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째 이야기- 유혹은 아름다워
넝쿨장미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유월의 한낮, 대로가 두루치기 식당에서 나온 남자는 이쑤시개로 아랫니 사이를 후비며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이내 왁스 바른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긴 남자는 이쑤시개를 내던졌다. 산 아래 보건소로 전근 왔을 때, 제일 먼저 깡통집 소문부터 들었다. 모두 입을 모아 깡통이 사람처럼 말을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고, 주제넘게 연애 상담까지 한다고 비죽거렸다. 그러면서 모두 틈만 나면 언덕으로 올라가 깡통집 안을 기웃거렸다.
깡통집은 멀리서 바라보던 것보다 더 우스꽝스러웠다. 싸구려 도료는 강렬한 햇빛을 견디지 못하고 비듬처럼 벗겨져 내리고 돌에 맞았는지 허리께는 움푹 들어가 있었다. 그는 셔츠깃을 한번 흔들어 바람을 들인 후 깡통집의 위아래를 훑고는 유리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문에 얼굴을 들이밀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바늘 끝 같은 직사광선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듯, 문은 살짝 떨기까지 하며 재촉했다. 살짝 놀란 남자는 고개를 빼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겁을 집어 먹을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백번 안심해도 좋을 만큼 쾌적하고 심플한 실내가 눈길을 끌었다.
“흐음, 안팎이 천지 차이군.”
“자동 청소 기능을 갖추었거든.”
정감 있는 목소리에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바지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손을 빼 턱을 문질렀다.
“점심 먹고 졸려서 좀 걷다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고 말을 이어가야 할 지 몰라 연신 턱을 문질러댔다. 통상적인 기계음이 아니라 익숙한 남성의 목소리라서 좀 놀랬는데, 투명인간이 곁에서 나불대는 것 같았다.
“요즘 춘곤증이 심하지. 졸리면 좀 자도 돼.”
다정한 목소리에 남자는 자신이 평소와 다르게 박력을 잃었다고 생각하며 소파에 앉았다. 소파의 등받이가 뒤로 젖혀졌다. 덩달아 뒤로 누운 남자는 발까지 길게 벋으며 기지개를 켰다. 포만감 때문에 눈꺼풀이 무겁던 차였다. 소파의 쿠션은 장난이 아니었다. 마치 부드러운 팔에 안겨 있는 느낌이었고 짜릿한 흥분까지 밀려들었다.
“마치 유혹당하는 것 같군.”
남자의 혼잣말에 부루는 대꾸하지 않았다. 남자는 투명인간의 맞장구가 필요한지 계속 중얼거렸다.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 몽롱하다는 둥, 뼈까지 녹아드는 것 같다는 둥, 깃털 애무는 저리 가라는 둥 횡설수설 하더니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유혹은 사랑과 일맥상통한다던데, 설마 날 사랑하는 건 아니겠지.”
“사랑? 게다가 일맥상통해? 흐흐흐, 함부로 상통하다 개골창에 처박히지나 말아.”
웃음소리가 싸늘하게 등골을 훑었지만 남자는 따라 웃으며 더욱 깊숙이 엉덩이를 밀었다. 몸의 움직임을 따라 소파도 움직였고, 부분 부분 부드러움의 강도가 달랐다. 손맛 좋은 황제 마사지는 저리 가라였다. 소파의 면면이 더 부드럽게 만지고 쥐는 느낌이에 남자는 직장에 전화를 해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핑계를 대고 한나절 휴가를 내버릴까, 생각까지 했다. 눈꺼풀이 자동 덮개처럼 내려앉았고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해고 한다는 경고를 들어도 어쩌지 못할 만큼 늘어졌다. 남자가 중얼거렸다.
“왜 나에게 이런 호사를 누리게 하…지? 내…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 날 진짜 사랑하냐고…”
“사랑이란 말을 오해하고 있군.”
부루가 힐난조로 대꾸했다.
“이 느낌은 사랑의 달콤함 외엔 달리 설명할 수가 없어……”
“이봐,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정신 차리라고. 사랑과 유혹은 이웃에 살고 있고, 까닥 목례를 하며 아는 체 하는 사이지만 결코 우의를 도모하는 관계는 아니란 말이야. 사랑의 농담 중에 유혹이 끼어들긴 해도 진담에는 자리가 없다는 걸 알아야지. 사랑과 유혹의 혓바닥은 근본부터 다르단 말이야!”
“다르면서 같지, 같으면서 다르고. 둘 다 짜릿하게 아름답다는 걸 인정하라고.”
남자는 낄낄거리며 이런 기분 오랜만이라며, 조금 더 깊숙이 당해보고 싶다고 소파 속으로 파고들었다. 남자의 두 팔이 바닥으로 늘어졌고, 동시에 그는 까무룩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의 뇌는 이내 어떤 영상에 홀렸고 빠른 속도로 좆아갔다.
그의 눈앞에 별이 빽빽이 돋은 우주 어느 지점이 폭발하듯 싯푸르게 펼쳐졌다. 곧이어 ‘가이아 셀의 라파시’란 타이틀과 함께 빽빽이 우거진 숲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는 짧게 신음을 내뱉고는 어깨를 내려 조금 더 편안한 자세를 유지했다.
가이아 셀 대륙은 지금으로부터 3700여 년 전 떠돌이 마법사인 펠로리 달무니가 발견했다. 달무니는 작지만 살아가기에 퍽 알맞은 이 대륙을 대지의 세포, 즉 끝없는 대지의 작은 조각이란 뜻으로 가이아 셀이라고 불렀으나 오늘날에는 달무니 대륙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라파시는 달무니 대륙의 동남쪽에 있었다. 달무니 대륙의 모든 나라들이 그렇듯 라파시 또한 여러 가지 마법이 생활의 주요 수단이었다. 마법을 이용하여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했며, 주문으로 생활 도구를 움직이며 편리를 도모했다. 학교에서도 마법은 중요한 과목이었으며 교육의 기본 도구는 마법적인 것이 주를 이루었다.
라파시의 초·중·고교 과정에 있는 아이들은 일주일에 한번 다 함께 모여 광장수업을 했다. 케이룬(독수리처럼 생겼으나 털이 훨씬 북실북실한 라파시의 새)이 쪼아대는 광장 입구를 미끄러져 들어가 마음껏 떠들고 뛰는 일은 신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광장수업 선생이 나타날 때까지 광장을 뛰어 다니며 서로 마법을 겨루고 선배들에게서 여러 가지 마법을 배웠다.
광장수업 시작 나팔이 울렸다. 광장 위 제트기류 식물 위로 지저분한 에드벌룬 같은 부언트가 나타나자 아이들이 한 목소리로 외쳐 불렀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부 부언트!
부 부언트!
부언트는 애드벌룬처럼 커다란 몸통에다 얼굴 한가운데를 길게 꿰맸고, (그 통에 코가 사라져버렸는지) 코처럼 생긴 것은 아예 없고, 아래턱 전체가 입이며, 이마 아래 두 개의 짝짝이 눈깔이 뒹울거렸다. 그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기겁을 하며 징그럽다고 하는데 그는 천의 얼굴을 가졌기 때문에 그 모습만으로는 무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부언트는 라파시 전체를 통틀어 가장 괴팍하고 세심한 마법사였다. 부언트는 광장으로 몰려드는 학생들을 보며 “돌대가리들이 몰려온다.”고 막말을 하는데, 책상 앞에서 배운 이론은 꽉꽉 굳는 성질이 있어 까닥하단 머리통을 돌멩이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는 써먹지 않으려면 생고생하며 배우지 말고 그냥 자빠져 낮잠이나 퍼 자라고 했다. 그의 수업은 실전에 가장 가까웠고 야멸차고 흥미로웠다. 어른들은 혀를 차며 부언트를 비난했지만 아이들은 깨지고 욕먹고 얻어터지는 광장 수업을 기다렸다.
부언트가 쇳소리를 지르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 끝을 따라 쇳물빛 용비늘을 쏟아져 내렸다. 어른 손바닥만한 크기에 앞쪽이 오므려져 있는 얇은 접시였다. 공중으로 뛰어 오른 아이들은 용비늘을 잡아 안쪽으로 발을 밀어 넣고 공중을 박차고 나아갔다. 아이들이 모두 공중을 밀며 달리자 부언트는 카악, 구름을 뱉어 문장을 만들었다.
‘유혹은 아름답다.’
지난 시간부터 이어진 주제였다. 부언트는 유별나게 이 주제에 집착했다. 아직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여덟, 아홉 살 아이들과 훌쩍하게 큰 열일곱, 열여덟의 청년들을 가리지 않고 유혹이 무엇인지 설명하게 했다. 유혹을 다스릴 줄 알면 가장 강한 무기를 가진 거나 마찬가지라며 그 무엇보다 강조했던 것이다.
부언트가 목쉰 소리로 말했다. 유혹은 세상의 필요악이라고. 그것을 사용해야 하는 사람이 있고, 그것에 당하지 말아야 하는 사람이 있는 만큼 결코 사라질 수 없는 단어라고 했다.
“유혹 없는 삶은 지루해서 견디지 못할 걸? 유혹은 지루한 인생을 위해 과장된 날갯짓을 하는데 그것처럼 아름다운 건 없지. 눈알이 있는 놈이라면 그 몸짓을 거부하지 못한다고. 세상에 그보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건 없으니까. 여자든 남자든, 나이가 들었든 어리든 누구라도 유혹 앞에서는 날개를 접은 벌처럼 부르르 떨지. 난 유혹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기교라고 부르겠다. 휘야닌 이쪽으로 와라.”
부언트가 지팡이를 들어 올려 한 아이를 불렀다. 보름달처럼 둥근 볼을 가진 여덟 살 쯤 된 여자아이가 수줍게 웃으며 부언트 앞으로 다가갔다.
“휘야닌, 학교 공부를 일주일 동안 안 하는 대신 푸푸히 백 개를 주겠다면 어떻게 할래?”
와우! 아이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학교 공부를 일주일씩이나 하지 않는다니! 거기다 푸푸히 백 개를 상품으로 얹어준단 말이야?
푸푸히는 라파시에서 가장 맛있는 과일이다. 얇은 껍질에 쌓인 푸푸히는 생크림처럼 부드러우며 입에 넣는 순간 화하니 터지는데 온 몸이 찌릿찌릿할 정도로 행복한 기분이 들고 단 한 개만 먹어도 한 끼의 식사가 되는 최고급 열매였다. 휘야닌과 아이들은 침부터 꿀꺽 삼켰다. 푸푸히란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고였고 먹고 싶은 마음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밀려들었다. 휘야닌은 마른 입술을 핥는 아이들을 보며 대답을 망설였다. 분명히 부언트는 푸푸히 백 개를 준비해놓고 휘야닌을 떠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휘야닌이 부언트가 원하는 대로 대답을 하면 푸푸히 백 개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깡그리 뭉개져 버릴 것이고, 아이들이 원하는 대답을 하면 푸푸히를 나눠 먹는 대신 그에 따른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배운 대로 하지 않았으니까.
휘야닌은 부언트를 보며 우물거렸다. 부언트와 아이들은 귀를 기울였다. 무어라고 하는 것 같은데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휘야닌 조금 더 크게 말해야지. 언니 오빠들의 귀가 유혹의 구름에 꽉 막혀 버렸으니까.”
부언트가 말했다. 휘야닌은 부언트를 올려다보다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학교 수업도 하지 않고 푸푸히를 실컷 먹고 난 다음에 제가 해야 하는 일은 뭔데요? 세상에 거저 주는 선물은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제가 선생님께 보답해야 하는 건 무엇인가요? 그것은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부언트는 두 개의 눈알을 부지런히 굴리며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부언트의 입만 주시했다. 부언트가 들쑥날쑥한 이빨을 툭 떨어뜨리고 두 개의 눈을 휘야닌에게로 모았다.
“오, 휘야닌. 넌 역시 똑똑하구나. 오, 내 사랑스런 제자야. 너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건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거란다. 그래, 그래. 휘야닌, 네 말대로 부모가 아닌 이상, 부모와 같은 사랑을 가지지 않은 이상, 또 친분이 깊지 않은 이상 거저 주는 건 없단다. 공부 시간에 실컷 뛰어놀게 하고 푸푸히를 배가 터지도록 먹인 다음엔 당연히 팔아먹어야지. 그런 유혹도 거절하지 못하는 돌대가리들은 팡무치(고슴도치의 사촌 쯤 되는 라파시의 동물)처럼 흙이나 파고 씨앗이나 심어야 해!”
부언트의 독설은 계속 되었다.
“유혹에 지는 놈은 미친놈이다. 왜냐하면 유혹은 파멸과 가장 가까운 관계니까. 그러나 파멸을 즐기고 싶다면 마음껏 유혹 당하도록!”
부언트가 다시 지팡이를 흔들자 깃털구름들이 낄낄거리며 곤두박질을 치다 치솟아 오르며 자유를 만끽했고, 또 익숙한 웃음소리를 내며 아이들의 귓불을 스치고 귓속으로 꼬리를 들이밀다 빠져나갔다. 청년들은 금세 얼굴이 발개지는 반면 어린 아이들은 간지러운 귀를 문지르며 깔깔댔다.
그 모습을 보며 부언트가 이빨을 딱딱거리며 말했다.
“아름다움은 진리다. 모든 것을 누르고 군림할 수 있는 힘이 거기에 있다. 보는 자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정을 화산처럼 타오르게 하며, 그것만이 세상의 모든 것 인양 호도하게 만든다. 아름다움은 눈동자의 설렘이며 피톨의 질주이며 삶의 향유다. 그러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즐기되 냉정해야 하고, 아름다움을 쫒되 이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말을 마친 부언트가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냈다.
“자, 모자가 내려올 시간이다. 오늘은 한 놈도 걸리지 않기를 바란다마는 그런 일은 없을테지.”
부언트가 두 개의 눈알을 뒹울거리며 주문을 외웠다. 주문과 함께 지팡이를 들어 힘차게 휘둘렀다.
햇볕이 쨍쨍한 가운데 한낮의 우산처럼 모자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흰 깃털과 진주구슬로 풍성히 장식된 챙이 넓은 모자와 가장자리에 연둣빛 바이어스를 대고 리본으로 장식한 연노랑 모자, 아이보리 레이스 모자, 보라색 프릴모자, 검은색 페도라, 사자 갈기 모자, 상어 이빨 선캡, 도깨비 뿔 벙거지, 여자 모자, 남자 모자 등, 한번쯤 쓰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드는 모자들이 내려와 아이들 눈앞에서 하늘거렸다.
아이들은 모자를 바라보며 손을 꼼지락거렸고, 부언트는 차갑게 내뱉었다.
“쓰고 싶다면 써도 돼. 마음대로 쓰라구!”
사자갈기 모자가 용맹한 바람을 달고 날아와 뚱뚱한 아이들의 볼을 간질이고 머리에 비벼댔다. 그러나 아이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이 눈길도 주지 않았다. 모자들은 공중을 떠돌며 아이들의 머리 위로 내려앉을 기회만 엿보았다. 햇살은 바늘 끝처럼 따가웠고 그늘이 몹시 필요했다. 빙그르르 돌던 상어이빨 선캡이 이빨을 딱딱거리며 비쩍 마른 아이의 머리통으로 곤두박질을 쳤다.
부언트가 또 주의를 주었다.
“모자를 쓰는 순간, 값을 톡톡히 치를 것이야!”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아이는 상어이빨 선캡을 잡아 썼고, 아악, 소리와 함께 아이는 그대로 사라지고 철창문 닫히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처음으로 이 수업을 시작할 때, 부언트는 입이 닳아지도록 주의를 주었다. 아무리 갖고 싶어도 절대로 손대지 말아야 하는 게 있는데, 그것이 바로 ‘부언트의 모자’라고 말이다. 모자가 아무리 근사하게 보여도 쓰지 말고, 태양빛에 머리가 지글지글 타올라도 쓰지 말라고 했다. 모자가 달콤하게 속삭여도 쓰지 말고, 수없이 윙크해도 쓰지 말고, 미친듯이 좆아와도 쓰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심지어 모자가 머리털을 뽑아버려도 쓰지 말라고 발까지 굴리며 말했다. 그리고 그 자신이 공중을 둥둥 떠다니는 모자를 잡아 쓰고는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곧바로 철창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부언트의 목쉰 비명이 들렸는데, 철창에 갇힌 부언트가 광장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주의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모자를 탐내고, 모자를 쓰게 되었고, 모자를 쓰자마자 곧바로 부언트의 철창에 갇혔다. 그때마다 부언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아이를 농장주들에게 팔아버렸다. 아이의 나이와 체격에 따라 값이 매겨지고 팔린 아이는 일주일 동안 농장 일을 도와야 했다.
어느 사이 부언트는 사라져버렸다. 햇살이 어찌나 뜨거운지, 뒤집어진 화롯불이 쏟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머리 위를 떠다니는 모자를 보았다. 그래도 부언트의 말을 생각하고 꾹 참았다. 그러나 더 쨍쨍해지자 어쩔 수 없었다. 한 명, 또 한 명이 더는 참지 못하고 모자를 끌어당겨 쓰자마자 새된 비명과 함께 철창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잘했다! 그래야지. 그래야 부언트의 학생들이지. 내가 너희들을 그렇게 가르쳤으니 다 내 잘못이다!”
언제 나타났는지 부언트가 소리를 지르고 욕을 퍼부어댔다.
아직 황금깃털모자도 내려오지 않았는데, 벌써 정신을 잃었냐는 것이었다. 정신은 파는 게 아니라 지키는데 의미가 있다고 수백 번을 말해주어도 못 알아듣냐며 펄펄 뛰었다.
“그래, 그래, 지킬 수 없으면 일치감치 팔아먹어야지. 그래, 그래.”
부언트가 주문을 외우고 지팡이로 한 곳을 가리키자 산들바람과 함께 황금깃털모자가 내려왔다. 휘황찬란한 빛에 싸인 모자는 눈이 부셔 차마 마주볼 수 없었다. 황금빛 깃털모자가 우아하게 공중을 누볐다. 아이들은 환호하며 황금깃털모자를 향해 손을 벋었다. 서로 먼저 모자를 잡겠다고 아우성을 치며 용비늘을 밀고 깡충깡충 뛰어 올랐다.
부언트의 지팡이가 다시 한 번 공기를 가르자 호야드의 괴성이 공중을 뒤흔들었다. 두 날개를 펄럭이며 나타난 호야드가 끽끽거리며 목을 길게 뺐다. 황금깃털모자가 부드러운 몸짓으로 날아와 호야드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수한 황금빛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이들은 얼이 빠진 채 호야드와 황금깃털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호야드의 날카로운 부리가 깃털을 향해 벌어지고 있었다. 호야드가 몸을 돌려 황금깃털 모자를 지나치는가 싶었는데 순간, 발톱을 벌린 호야드는 황금깃털모자를 움켜잡더니 무자비하게도 짝짝 찢어버렸다.
아, 아이들은 실망에 차 탄식을 내뱉었다. 부언트는 실망하다 못해 투덜거리는 녀석들의 머리통에 지팡이를 날렸다. 딱, 딱, 딱, 딱! 소리가 연이어 울리고 아이들은 부언트를 피해 달아났다. 그러나 지팡이는 저 혼자 날아가 불만에 찬 녀석들을 가차없이 후려쳤다.
“왜 아까워! 네 거야! 네가 땀 흘리고 고생해서 만든 거야? 네가 황금깃털을 낳으려고 무진장 고통을 당했어! 황금 깃털은 호야드 거야. 호야드가 애써서 한 점 한 점 만든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호야드만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너희들은 욕심내지 마! 터럭 한 올도 만지지 마란 말이야!”
부언트가 소리를 질렀다.
“욕심이 무모한 짓을 저지르지. 무모한 짓을 저지른다고!”
길길이 뛰는 부언트의 겨드랑이에 호야드가 부리를 문질렀다. 부언트가 서글픈 표정으로 호야드의 머리통을 껴안았다. 북쪽의 검은 무늬 바위에 둥지를 틀고 있는 호야드의 겨드랑이는 황금빛 깃털로 이루어져 있고, 부언트의 황금깃털모자는 호야드의 겨드랑이 깃털로 만든 것이었다. 호야드가 날개를 펄럭이자 털이 모조리 뽑힌 상처투성이 겨드랑이가 드러났다. 깃털 한 점을 뽑을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왔고, 모자 한 개를 만들고 나자 아예 누더기처럼 너덜 너덜거리게 된 것이었다. 호야드가 꿰에에엑 꿰에에에에엑… 구슬픈 소리로 울었다.
부언트는 공중을 향해 다시 지팡이를 휘둘렀다. 화려한 빛을 뿌리며 황금깃털모자가 다시 내려왔다. 아이들은 일제히 탄성을 지르며 용비늘을 밀었다. 또 다시 부언트의 지팡이가 아이들을 갈겼다.
“그냥 봐. 보라고! 황금깃털모자를 보고 그저 즐거워하란 말이다! 가지려고만 하지 말고. 보고 즐기란 말이다! 황금 깃털 모자는 한 개 뿐이라서 한 사람 밖에 가질 수 없다. 그러니까 욕심내지 않으면 모두 보고 즐길 수 있다! 함께 놀 수 있다. 모두 함께 즐거울 있다고! 모쪼록 아무도 황금깃털모자에게 잡혀 먹지 않기를 바란다!”
부언트는 호야드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등에 훌쩍 올라타더니 사라져버렸다.
모자의 왕이자 여왕인 황금깃털모자는 햇빛을 받아 순금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서로의 눈치를 보던 아이들은 어느 순간, 모자만을 바라보게 되었고, 모두 함성을 지르며 모자를 향해 달려갔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부여받은 듯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자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으며 어느 누구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왕관보다 화려하고 위엄에 차 있는 황금깃털모자가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유유히 지나갔다. 한 번도 사람의 손에 잡혀본 적이 없는 것처럼 아주 여유 있게.
그것이 아이들을 참지 못하게 했다. 부언트의 주의는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매번 날카로운 주의를 듣고도 매번 아수라장을 만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황금깃털모자는 결코 뿌리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결과가 어떻든 간에 지금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오직 바라는 것을 향해 달리는 건 인간의 특권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황금깃털모자는 만만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만큼 오만했고 오만한 만큼 냉정했다. 아이들의 눈앞에서 살랑이다가도 누군가 박차를 가하며 좆으면 높이 떠올라버렸다. 손가락에 닿을 때에는 부드럽기 그지없으나 움켜쥐려고 하면 가시보다 더 날카롭게 변했다. 그것이 더욱 안달하게 만들었고 결국 모든 것을 팽개치고 달리게 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나이가 어릴수록 황금깃털모자에 시큰둥하고 나이가 많을수록 황금깃털모자에 열광했다.
날씬하고 예쁜 텐쟈는 빠르게 용비늘을 밀며 황금깃털모자를 좆았다. 조금 전에 깃털이 손에 닿았는데 그 느낌이 얼마나 매끄럽고 부드럽던지 갖고 싶다는 욕망이 미친듯이 끓어올라 견딜 수 없었다. 텐쟈는 외쳤다. “죽어도 좋으니 한번만, 딱 한번만!” 황금깃털모자를 써보지 못한다면 살았어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텐쟈는 있는 힘을 다해 황금깃털모자를 좆았다. 텐쟈가 광장 끝까지 좆아갔을 때, 모자가 방향을 틀어 텐쟈 앞으로 날아왔다. 날갯짓을 하듯 깃털을 까닥까닥거려 무수한 황금빛을 쏟아냈다. 아아, 그 모습에 모두 탄성을 질렀다. 텐쟈는 두 팔을 벋어 애걸했다. 내 모든 것을 걸어도 좋아! 한 번만, 단 한 번만 내게 와줘! 텐쟈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오직 바라는 건 황금깃털모자가 그녀의 머리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황금깃털 모자를 한번만 써보는 것이 그녀의 소원이었다.
그녀의 소원을 들은 것처럼 황금깃털모자가 천천히 내려와 텐쟈의 머리에 닿았다. 서늘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순간적인 두려움이 심장을 찔렀으나 황금깃털모자를 놓을 수 없었다. 얼마나 애태우다 잡은 것인지! 텐쟈는 덤벼드는 아이들을 피해 재빨리 모자를 눌러썼다. 텐쟈의 모습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답게 빛났다. 그렇잖아도 짙은 눈이 황금빛을 받자 보석처럼 반짝였고, 길게 이어지는 목선에 황홀한 금빛 채광이 드리워졌다.
오, 텐쟈!
남자애들은 눈알이 튀어나오고, 여자애들의 질투심엔 불이 붙었다. 사람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천상에서 내려 온 것처럼 텐쟈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휩싸여 있었다. 아이들은 용비늘을 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모두 입을 벌리고 텐쟈만 바라보았다. 텐쟈는 턱을 치켜들고 좌우를 바라보며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부언트가 이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할 지 몹시 궁금한 가운데 텐쟈는 용비늘을 신은 발을 앞으로 밀었다. 친구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길을 내주었다. 텐쟈가 두 발, 세 발, 네 발을 떼고, 다섯 발을 떼던 그 순간, 텐쟈는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듣지 못한 무시무시한 비명이 공중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이 이야기는 ‘트래블 터널’의 일부이다.’
이 자막을 끝으로 영상은 사라졌다. 남자는 흠칫 몸을 떨더니 눈을 번쩍 떴다.
“좀 잤나?”
부루가 소곤거리듯이 작게 물었다. 남자는 얼떨떨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다 벌떡 일어났다. 적어도 한 시간 이상 잔 것 같았고, 그렇다면 근무 시간을 훌쩍 넘겼을 것이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던 남자의 눈이 커졌다.
“꽤 잔 것 같았는데, 내가 여기에 들어 온 지 겨우 오 분 지났단 말이야?”
“어떤 곳에선 시간이 제 속도를 잊기도 한다더군.”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 휴대폰 시계가 고장 날리는 없고, 진짜 오 분 밖에 지나지 않았어?”
한편으로는 안심을 하고 한편으로는 잔뜩 의심하는 목소리로 남자가 덧붙였다.
“당신이 조작한 거였지. 그거 말이야.”
“조작이란 단어는 불쾌한 걸.”
“그러니까 당신이 내 머릿속에 영상을 집어넣은 거잖아?”
“굳이 따져서 어쩌자는 거야? 어쨌든 일맥상통의 흥분은 느꼈나 몰라?”
부루의 말에 남자가 투덜거렸다.
“알게 뭐야. 유혹이든 사랑이든 끝나기 전에는 모른다는 사실은 모르겠지.”
남자는 넓적한 손으로 목덜미를 몇 번 쓸고 셔츠 깃을 매만지고 안경을 밀어 올리며 서둘렀다.
“왜 한나절 휴가를 내지 않고.”
부루가 섭섭해 하며 말했다.
“무단결근은 징계감이야.”
남자는 단호히 말하곤 빠르게 문을 두드렸다. 이곳을 나서는 순간 시계바늘은 점심시간을 훌쩍 뛰어 넘어 단숨에 3시를 가리킬 지도 모른다. 문이 열리자 남자는 밖으로 나가 뒤도 안 돌아보고 빠른 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갔다. 시간을 확인하고 싶은 유혹을 참고 속도를 높여 뛰어가다시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