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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lief Apr 11. 2021

사랑이 폭풍처럼 몰려왔다 할지라도

여섯번 째 이야기- 두렵고도 절실한

 산들바람이 머리카락을 날리자 여자의 작은 귀가 드러났다. 여자는 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려 귀 뒤에 꽂은 다음 깡통집 문을 두드렸다. 

 “여보세요. 안에 계시나요?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대답 대신 정적이 언덕과 깡통집을 한 바퀴 돌았다. 여자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말을 할 수 있다면 내 말도 들을 수 있을 거예요. 무례하게 발가락을 밟아 문을 열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예요. 노크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주는 거 괜찮지 않아요?”

 여자는 유리문에 얼굴을 대고 부탁했다. 

 “결국 나더러 당신 발을 밟으라는 건가요? 그건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요.”

 좀 질기다고 할까, 여자는 이 방법 외에 다른 것은 선택하고 싶지 않다는 투로 문을 두드리고 열어달라고 보챘다. 안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치 단잠을 깨워 짜증 난 것처럼 그러더니, 마침내는 신경질까지 부리는지 퉁탕거리는 소리까지 났다. 그리고 문이 왈칵 열렸다. 마지못해 열어주는 거니까 겁이라도 좀 먹으라는 듯이.

 깡통집 안으로 들어간 여자는 공손히 목례를 했다. 누가 어디에 있다고 그러는지 모르지만, 어디선가 주인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몸짓이었다.

 “미안하니까 그만 해요.”

 부루가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바쁘신데 제가 방해 했나 봐요? 언제라도 출입이 가능하다고 해서 그런 건데, 바쁘신 줄 알았다면 한가하실 때 올 걸 그랬네요.”

 여자는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그러자 무안해진 분위기를 무마하려는 것처럼 부루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아, 그렇게 바빴던 건 아닌데, 아,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생각해야 할 게 좀 있어서 조용히 있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또 오시는 것보다 제가 생각할 일을 다음으로 미루는 게 훨씬 나은 것 같아요. 그러니 전혀 부담 갖지 마세요.”

 말이 많아지고 있다고 여긴 부루는 그쯤에서 입을 다물었고, 여자는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에 적잖이 마음을 놓았는지 싱긋 웃더니 힐긋 소파를 바라보았다. 

 “어서 앉으세요. 손님 접대가 시원찮아서 어쩌지요? 음료수라도 준비해놔야 하는데 그게 참 여의치 않네요.”    부루의 말에 여자는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여기 들어와 향긋한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가신다며 소파에 앉았다. 

 둘 사이에 침묵이 잠깐 흘렀다. 부루는 여자가 용건을 꺼내기를 기다렸고, 여자는 어떻게 말을 꺼낼까 하며 적당한 첫마디를 고르고 있었다.

 “저, 있잖아요. 당신은 방문객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들었어요. 맞죠? 그래서 당신에게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로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해드리려고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무례한 건 아니죠?”

 “네에?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 여기까지 오셨다고요? 저를 위해서? 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물론 제게는 십 년 동안 그러니까 삼천육백오십일 동안 내내 해도 남을 만큼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 모든 이야기들보다 당신이 해주는 이야기가 필요해요. 당신이 말해주는 이야기는 그 어떤 것보다 생생할 것 같아요. 정말이에요. 빨리 해주세요. 당신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 참을 수가 없네요.”   

 부루의 조금 심하다 싶은 아부에 그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여자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첫마디를 뗐다.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별명은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였다. 체구조차 자그마해서 ‘작은 자루’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지만 아니라고 우길 수도 없었다. 어디를 가든지 입 다물고 조용히 있는 통에 때로는 친구조차 그녀가 거기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을 겁냈고, 자신감이 없어 무슨 일이든지 못한다는 말부터 했다. 

 사춘기를 지나고 청년기에 접어들었지만 움츠러든 어깨는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소질을 드러내는 것도 없었고 공부도 잘하지 못했다. 선생님께서 “넌 태도는 좋은데 성적은 왜 이 모양이냐?”고 나무라실 때에도 바닥을 친 성적 보다 쳐다보는 눈길이 더 무서웠다.

 그녀는 재수를 해서 도내의 한 대학에 간신이 들어갔다. 연둣빛 봄물이 출렁이는 학내는 청춘의 열정으로 한껏 들떠 있었다. 그녀는 청춘의 물길을 피해 가장자리로 조심조심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강의가 대강당 앞을 지나가는데 웬 총각들이 몰려와 다짜고짜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아주 막무가내였다. 

 그들은 ‘추인회’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동아리 멤버들이었다. 추인회? 뭐하는 곳? 이라고 묻기도 전에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는 가입서를 작성했다. 작성하는 중에 못생긴 사람들의 집합소인가 해서 그녀는 기분이 좀 나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녀를 추녀로 보았단 말인가? 그런데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었다. 그녀의 지나친 의기소침이 충분히 묻혀들 것만 같았다. 

 몇 번을 주저하다 모임에 나갔다. 스물 대여섯 명 쯤 모인 젊은 청춘들은 그리 못생기지는 않았는데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옆구리가 헐거운 사람들처럼 맥없이 낄낄대고, 공연히 왔다갔다 부잡을 떨고, 나무늘보처럼 늘어져 하품을 해대고 있어 회의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와중에 회장만 소신에 차 이렇게 말했다.

 “밀 추(推,) 끌 인(引), 추인회 여러분, 우린 서로 앞에서 끌어당기고 뒤에서 밀며 이 거친 세상을 함께 헤쳐 나가는 동지입니다. 우리 앞에 펼쳐진 이 세상이 얼마나 험합니까? 혼자서 결코 헤쳐 나갈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옆구리에 끼든지, 누군가의 꽁무니를 붙잡든지, 아니면 서로의 등을 대고 손깍지 끼고 함께 헤쳐 나가야만 합니다. 바로 그러기 위해서 추인회가 결성된 것입니다. 그러니 정기 모임 때는 물론이고 비정기적 모임에도 열심히 나와 주십시오. 함께 모여 왁자지껄 떠드는 게 바로 추인의 힘입니다.”

 말이 되는 지 안 되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휘파람을 불고, 박수를 치고, 술잔을 부딪쳐 나누었다. 동아리의 목적이 왁자지껄 떠드는 것이라는데 누구도 이견을 내지 않았다. 희한하고 어처구니도 없는 모임이었지만 괜찮았다. 가만히 있든 말든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고, 머리 아픈 주제도 없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어떤 강요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음 달 모임에 또 나갔다. 조용히 밥을 먹고 다른 사람들 떠드는 것을 보며 재미있게 놀다 왔다. 여름방학 MT를 갔을 땐 선배 언니들과 함께 대형마트에 가서 음료수와 다과 등을 준비하고, 변산 리조트에서 회원들이 먹고 마시는 내내 필요한 것을 찾아다 주고 쓰레기를 치우며 뒤치닥꺼리도 했다. 

 추인회는 한 해의 기념으로 연말에 음악회를 열기로 했다. 상품을 내건 경연대회 형식이었다. 신청 대상은 J시 내의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었다. 회원들은 매일 같이 동아리 방에 모여 세부 계획을 짜고, 날짜를 정하고, 대회장을 물색하고, 스폰서를 구하고, 초청장을 만들고, 상품 목록을 뽑고, 가격을 비교하고 주문을 넣었다. 준비 할 것이 어마 어마했지만 그녀는 열띤 얼굴로 그 모든 일을 도왔고, 어느 사이 회원들은 ‘일 잘하는 그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새로 임원 선출을 할 때 부회장으로 추천되었다. 자기 이름이 거론되는 것에 화들짝 놀란 그녀는 자기소개는 커녕 하고 문 밖으로 달아나버렸다. 그러나 회원들은 어느 자리든 한 자리 안겨주기 위해 안달을 했다. 하는 수없이 회계 일을 맡았고, 일은 야물게 잘했지만 때때로 말이 너무 없어 답답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울적했고, 나름대로 노력도 했지만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녀에게 사람들과 사람들의 말은 아름다운 그림과 음악이었다. 사람들이 환한 벚꽃 나무 아래를 거닐며 떠드는 것이 보기 좋았고, 아이들이 까르륵대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모습도 즐겁게 바라보았다. 심정적인 약점으로 사람들 사이에 쉽게 끼지 못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그리운 대상이었다.    

 춘 삼월, 모든 것이 생동하는 계절이 다시 돌아왔다. 뜬금없는 짓을 잘하는 추인회는 봄맞이를 한답시고 장구와 징과 꽹과리를 들여왔다. 어쩌다 장구채 한번 잡아본 사람은 장구를 앞에 놓고, 눈으로라도 꽹과리를 만져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꽹과리를 잡았다. 무거운 징은 힘깨나 쓰는 사람이 들었다. 동아리 방 문을 꽉 닫고 모두 둘러앉았다. 사물놀이 중 가장 허물없는 장구가 먼저 운을 뗐다. 더더덩더쿵,덩더쿵…, 천지간 맺힘 없는 장구소리에 이어 눈깔처럼 야무진 꽹과리 채가 얇은 놋쇠판을 두드렸다. 게겡겡겡 칭치치칭… 소리 중간에 지잉 지잉… 묵직한 징소리가 중매자처럼 끼어들어 서로를 아울렀다. 

 팔을 쳐든 사람들의 동작을 따라 무두질 잘 된 동물 가죽과 신경질적인 금속판때기와 너나들이 강철판의 파열음들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사람의 밑바닥을 긁어댔다. 까닭도 모르는 갈증과 열망이 흐느끼며 올라왔고, 납작 엎드려 있던 감흥이 강물처럼 밀려들어 사람들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모두 저절로 어깨를 들썩이며 장단을 맞추었다. 모든 사람의 신명이 한데로 어우러져 깊고 굵은 물줄기를 이루는 동안 사십 분이 훌쩍 지나갔다. 

 쉬는 시간이 되자 동갑내기 태훈이가 장구를 끌어다 그녀 앞에 놓았다. 그녀는 뭐냐며 태훈이를 올려다보았다. 태훈이는 장구통을 둥둥 두드리며 한번 쳐보라는 시늉을 했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자 그가 또 둥둥 소리를 냈다. 

 작대기처럼 껑충하고 수염자리가 짙은 표태훈은 그녀의 우군이지만 고집불통이었다. 그녀가 뭔가를 하느라 밥을 먹지 않을 때면 밥공기를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그녀를 불러댔고, 그녀가 다른 사람들 속도에 맞추느라 허겁지겁 밥을 밀어 넣으면 그릇을 빼앗으며 천천히 먹으라고 윽박질렀다. 태훈이가 장구를 그녀 앞으로 조금 더 밀며 말했다.

 “쳐봐. 너 잘 칠거야.”

 “못 쳐.”

 “아니야. 칠 수 있어. 장단을 모르더라도 흥을 내서 따라가면 돼.”

 “난 흥 없는데.”

 “어떤 사람이든 다 흥이 있어. 꺼내지 않았을 뿐이야. 난 꽹과리를 두들길 테니까 넌 장구를 두드려. 그냥 막.”

 세상을 견디는 것 중 한 가지가 ‘그냥, 막’ 이라는 걸 아는 것처럼 태훈이가 말했다. 그리고 그녀도 무엇이든 그냥 막 하고 싶었지만 못하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힘주어 말했다. 말도 막 하고, 막 장난치고, 막 웃고, 막 고집 피우고, 막 울고 싶은 그녀의 심정을 너무 잘 아는 것처럼 말이다. 

 태훈이는 꽹과리를 잡고 채를 들어 채쟁챙챙 가벼운 소리를 냈다. 그녀에게 까닥까닥 고개짓을 하며 게겡겡겡 겡게겡겡 겡겡겡 낮은 소리를 냈다. 그녀는 속으로 박자를 맞추며 가락을 따라가 보았다. 중학교 음악시간에 배웠던 장단이 떠듬떠듬 떠올랐다. 그녀는 팽팽히 잡아 맨 소가죽을 손으로 가만히 두드려보았다. 두두둥… 두두둥… 탄력 있는 울림이 전신으로 전해졌다. 

 태훈이는 꽹과리를 치며 계속 재촉했다. 그녀는 궁채(궁글채)와 열채(가락채)를 양손에 쥐고 장구통을 두드렸다. 그러다 한 발 두 발 걸음을 떼는 것처럼 덩더 더덩덩 따라갔다. 꽹과리는 천지간 틈을 비집으며 게게겡게겡게엥겡… 열을 냈고, 그녀는 덩덩 더덩덩 궁궁 궁궁궁, 더덩 덩더 궁궁, 더더쿵… 태훈이가 낸 틈을 뒤 따랐다. 점점 꽹과리 소리가 높아졌고, 장구소리도 커졌다.  

 공기를 잡아 찢었다가 어루만지고 가슴 맨 밑바닥을 후벼 팠다가 덮어주는 악기울음에 온 몸이 저릿저릿 했다. 오랫동안 나자빠져 형체를 잃어버렸던 신명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태훈이는 눈을 감은 채 게겡 챙챙, 겡게겡 챙챙챙… 더 빨리, 더 활짝 좆아오라고 다그쳤다. 그녀는 힘껏 채를 휘둘렀고 덩더 덩더 더덩궁 덩더 덩더 덩덕쿵쿵쿵쿵…… 좆아갔다. 한번도 뜨거운 적이 없던 피가 바그르르 끓어올라 그녀의 몸 구석구석까지 달렸다. 그녀의 감은 눈앞으로 멀리 나갔던 흥겨운 기분들이 밀려들었고 두 팔을 벌려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그녀는, 모든 힘을 다해, 장구 복판이 찢어지도록, 미친듯이 두드리고 때렸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언제 끝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정적이 그녀를 깨웠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모두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 신화적인 장구잽이를 발견한 것처럼 모두들 놀란 눈빛이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녀는 어찌할 줄을 모르다 동아리 방에서 뛰어 나왔다. 가슴을 펴자 시원한 바람이 몰려와 후끈해진 허파꽈리를 쓸어주었다. 뿌듯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가로등 불빛이 목련꽃송이를 하얗게 밀어 올리고 있는 저녁이었다.  

 “미영아, 같이 가자.”

 태훈이가 불렀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서 그를 기다렸다. 오늘 그가 끈질기게 권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 통쾌하고 머리끝까지 개운한 기분은 맛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다가와 곁에 서자 그녀가 말했다.

 “아까 고마웠어.”  

 그 말에 그는 히히히 웃었다. 

 “진짜? 왕수줍음 한테 들으니까 닭살 돋는 거 좀 봐. 그럼, 오늘 나랑 함께 있어줘야 한다.”

 “응?”

 “별 다른 일 없으면 같이 놀자. 나 엄청 심심해.”

 “어떻게, 나 놀 줄 모르잖아.”

 “장구치고 놀던 여자가 못 논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무조건 놀아야 해.”

 태훈이는 고집을 부리고 그녀의 등을 밀어 시내로 나가는 버스에 태웠다. 시장 골목에서 내린 다음 골목길을 몇 번이나 꺾어지더니 간판도 없는 허름한 집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마자 주인은 뭐 먹을 거냐고 묻지도 않고, 두껍게 썬 돼지목살과 껍데기를 가져오고 불판을 얹었다. 불판이 달구어지자 태훈이는 고기를 얹었다. 치지직 소리를 내며 고기 익어갔다. 허기가 물밀듯이 몰려왔다. 태훈이는 고기를 뒤적이고 익은 고기를 잘라 그녀 앞으로 밀어 놓으며 얼른 먹으라고 했다. 빨리 안 먹으면 화를 낼 것처럼 안달을 부려 그녀는 고기를 집어 입에 넣었다. 그는 막걸리를 조금 따라주며 맛만 보라고 했다. 그녀가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서 권했기 때문에 거절하지도 못했다. 한 모금 마시자 홍어 삭힌 양푼에 코를 대고 있는 것처럼 알싸한 냄새가 정수리까치 치솟았다. 돼지껍데기는 처음이지만 고소한 콩가루에 찍어 먹으니까 기름기도 가시고 맛도 괜찮았다. 사람들로 꽉 찬 식당 안은 왁자지껄했고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다 못해 코를 막아 버렸다.   

 “꽹과리를 사십 분 치는 건 운동장 열 바퀴 뛰는 것만큼 칼로리를 소비하는 것 같아. 배고파서 혼났네.”

 태훈이가 불룩해진 배를 쓸며 말했다. 그녀도 배를 쓸며 거드름이란 걸 피워보고 싶어졌다. 그녀는 남은 막걸리를 훌렁 마시고는 목을 싹싹 쓸었다. 꺼억 트림이 나올 것만 같았고, 알딸딸한 기분이 눈자위로 번져갔다. 취객이 된 것 같아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나갈까? 속이 좀 더부룩하네. 소화 좀 시키고 싶은데 도와줄래?”

 둘이서 4인분을 먹었으니 꽤 많이 먹은 셈이었다.  

 “소화제 사다줄까?”

 “아니, 그냥 내 옆에 있어줘. 그러면 금방 소화될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넜다. 퇴근길을 재촉하는 경적소리가 여기저기서 바쁘게 들려왔다. 삼삼오오 무리지은 사람들은 식당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벌써 취기가 오른 사람들은 큰 소리로 동료를 부르고 아무데나 침을 뱉었다. 

 “어디 가는데?”

 사람들이 바글바글 끓는 곳, 사람들이 거칠게 어깨를 부딪치는 거리는 두려움부터 불러 일으켰다. 태훈이는 대답 대신 그녀를 길 안쪽으로 오게 하고는 조금 더 걸어갔다. 네온싸인이 요란한 삼층 건물로 들어간 다음 이층으로 올라가 노래방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노래방이잖아.”

 “노래 부르면 금방 소화되잖아.”

 “나 노래 못하는 줄 알면서.”

 “알아. 엄청 못하지. 아니, 안 하지.”

 “알면서 왜?”

 “아니까 둘이서 온 거야.”

 “말도 안 돼. 내가 어떻게 노래를 부르냔 말이야?”

 “왜 못해? 입이 없어, 성대가 없어, 음악교육을 못 받았어?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그냥 안 하는 거잖아. 무조건 할 수 없다고 주문을 걸고는 자신을 그 안에 가두잖아.”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고집 세고 윽박지르기 잘 하고 막무가내인 줄만 알았는데 매의 눈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손톱 옆 각질만 잡아 뜯었다. 목소리 낭랑한 그녀는 물론 음치는 아니었다. 혼자서는 흥얼흥얼 노래 가락을 뽑기도 하지만 남 앞에서 노래라니, 그건 오금이 저려서 절대 못한다. 

 태훈이가 숫자를 누르고 마이크를 잡았다. 스크린이 켜지고 반주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중고등학교 노래 실기시간처럼 가슴이 쿵쿵 뛰었다. 덜덜 떨며 한 소절을 부르다 주저앉아버린 기억도 떠올랐다. 어찌됐든 한 곡은 불러야 할 것 같은데, 어쩌지? 태훈이가 뭘 어떻게 부르는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빨리 골라.”

 태훈이가 철판 같은 노래책을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한 곡이야 못 부르겠어. 아무거나 부르지 뭐. 눈 감고 부르면 돼.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책을 펼쳐들었다. 앞에서 뒤까지 모두 뒤졌지만 부를 만한 노래가 없었다. 태훈이가 다섯 곡을 뽑도록 찾지 못했다. 그러자 태훈이는 더는 못 봐주겠다며 다짜고짜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는 마이크를 쥐어주었다. 

 그녀는 스크린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리고 오직 가사만 보고 노래를 불렀다. 뒤에 있는 관객은 잊고 가사 속으로 빠져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일 절이 끝나자마자 태훈이가 그녀의 등짝을 후려쳤다.

 “야이, 내숭아, 잘만 하면서 못한다. 못한다. 엄살을 떨어?”

 태훈이는 그녀의 노래 소리를 따라 앗싸, 앗싸, 춤을 추고 방방 뛰고 난리 법석을 떨었다. 그의 응원이 힘이 되었던 것일까? 그녀는 쿵짝, 쿵짝, 가락을 탔고 어깨를 흔들며 목청을 뽑았다. 그 사이 태훈이는 맥주 캔을 따서 원샷을 외쳤다. 원샷 못하는 사람이 남은 시간 내내 불러야 한다고 맘대로 정하고는 꿀떡 꿀떡 마시는 것이었다. 40분 내내 혼자서 노래 부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코를 쥐고는 목구멍으로 맥주를 콸콸 부어버렸다. 

 무엇이 그녀의 부끄러움을 지워버렸는지 아무도 모른다. 태훈이의 격려가 그랬는지, 신명이 그랬는지, 맥주가 그랬는지……. 아마 그 모든 것이 한데 어울려 그녀를 무등 태웠을 것이다. 그녀는 목소리를 끌어와 있는 대로 소리를 질렀다. 소리가 한 단계 더 높아지자 가슴속에서 펑 소리가 났다. 아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타이어 펑크 소리보다 더 크게 펑펑 터지고 뻐엉 뚫려버렸다. 노래를 부르면 부를수록 누군가가 멀어져 가고, 노래를 부르면 부를수록 두려움과 공포가 저 아래로 밀려 내려갔다. 그래서 계속 불렀다. 장장 세 시간 동안 아는 노래란 노래를 모두 뽑아 불렀다.  

 기진맥진한데다 목이 잠겨 더는 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지친 거리를 쓸고 온 바람이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발걸음은 깃털보다 더 가벼웠고, 차량들의 경적소리는 말할 수 없이 경쾌했다. 

 “아, 시원해. 답답하던 속이 뻥 뚫렸어!”

 그녀가 진심으로 말했다. 태훈이가 동갑내기지만 존경어를 써야 할 만큼 훨씬 어른으로 보였다. 그녀는 진심을 다해 허리를 꺾고 감사하다는 표를 했다. 태훈이가 낄낄거렸다.  

 “그렇게 빽빽거리지 않았다면 너 데리고 정신과에 갔을 거야.”

 그 말에 그녀는 웃기 시작하더니 아예 주저앉아 길가는 사람들이 웬 미친 여자인가. 하고 뒤돌아보는데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정말 미친 것처럼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침까지 질질 흘리며 웃어대는 것이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웃어대던 그녀가 아픈 배를 쓸며 말했다.

 “나 심각했지. 진짜 심각했어. 앞으로도 좀 심각할 거야.”

 “그래. 네가 마음의 문을 닫은 게 일 이년은 아닐 테니 시간을 두고 천천히 열어가야지.”

 그렇게 말하며 태훈이는 앞장서 걸었다. 그녀는 그의 뒤를 좆으며 머리칼을 젖혀 땀에 젖은 목덜미를 식혔다. 4월의 밤바람은 사이다처럼 차갑고 싸한 맛이 났다.

 번잡한 대로에서 벗어나 천변길로 들어섰다. 바람에 버드나무 가지들이 솨르르 솨르르 머리채를 흔들었다.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그녀가 태훈이의 눈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여섯 살 때부터 계모와 살았다. 계모는 특별히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남편의 전처소생을 지독히 귀찮아했다. 그러다보니 함부로 말하고, 어리다고 무시하고, 간섭하고, 비난하고, 비웃고, 매를 들었다. 한 가지가 미우면 전부가 밉다는 속성을 알지 못하는 아이는 어떻게든 계모의 눈에 들어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미워하는 방법도 진화하는 것인지, 계모는 점점 그녀를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고,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는 게 다반사가 되었다. 재수 없는 것 정도는 별 말도 아니었다. 친모까지 조롱하고 모욕하다 직성이 풀리지 않으면 무자비하게 매질을 했다. 잘난 것도 없고 똑똑하지도 않은 천덕꾸러기는 변명하거나 대드는 건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녀는 되도록 몸을 작게 만들어 계모의 눈에 띄지 않아야 했다. 계모 뿐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고 철썩 같이 믿게 되었고, 벌레처럼 웅크리는데 익숙해졌다. 

 “누군가 나를 쳐다보면 불안해. 가슴이 쿵쿵 뛰면서 또 무슨 질책이 떨어질까 겁부터 나는 거야. 두려워. 사람이 너무 무섭고 두려워. 나는 태어나서부터 유약했대. 몸도 재빠르지 못했지만 마음도 여려 별 것 아닌 말에 눈물부터 글썽거렸대. 그러니 누가 날 예뻐하겠어.”

 그녀가 말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으려다 말았다. 그녀가 어깨를 떨며 울고 있었다. 그녀는 입을 꽉 다물고 참으려 했지만, 묵은 감정들을 실어내는 수로처럼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태훈이는 그녀를 데리고 천변 아래로 내려갔다. 태훈이가 그녀의 두 팔을 잡고 말했다. 

 “지금 울지 않으면 나쁜 기억들이 또 다시 너를 붙잡을 거야. 여긴 아무도 없어. 나도 없어! 너 혼자 있어!”

 눈물범벅이 된 그녀는 태훈이의 눈길을 피했다. 태훈이는 그녀의 팔을 놓고 천변 위로 올라가버렸다. 풀들이 앞뒤로 술렁이며 그녀의 기억들을 일깨웠다. 늘 숨 죽여 울던 아이, 그 아이의 입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흑백 사진 속 어린 그녀가 꺼억꺼억 오래된 울음을 토해냈다. 단발머리 소녀가 상처의 핏물을 눈물로 쏟아냈다, 가슴 봉긋한 숙녀가 멍든 가슴을 움켜쥐고 엉엉 소리 내며 울었다. 크고 작은 서러움은 가시처럼 촘촘히 박혀 있었고, 영원히 가시지 않을 멍 빛으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누구부터 원망해야 할 지 몰라 꺼이꺼이 울었다. 수많은 것들이 서러움의 둑을 타고 넘어와 그녀 앞에서 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두려움에게 갉아 먹힐 대로 갉아 먹힌 마음속에 남은 것은 눈물뿐이라는 듯 끝도 없이 흘러 나왔다. 그녀는 이미 지난 시간, 나쁜 기억들은 눈물 따라 다 내려가라고 빌면서 울었다. 멀리 떠나 다시는 내게 오지 말라고 부탁하며 울었다. 강을 쓸고 온 바람이 세차게 버드나무 가지들을 흔들었고 그녀의 울음소리를 쓸어갔다.

 눈물이 그치자 가슴 속이 후련하고 후련했다. 그녀는 휴지를 꺼내 코를 팽 풀었다. 다리가 휘청거려 일어서지 못하자 태훈이가 뛰어 내려왔다.   

 “추울 거야. 힘들어도 가만히 있어.”

 태훈이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남방셔츠를 벌려 그녀를 감싸 안고 두 팔로 그녀의 머리와 등을 덮어 완전한 안정에 잠기도록 해주었다. 

 그녀는 사람의 품이 또 다른 문이고 길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에게도 다른 사람의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오고, 두려움 없이 들어가고 햇살 환한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을지, 지금이 그 기회인지……. 그녀는 헷갈렸고, 또 이렇게 홀가분한 기분은 처음이라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미안해. 난리를 피워서. 그런데 넌 진짜 내 속을 되게 잘 아는 것 같아.”

 “아주 잘 한 거야. 내 속이 다 시원해.”

 태훈이가 그녀의 볼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을 이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으면 네가 아주 편안해 하더라. 그걸 보고 네가 마음을 꼭 닫고 있다는 걸 알았지.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걸 볼 때마다 내 속이 상했지만.”

 “사람들은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말하잖아. 난 그 말이 참 듣기 싫었어. 누군들 마음의 문을 열고 싶지 않겠어? 문을 닫고 있는 게 얼마나 답답하고 미칠 노릇인데. 그렇지만 마음 문 앞에 떡 버티고 있는 집채만 한 바윗덩이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있는 거라고. 안에서 아무리 밀어도 꼼짝도 하지 않는 무게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마음 안에 갇히고 마는 거야.”

 “그래, 그렇게 갇혀 있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짜증나는 일도 없지. 그래서 너를 안 쳐다보려고 했다. 넌 일 맡기고 내버려두면 잘 하고 간섭하면 당장 움츠러들어 망치잖아. 그게 진짜 어이없기도 하고 마음도 짠하고……”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민망해 하는 웃음에 답하듯이 태훈이가 말했다.

 “내가 작년에 교양과목으로 ‘사랑의 이해’를 들었잖아. 그때 교수님은 무엇보다도 상대를 있는 그대로를 봐야 한다고 했는데, 넌 보고 있는 자체가 괴로움이었어. 그때마다 내가 이만큼 괴로울 때, 넌 얼마나 힘들까? 생각해보았지. 무엇이 너를 힘들게 하는 걸까? 태생적인 문제인가? 외부적인 영향인가? 아무리 살펴봐도 알 수 없었어. 너하고 말을 나누어 보면 어떨까도 생각했는데 일치감치 접었지. 넌 나와 눈만 마주쳐도 화들짝 놀라거나, 달아날 자세부터 취했으니까.”

 “그래도 동아리에 가면 편하고 좋았어. 모두 좋은 사람들이고 적당히 게을러서 관심도 별로 주지 않고. 처음으로 가슴 펴고 있었던 곳이야. 그리고 거기서 널 만났고.”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우정은 이렇게 알아주고 감싸주는 것이라지만, 큰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답답했다. 태훈이가 물기어린 그녀의 눈가를 두 손으로 쓸어 주었다. 

 “우리 아빠는 무소불위의 군주였어. 엄마와 나, 내 동생은 불쌍한 백성이었고. 아빠가 현관문 안으로 들어오고 문이 철컥 닫히는 소리가 들리면 우리 마음도 덜컥 떨어져 내렸어. 아빠의 비위를 거슬렀다간 곧바로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덮쳐오니까. 아빠는 식사를 하다 비위가 상하면 그대로 식탁을 뒤엎었는데, 그릇들을 서너 달 만에 새 것으로 교체할 정도였지. 그러다 학군 핑계를 대고 엄마는 나와 내 동생을 데리고 이 도시로 왔는데, 이 년 만에 아빠까지 따라와서 또다시 그 숨 막히는 삶이 이어졌어. 그러다 난 고등학교 입학과 함께 기숙사에서 살게 되었어. 무자비한 권력을 벗어난 기분, 너 알지? 정말 살 것 같았어. 그런데 한 달 두 달 지나자 엄마와 동생이 걱정되어 학교에 있을 수가 없는 거야. 무단외출을 여러 번하다 좆겨날 지경이 되었을 때, 상담 선생님한테 사실을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했어. 내 성적은 바닥을 기다 못해 맨 끝에서 달랑거리고 있었지. 상담 선생님이 아빠와 만났을 때 내 성적표를 보여주었어. 아빠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그랬다며 선생님께 주먹을 날렸어. 학교가 발칵 뒤집혀졌고, 선생님은 경찰을 부르겠다고 했어. 아빠는 더는 화를 내지 않았어. 상담 선생님은 아빠한테 경찰서에 가든지 상담을 받든지 결정을 하라고 밀어붙였어. 아빠는 어쩔 수 없이 상담을 받았어. 그리고 아빠는 모든 문제가 자신의 폭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억지로라도 인정했어. 그런 후 상담 선생님의 강압으로 우리 가족은 모두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되었지.

 치료 중에 서로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털어놓는 시간이 있었어. 마음에 맺혀 있는 걸 풀어야만 상처가 치료되기 때문에 꼭 필요한 일이래. 아빠와 둘이 마주 앉았을 때, 그리고 아빠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을 때, 내 속에서 그 동안의 상처들로 만들어진 폭탄이 터져버렸어. 아빠가 나에게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안도를 했는지, 아빠한테 막 소리를 지르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의자도 산산조각이 날 때까지 발로 차고 부숴버렸어. 그냥 한마디로 미친놈이었지.  

 마음의 상처는 신체의 상처와는 달라 풀어내지 않으면 치료가 안 되는 거래. 그냥 시간을 따라 아래로 가라앉아 있을 뿐인데, 누군가 건들면 금세 수면 위로 올라오고, 통증에 통증이 더해져 더 예민하게 구는 거라잖아. 마음의 병은 자연치유라는 게 거의 없대. 득도 하지 않는 이상은 털어놓든 싸워서 풀든 풀어내야 하는 거래. 

 사람의 마음이란 마치 벗겨놓은 피부와 같으니까. 그 때문에 바람이 조금 세게 불어도 쓰라림을 느끼지. 별 거 아닌 말에도 상처 받고, 조금만 위협을 하면 겁을 집어먹으며 상처 받는 거야. 그러나 태어났을 때부터 부모와 주변 사람들한테 안정적인 사랑을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마음 보호가 잘 되어 있는 거래. 작고 여린 마음을 계속적으로 어루만지며 사랑의 말을 들려주고 온갖 사랑을 쏟아 부어주면 마음이 쿠션처럼 부드러워 진대. 어떤 상처가 스며들어도 마음의 쿠션이 어느 정도 막아주고, 괴로운 충격도 얼마간 흡수해버린다는 거야. 그러니 자라는 게 얼마나 신나겠어. 아쉽게도 우린 그 기회를 놓친 거고. 

 그래도 괜찮아. 선생님은 괜찮다고 하셨어. 뒤늦게라도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감싸면 되는 거래.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내 마음을 감싸주면 좋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위로하고 감싸주면 된다고 하셨어. 왜냐하면 성년이란 그럴만한 힘이 있다는 뜻이니까. 그 말을 들은 뒤로 난 내 스스로 위로하고, 내 스스로를 감싸줘, 누군가 나를 괴롭힐 때면 나한테 말해. 그 놈 참 나쁜 놈이라고. 야이. 나쁜 놈아 그걸 말이라고 하냐? 고 혼자 소리치고는, 또 나한테 말해. 그까짓 것 별 거 아냐. 그 사람 일진이 안 좋았나? 뭐, 괜찮아. 난 그 정도엔 아무렇지도 않아. 그렇지? 당근이지. 라고 혼자 중얼 중얼거리지. 정신이상자처럼 보이겠지만.  

 네 마음에도 어떤 것, 그러니까 네 스스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두려움 같은 것이 너를 옥죄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너 혼자서는 깨고 나오지 못할 것 같았는데, 너한테 다가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어서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어. 내가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너랑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서. 그런데 오늘이 그날 일 줄은 몰랐네. 내가 얼마나 기쁜지 알아? 네가 고맙고 예뻐. 앞으로 잘 해 낼 거야. 너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또 주르르 흘러내렸다. 태훈이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훔쳐주며 말했다.   

 “울지 마. 네가 내 말을 이해해 주어서 고마워.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잘 아는 만큼 서로를 위로해주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하는데,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런데 너 나 안 싫지?”

 이걸 말이라고 하다니, 네가 싫었으면 아예 동아리방에도 안 갔을 거야. 네 눈길이 두려우면서도 절실했어. 너 때문에 더 열심히 한 거야.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었다. 밤하늘 소금빛 별들이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들어갈 시각을 놓치고 있었다.

 “태훈아”

 “말 해. 어떤 말이라도 다 들어줄게.”

 “내 마음을 짓누르던 바윗돌을 밀어내줘서 고마워. 그러나 난 한 번에 마음의 문을 완전히 열고 네 앞에 서지는 못할 거야. 앞으로도 바보 같이 굴고, 쭈뼛거리고, 작은 일에도 겁을 집어 먹을 거야. 그래도 너무 타박하지 말아줘. 한 발, 한 발 과거로부터 빠져나와 두려움도 버리고 쭈뼛거리는 것도 버리고 활발히 움직이도록 노력할게.”

 태훈이가 그녀를 깊이 품었다. 그리고 줄곧 우는 바람에 몹시 추웠을 그녀의 등을 오래오래 쓸어주었다.         그날 밤 이후로 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뻔뻔해졌다. 불안하게 궁궁 뛰는 가슴을 누르며 사람 눈을 보며 말하려고 애를 썼고, 농담에는 소리 내어 웃고, 웃는 중에 누군가와 눈을 마주쳐도 황급히 입을 다물지 않았다. 아침에 로션을 바르면서 거울 속의 자신을 똑바로 보며 “ 미영이 너 이제 괜찮아.” 라고 말하는 것도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태훈이가 언제나 응원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다. 혼자서 받아내던 비난, 세상천지 그 누구도 그녀 편이 아니라는 두려움, 절해고도에 서있던 그 끔찍하던 기분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왜 사람들은 빈 마음을 견디지 못 하는가? 마음이란 채워지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녀와 그는 서로의 마음으로 들어갔고 서로를 채웠다. 그와 그녀는 서로에게 마음 가득한 행복이 되었다. 서로의 얼굴만 떠올려도, 서로의 이름만 불러도, 서로 만나 손만 잡아도 벅차올랐다. 

 세상은 보물찾기의 숲이고 사랑은 숲속의 보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락도 없는 채 집을 나선다. 어떤 사람은 아침부터 두들겨 맞거나, 마음에 두려움이 꾹꾹 눌러진 채로 거친 숲으로 간다. 어느 날, 숲 속 어느 귀퉁이에 있던 나무 밑동을 뒤지다 보물종이를 찾아낸다.  또 돌 틈에 끼어져 있던 보물을 한 장 찾아 낸 후 모든 괴로움을 한꺼번에 날려버린다. 숲 곳곳에 숨겨져 있는 사랑이란 보물만 찾으면 칙칙하고 거칠던 숲 전체가 환하게 깨어난다.  

 그녀는 그것을 얻었고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아꼈다. 서로 그 힘을 나누어 자신들의 연약한 부분을 메우고 덧입혔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어제도 그녀는 대형마트에서 눈치껏 끼어들던 새치기맨에게 그러지 마시라고 빤빤한 얼굴로 말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예요. 그리고 그녀는 지금 당신 앞에 있어요.”

 여자가 말했다. 

 “당신이 그녀라고요?”

 부루가 깜짝 놀라 물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그녀 일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실망할까봐 짐짓 놀랐다는 듯이 물었던 것이다. 

 “맞아요. 내가 바로 그녀예요.”

 여자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여자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깜짝 놀란 표정을 한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그 표정이 얼마나 익살맞은지 여자는 소리를 내 웃었다. 잠시 후 여자가 말했다.

 “시건방진 생각이겠지만 혹시라도 내 이야기가 필요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만약 우리처럼 마음 다친 사람들끼리 만났다면 서로의 상처 위에 따뜻한 손을 얹고 진심으로 매만져주라고 말해 주세요. 서로의 상처를 매만져주는 일이 두 사람을 얼마나 열렬하게 만드는지 경험하기 전에는 모르니까요.”  

 당연하지요. 사람이란 나를 알고 이해해주는 이에게 뜨거워 질 수밖에 없는 존재니까요. 부루는 이 말을 삼키고는, 맞아요. 맞아요. 맞장구만 쳤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봄바람이 낮게 휘파람 소리를 냈다. 

 긴 이야기를 하느라 목이 잠긴 여자는 잔기침을 몇 번 하고는 오른쪽 벽에 어린 남자의 모습을 향해 허리를 굽혀 공손히 인사를 한 후 문 밖으로 나갔다. 언덕을 내려가는 그녀의 걸음걸이가 얼마나 총총했는지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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