없는 짓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남자는 자신의 배경과 행적을 늘어놓다 지루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그와 그녀가 우쭐대며 자랑스러워 했던 것들이 두 사람 사이에 있어선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새로이 역사를 쓰는 기분으로 이야기 하다, 서로의 눈에 고인 사랑이 흘러 강물을 이룰 때면 거칠 것 없이 사랑을 나누고, 두려움이 몰려올 때는 필사적으로 사랑을 나누었다.
두 사람은 힘을 잃지 않기 위해 서로를 격려해주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자마자 서로를 향해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서로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하루를 축복해주었다.
“당신이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당신은 내 전부야. 오늘도 우리는 행복할 거야.”
“아침에 눈을 뜨고 당신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 언제나 변함없는 내 사랑.”
마치 평생을 함께 산 듯한 말투였는데, 그런 말들이 두 사람의 어깨를 치켜 올리고 근육에 힘을 붙게 하고 힘줄을 단단하게 당겼으며 낙심을 방지해주었다. 두 사람 사이에 오직 사랑 만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고도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남자와 여자는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였다. 불의 씨앗인 화덕에(모래밭을 깊이 파고 불을 피웠다가 잠자기 전에 불씨를 묻어두었다) 나무를 넣어 불길을 키웠으며,(이슬에 젖은 나뭇가지를 섞어 불을 피우면 연기가 많이 났는데 구조 신호로 유용했다.) 숲 가장자리를 돌며 떠밀려온 판자, 스티로폼, 플라스틱 조각, 찢어진 옷감과 튜브, 밧줄, 페트병 등을 주워 모았다. 그리고 숲으로 들어가 나무 열매와 풀뿌리로 끼니를 때우고 다람쥐와 산새를 잡을 궁리를 하고, 풀과 나뭇잎과 넝쿨들을 끌어왔다. 그런 다음 한낮이 되면 더위를 식힐 겸 물속으로 들어가 물고기를 잡고, 바위가 있는 곳까지 나가 해초와 홍합을 땄다.
마른 널빤지와 플라스틱 조각과 나무토막과 나뭇가지와 밧줄 등이 충분히 모아졌을 때, 두 사람은 오두막을 새로 짓기로 했다. 우선 햇볕이 잘 들면서도 나뭇가지가 늘어져 그늘져 있는 곳을 다졌다. 세로 기둥을 촘촘히 박고 가로기둥 또한 촘촘히 질러 밧줄과 넝쿨로 묶었다. 풀과 나뭇잎과 비닐을 뭉쳐 틈을 막고 널빤지와 플라스틱을 겹쳐 지붕을 덮었다. 바닥에는 마른 풀을 수북이 깔고 다져 매트리스처럼 푹신하게 만든 다음 말려둔 비닐과 천 조각을 깔았다. 오두막 주변을 파 물길을 내자 비가와도 끄떡없는 보금자리가 되었다. 두 사람은 움막은 창고로 용도를 변경하고 궁궐 같은 오두막에서 뜨겁게 사랑을 속삭였다.
그들이 무인도에 정착한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 사이 비가 세 번 오고,(불씨를 오두막으로 옮겼다가 다 태워먹을 뻔 했다.) 열다섯 번 쯤 숲을 탐사하고, 날마다 바닷물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았다. 흙을 이겨 그릇을 만들어 불에 굽다 실패하고, 다시 만들어 그늘에서 말리고 불의 온도를 조절하여 토기 몇 점을 얻고, 물고기 뼈를 이용해 낚시 바늘을 만들었다.
한 달 하고 이틀이 지난 오후였다. 남자는 자맥질을 해 전복과 소라 등을 건져내고 여자는 잘라낸 페트병에 그것들을 담아 옮겼다. 여자가 다시 바닷물로 뛰어 들었을 때, 저 멀리 바위 뒤로 돌아가 있던 남자가 외쳤다. “이것 봐! 이게 뭔 지 알아!”
남자는 호들갑스럽게 첨벙거리며 커다란 것을 밀고 왔다. 쪽배처럼 거무스레한 것이 물결을 따라 밀려오고 있었다. 여자는 헤엄쳐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꽤나 큰 상괭이(쇠돌고래)였는데, 낚시 바늘을 잘못 삼켰는지 아니면 파도에 당했는지 여기까지 떠내려 온 것이었다.
“우리 횡재했어!”
남자가 한 팔을 치켜들고 환하게 웃자 여자는 냉큼 소리쳤다.
“팔지도 못하잖아!”
“우리가 잘 먹는 게 제대로 파는 거야. 고래는 버릴 게 한 가지도 없다고!”
남자는 몹시 만족하여 상괭이를 힘차게 밀었다. 여자와 힘을 합해 모래톱으로 끌어올린 상괭이는 일 미터 오십 센티를 훌쩍 넘는 크기에다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어 한동안 먹을 것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남자는 단단한 플라스틱 조각과 길고 얇은 돌을 갈아 칼을 만들었다. 한 번도 고래를 해체해 보지 않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발라내고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는 이미 다 생각해두었다. 남자는 미끈미끈한 상괭이를 만지며 연신 웃음을 흘렸다. 표류된 후 두 번째(첫 번째 희망은 말할 것도 없이 여자다.) 희망을 만난 것 같은 흥분이 밀려왔다. 남자는 날카롭게 갈아놓은 플라스틱 조각으로 상괭이의 배를 죽 그었다.
“어? 이거 굉장히 질긴데.”
남자는 다시 힘을 주어 죽 죽 그었다. 잔 줄만 몇 개 그어졌고 탱탱한 피부는 그대로였다. 여자가 돌칼을 내밀었다. 갈았다고는 하나 무디기 짝이 없는 돌칼로 상괭이를 해체한다는 건 무리였다. 땀을 흘리며 한 시간째 실랑이를 벌렸으나 배에 구멍만 조그맣게 났을 뿐 멀쩡했다. 고래는 24 시간 안에 해체해서 말리든지 훈제를 하든지 해야 하는데 큰 일이 난 것이다.
“배고프다.”
여자가 말했다. 남자의 이마에서 땀이 방울져 툭 툭 떨어지고 있었다. 물속에서 오래 있었던 데다 힘을 써댔더니 사지가 바들바들 떨려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배고프다고.”
여자가 투정부리듯 목소리를 높였다.
“통째로 구워. 통째로 구워먹으라고! 어유, 힘들어 더 못하겠다.”
남자는 모래밭에 털썩 주저앉아 턱에 찬 숨만 푹푹 내뱉었다.
“당장에 고래 고기로 포식하게 해줄 것처럼 떠들더니 이게 뭐야. 그냥 그림의 떡이잖아. 이제 이겨 어떻게 할 거야! 까닥하단 상어만 떼로 불러들이게 생겼잖아.”
여자는 눈을 흘기며 발로 애꿎은 모래만 푹푹 퍼 고래 위에 끼얹었다.
남자의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그렇잖아도 열 받아 죽겠는데, 여자가 부채질을 해댄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여자는 아무 도구도 없으면서 횡재라며 얼씨구나 춤을 추던 남자가 얄미웠다. 여자가 차낸 모래가 남자의 얼굴에 튀었다.
“도대체 왜 애처럼 보채! 왜 보채냐고! 나도 힘들어 죽겠단 말이야!”
남자의 날 선 목소리와 다그치는 말투에 여자의 눈에 쌍심지가 돋았다. 그 동안 몇 번 투닥거리긴 했지만 남자가 정색을 하고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화내지 않고 말하면 누가 잡아먹어? 못난 남자들이 화부터 낸다더라. 라는 말이 목구멍을 찔렀지만 눌러 삼켰다. 이 상황에 가시돋힌 말 한마디는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다. 아니, 서로를 태워버릴 망정 한바탕 하고 싶었다. 그녀 또한 누적된 감정들이 치밀어 올라 참기 어려웠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래 속으로 푹푹 빠지는 발이 여느 때보다 무거웠다. 그녀가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떠올랐고, 그녀를 비웃는 것 같았다. 그래, 그래, 비웃어. 외로워서 참아주는 건 사랑이 아닐지도 몰라. 참고 견디다 보면 앙금만 남을 뿐이지. 앙금이 쌓이고 쌓여 결국 벽을 이루는 법이지. 그녀는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리곤 빙 돌아서 커다란 나뭇잎 위에서 한창 말라가고 있던 전복과 소라를 잔뜩 가져왔다.
“일단 먹어.”
여자는 남자에게 전복을 내밀고 자기도 한 개 먹었다. 찰싹 달라붙은 뱃속이 환호를 지르며 환영하는 통에 둘이는 허겁지겁 나머지 것도 다 먹어치웠다. 그리곤 그대로 퍼질러 앉아 소화가 잘되도록 배를 문질러주었다.
악! 악! 악!
갑자기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끄덕끄덕 졸던 남자는 벌떡 일어나 휘둥그래진 눈으로 미친 것처럼 머리까지 풀어헤치고 악을 쓰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악! 악! 악! 악! 악!
여자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남자가 당황하여 여자의 입을 막으려고 했으나 여자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렀다.
“당신도 질러! 당신도 소리 지르라고!”
여자가 외쳤다. 어이 없이 바라보던 남자는 픽, 웃고는 바다로 뛰어 들었다. 날바위까지 헤엄쳐 간 남자는 재빨리 돌아와 상괭이를 끌어다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왜? 버리려고? 안 돼! 안 돼!”
여자는 깜짝 놀라 남자를 말렸다.
“그래, 버릴 거야. 너도 미쳐 가는데 이깟 고기가 무슨 소용이야.”
남자는 여자를 밀치고는 상괭이를 밀며 헤엄쳐갔다.
“아, 그게 아니잖아. 자기하고 피터지게 싸우는 거 보다 소리 질러서 풀어버리려고 한 건데. 그래야 찌꺼기가 안 남잖아.”
여자는 발을 동동 굴렀다.
“아까우면 따라 오든지.”
남자는 상괭이를 끌고 날바위까지 갔다. 여자는 계속 말리며 따라갔다. 바닷가에서 100m쯤 떨어져 있는 날바위는 작두날을 세워놓은 것처럼 날카로웠는데, 남자는 낑낑거리며 상괭이의 머리를 끌어 올리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얘 좀 밀어봐.”
그때서야 남자의 의도를 알아챈 여자는 배시시 웃으며 상괭이를 밀어 올렸다. 두 사람은 날선 바위에 상괭이를 걸쳐 놓고 흥부 박 타듯이 이리저리 밀었다. 급기야는 흥타령까지 불러대며 밀고 당기자 가죽이 얇아졌다. 두 사람은 다시 상괭이를 밀어 뭍으로 올라왔다. 해가 바닷물에 풍덩 빠지자 어스름이 내려오고 사위는 거무스레하게 변해갔다. 여자는 나뭇단을 가져와 화톳불을 피웠다. 탁탁 불꽃이 튀고 널름대는 불길을 따라 남자는 플라스틱 칼을 찔러 넣어 고래 꼬리까지 끌고 갔다. 여자는 쪼그리고 앉아 감탄을 연발하며 고래뱃속을 구경했다. 폐로 숨을 쉬는 동물답게 굉장히 큰 기관지를 가지고 있었고 위도 대단히 컸다. 남자는 내장을 들어내고 살을 발랐다.
“그냥 숭숭 자르면 안 돼? 시간도 늦고 자기도 피곤하잖아.”
여자의 말에 남자는 빙긋 웃었다.
“가죽이 필요해. 가죽을 꼭 얻어야만 해. 고래는 우리에게 행운이야. 한 점이라도 허투루 해서는 안 되니까 날을 새워서라도 제대로 분리해 낼 거야. 자기 먼저 들어가서 자.”
여자는 하품을 연신 해대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나무를 얹어 불을 키우고 발라낸 살을 토기에 담아 옮겼다. 고래는 고기와 기름과 힘줄과 뼈와 가죽 모두를 주었다. 두 사람은 고기를 구워 늦은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날이 환히 밝아올 때까지 고기를 썰어 널어 말리고, 연기를 쐬어 널어놓고, 지방을 끓여 기름을 만들고, 뼈를 갈아 다듬었다.
여러 날 뒤적여 잘 말린 고기를 차곡차곡 쟁여놓고, 뼈를 갈아 바늘을 만들고, 힘줄은 실로 쓸 수 있도록 나무토막에 감아 보관해두었다. 그러는 틈틈이 남자는 가죽을 매만졌다. 돌칼로 무두질을 해 매끈하게 다듬고 연기를 쐰 후 그늘에서 말렸다. 가죽이 마르는 동안 시간 날 때마다 막대기로 두들겨 수축을 막고 완전히 마른 뒤엔 기름을 발라 또다시 말렸다. 고래가죽은 얇고 부드러워 일교차가 크고 습도가 높은 바닷가 생활에 적당했다.
“당신을 따뜻하게 덮어 줄 것이 생겨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여자의 턱 밑까지 가죽을 끌어올려주며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여자가 새벽이면 몸을 오그리는 것을 보고 늘 안타까웠다. 나뭇잎으로 만든 덮개는 살갖에 떠 있어 새벽 찬 기운을 막아주지 못했다. 그래서 남자는 고래 가죽을 무엇보다 정성들여 다듬었던 것이다. 여자는 남자의 그런 마음에 감격했다. 혼자서 둘둘 말고 자기에 적당한 크기였지만 여자는 남자의 품을 파고들며 말했다.
“우리 더 붙자. 이렇게 딱 달라붙으면 우리 둘 다 충분히 덮을 수 있잖아.”
두 사람은 한 몸인 것처럼 빈틈없이 붙었다. 남자와 여자의 체온이 합해지자 말할 수 없이 뜨거워졌고 두 사람은 간절하고도 열렬하게 사랑을 나누었다. 파도가 모래톱까지 쓸려왔다 쓸려가고, 산새 울음소리가 길게 이어졌지만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는 이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그들은 원시의 터전에서 매일 처음 만난 것처럼 사랑하며 혹은 문명을 잊고 혹은 그리워하며 살아갔다.
한편의 이야기가 끝난 뒤 침묵이 공간을 채웠다. 날벌레 날갯짓 한 점 들리지 않는 적막은 어떤 말도 허용하지 않았다. 음습하고 싸늘한 눈빛으로 두 사람 사이에 낑겨들어 쿡쿡 찔렀다. 붙으려면 딱 붙고, 떨어지려면 아예 떨어지고……. 남자와 여자는 자동장치처럼 얼른 다가앉았다. 왁자글한 도시의 연애라고 해서 무인도의 두 사람이 되지 말란 법은 없다. 서로만을 바라보는 것, 두 사람은 그것을 굳게 약속하듯이 환하게 웃으며 깡통집을 나왔다. 시새워 하는 깡통집의 푸념일랑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의 허리를 껴안고 언덕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