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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lief Apr 11. 2021

사랑이 폭풍처럼 몰려왔다 할지라도

아홉번째 이야기- 스르르 미끄러졌어, 사랑이라고 말해줘

 ‘음식물 반입자’가 또 포켓용 위스키를 꺼내 한 모금 마셨다. 부루의 못마땅해 하는 말이 들렸고, ‘음식물 반입자’가 뚜껑을 닫기도 전에 병이 손아귀에서 쏙 빠져나갔다.

 “어어, 이러지 마. 딱 두 모금 마셨다.”

 ‘음식물 반입자’라고 불리는 남자가 병을 따라 손을 벋으며 투덜거렸다. 원래 곱슬머리인지 아니면  파마머리인지 눈두덩까지 내려오는 웨이브머리를 입바람으로 푸, 불어 날리며 남자는 벽에 딱 붙은 병을 끌어내리려 애를 썼다.  

 “헛고생하지 마. 내가 순간접착제로 붙여버렸어.”

 “뭐야? 누구 맘대로 접착제를 써?”

 “난 음식 냄새가 딱 질색이라고 말했잖아. 그러면 호주머니 속에 가만히 모셔두었다가 이따 내려가면서 나발을 불든지 해야지. 또 마셔? 한번 봐주었으면 됐지. 더는 못 봐줘.”

 부루의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단호했다. 가끔 있는 일이긴 했지만, 주저리주저리 신세 한탄을 하다 가방이나 주머니를 뒤적여 먹을 걸 꺼낸다 싶으면 부루는 불을 다 꺼버리곤 했다. 방전 되었다는 핑계를 대고. 작동이 멈추면 오도가도 못하고 꼼짝없이 갇히게 될 거라고 겁을 주곤 문을 활짝 열고는 내쫒아버렸다. 음식 냄새는 그 어떤 것이라도 속을 메스껍게 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았는데 갈수록 심해지는 것으로 보아 어딘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부루가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오히려 목청을 높였다.

 “이봐, 이봐, 내가 얼마나 속이 타면 이 백주 대낮에 알콜의 힘을 빌리려고 했겠어?”

 남자는 속이라도 뒤집어 깔 것처럼 이마를 잔뜩 찡그리며 머리를 뒤로 젖혔다. 툭 튀어나온 울대뼈가 날카롭게 각을 이루고 있었다. 고집 깨나 있겠군. 부루는 속으로 혀를 찼다.  

 “흥, 용기는 제로이면서 사랑은 얻고 싶다 이거야? 두 말 할 필요도 없으니 그만 내려가지 그래.”

 “뭐야, 깡통집의 인도주의는 다 어디로 날린 거야. 난 지금 아주 심각하다고. 내 생애 처음으로 지독한 사랑에 빠졌다 이거야. 그런데 그녀가 받아 줄 동 말 동 하는 통에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리느라 진이 다 빠졌다고. 그냥 이대로 포기 할 수 없어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 내가 몇 시간을 달려 왔는지 알기나 해?” 

 “알았어. 알았어. 더 마시지 않는다고 약속해.”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고, 부루는 말을 이었다.

 “그래, 심각하지 않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겠지. 생애 처음으로 지독한 사랑에 푹 빠져 열락을 맛보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까. 어쨌든 뭐든 먹지 좀 마. 으으, 냄새 때문에 골치가 아파 죽겠어. 신경교란을 일으킬 정도라고. 그래, 내가 뭘 해주길 바라는 거야?”

 부루가 말에 남자의 표정이 금세 달라졌다. 

 “그녀가 나 좀 좋아하게 해줘.”

 “뭐? 그건 못해.”

 “왜?”

 “내가 네 마음을 떡 주무르듯 주물러대면 좋겠어? 내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왜 못해? 그까짓 것도 못해?”

 “그까짓 것을 갖고 넌 왜 그렇게 쩔쩔매는데?”

 “사람 마음을 어떻게 내 마음대로 움직여?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세상을 움직였겠다.”

 그러지 못해 분통이 터진다는 듯 남자는 팔을 쳐들어 흔들었다. 꽤 긴 시간 번민과 고뇌의 줄을 타본 사람답게 눈빛까지 희번득거리고 있었다. 한심한 작태라고 하기도 뭐하고, 이해해주자니 어리광이 지나치고……. 부루는 툭 까놓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난 사람이 만든 거야. 사람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 그러니 그 능력은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었다고. 그게 꼭 필요하면 어디 딴 데 가서 알아보든지.”

 부루의 쌀쌀맞은 말에 남자는 오만상을 찡그리더니 머리를 쥐어뜯었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져버렸다는 탄식을 끝없이 쏟아 놓는데, 깡통집 바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는 이 작자와 함께 날밤을 새울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부루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 놈의 사랑이 사람뿐 아니라 깡통로봇까지 잡게 생겼다. 어떻게든 빨리 좆아내야 하는데, 그렇다고 야멸차게 마법을 부려 내좆을 수도 없고…….  

 “얘기나 해봐. 속이라도 시원해지게 말이야.”

 부루가 달래듯이 속삭이자 남자는 또 다시 오만상을 찡그리더니 입술을 꽉 물었다. 떠올리는 것으로도 멀미가 인다는 표정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주구장창 쏟아놓기 위한 워밍업이었다. 남자가 쟈켓을 확 벗어부쳤다. 

 “지난겨울이었어. 너무 추워서 고추가 바짝 얼어붙어버린 날 그녀를 처음 만났지.”

 입을 여는 것만으로도 더운지 셔츠의 목덜미를 잡아 늘인 남자는 시간의 바퀴를 역주행 시켜 그녀를 만난 시점으로 돌아갔다.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휴일이었다. 꽤나 늦은 시간이었는데, 안양에 사는 친구가 오랜만에 강북에 왔다며 얼굴 좀 보자고 했다. 다운점퍼를 입었는데도 춥다고 느낄 만큼 대단한 날씨였다. 서둘러 지하철을 타고 홍대 입구로 갔다. 주말인데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술집마다 만원이었다. 탁자를 마주한 우리는 간만의 안부를 물을 사이도 없이 잔을 부딪쳤다. 처음에는 추위를 녹이려고 빨리 마셨고, 그 다음에는 속도를 늦출 수 없어 빨리 마셨다. 위치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우린 취했다. 그래도 대리기사는 잘 찾아와주었다. 그리고 내가 꼬부라진 혀로 발음한 일호 아파트 앞에 나를 내려주었다. 

 버스 정류장과 그 뒤로 늘어선 상가 건물들, 그리고 아파트 단지…. 내 발은 비틀거리면서도 기억을 따라 걷고 있었다. 201 동을 지나고 두 번째 동인 202동 오층에 우리 집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파트 앞에서 입구를 찾지 못해 허둥거렸다.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의 어디에도 입구가 없었다. 입구가 없으니 당연히 경비실도 없었다. 눈을 비비고 보니 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 아파트와 달리 주차장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잘못 들어온 것이다.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갔다.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버스 몇 대가 휙휙 지나갔다. 밤의 깊이를 실감나게 하는 속도였다. 나는 우선 의자에 앉아 정신을 가다듬었다. 눈을 세게 감았다 뜨고 머리를 흔들어 음주와 함께 퍼져버린 정신을 깨웠지만 원 상태로 돌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조금 있다 한 사람이 와 정류장 앞에 섰다.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감격이 일었다. 버스노선표는 어둠이 삼켜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턱이 다다닥닥 떨리기 시작했다. 기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빨리, 지체하지 말고, 알아봐야지! 내 속에서 무엇인가가 명령을 내렸다. 나는 발을 놀려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에게로 갔다. 가면서 드는 생각은 어어, 왜 이래. 왜 이렇게……. 그래도, 그래도, 물어봐야는데…… 라는 생각을 따라 발을 옮겼다.

 저어어어어………

 꽈당,

 나는 첫마디도 하지 못하고 미끄러져 그 사람, 아니 그 여자 위로 엎어졌다. 

 미끄러지면서 앞에 선 사람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다급히 잡았는데, 하필이면 그녀의 어깨 아래, 그러니까 참 말하기 민망한 곳을 잡았다 아뿔사 싶어 손의 힘을 빼자 주르르 미끄러져 그녀의 아랫도리로 엎어져 버렸다. 그러니까 미안하고 죄송하고 뭐라고 말할 수 없는데, 콰당, 소리는 그녀가 낸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내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넘어졌는데, 어쩌자고 나는 그녀를 덮쳤을까?  

 아아……… 뭐예요! 뭐예요! 여자의 고성이 내 고막을 찢었다. 

 “어, 미안항니다. 마안항니다. 미끄러져성용.”

 혀가 말려 말이 제대로 안 나왔다.

 “비켜요! 비켜요! 빨리 비켜요!”

 여자가 울부짖으며 무릎을 쿵쾅거려 내 가슴팍을 때리고 손으로 머리통을 잡아 밀었다. 그런데 내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푹 퍼진 자루 그 자체였다. 내 자신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자루 말이다. 여자가 새된 비명을 질러댔다. 나는 손으로 바닥을 짚어 균형을 잡으려고 애썼지만 자꾸 미끄러졌다. 여자가 악을 썼다. 그 소리가 내 정신을 쥐어뜯었고, 나는 있는 대로 용을 써 겨우 일어났다. 나를 따라 벌떡 일어선 여자가 핸드백으로 나를 후려쳤다. 손이 시려워 허벅지 사이에 끼우느라 한껏 구부린 덕분에 핸드백은 내 엉덩이만 가격하고 말았다. 

 뭐라고 욕 비슷한 말을 내뱉던 여자가 조도 낮은 불빛 아래를 더듬으며 뭔가를 찾았다. 여자는 손으로 바닥을 쓸었고 마침내 원하는 것을 찾았다. 얼굴 가까이로 휴대폰을 당긴 여자는 터치를 하다 아으으, 비명 아닌 비명을 질렀다. 콧김을 뿜으며 내 앞에 선 여자가 휴대폰을 휙 내밀었다.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두꺼운 목도리에 싸인 동그란 호빵 같은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거 어떻게 할래요?”

 “뭐가용?”

 “휴대폰 액정이 깨졌잖아요. 이거 봐요. 이거 봐, 아주 바싹 부서졌잖아요!”

 여자가 발을 굴리며 소리쳤다. 

 “그 러 네용”

 “빨리 물어내요.”

 “어떻게용”

 “뭐예욧! 어떻게냐니요! 그걸 몰라서 물어봐요? 빨리 고쳐내요!”

 “고쳐야징. 어…… 지갑이 없넹.”

 진짜였다. 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점퍼 안으로 손을 넣었는데 지갑이 없었다. 바지 호주머니에도 없었다. 아, 지갑은 쟈켓 속에 있다. 어제 퇴근 후부터 꺼내지 않았고, 친구녀석이 술값을 내는 통에 지갑을 꺼낼 일이 없어 지금까지 확인을 못한 것이다.    

 지갑이 없어도 괜찮긴 했다. 휴대폰 뱅크앱으로 계좌이체 하면 되니까. 그러나 뚜껑이 열린 여자는 날더러 사기꾼이며 협잡꾼이라며 경찰서에 가자고 막말을 했다. 

 “뭐양! 그럼, 잘 들고 있등지. 당신이 놓쳤으니깡 깨졌잖앙!”

 나도 꼬부라진 혀로 반박을 늘어놓았다. 발음은 엉망이었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그러자 똥을 누가 쌌는데 큰 소리냐며 여자가 방방 뛰었다. 나는 똥 싼 놈 입은 입이 아니냐고 맞섰다. 오히려 시원해서 말이 더 잘 나온다고 말해주었다. 구경꾼이 없어 아쉬웠다. 여자와 나는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고 깨물어 뜯을 듯이 얼굴을 맞댔다 잽싸게 떨어졌다 오방난장을 피웠는데 말이다.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서면 아주 흐믓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콧속으로 파고들자 뿅주사라도 한 대 맞은 것처럼 술기운이 아주 신나게 혈관을 타고 달렸다. 나는 여자 앞으로 얼굴을 더 밀었다. 여자가 내 가슴팍을 팍 밀어버렸다. 그리고는 손바닥을 펴 야멸차게 내밀었다.     “당신 휴대폰 내놔요. 담보물로 갖고 있을 테니 내일 정신 말짱할 때 고쳐내요.”

 까짓것 얼마든지! 나는 다시 호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다. 어어? 없넹. 안쪽 주머니에도 없공. 바지 뒷주머니도 뒤졌다. 여기도 없고. 도대체 어디간거양.

 “뭐예욧! 또 없어요! 장난해욧!”

 여자가 다시 불을 뿜었다.   

 “어디갔징. 이상하넹. 아까 지하철도 타고 갔는뎅.”

 휴대폰으로 지하철 결재를 했으니까 홍대까지 달려갔지. 술집에 떨어뜨리고 왔나? 친구녀석의 차에 던져놨나? 이것이 어디로 내빼버렸지? 사타구니께까지 뒤졌지만 없었다. 으등으등거리며 노려보고 있던 여자가 악다문 입으로 말했다. 

 “일단 번호부터 불러 봐요. 신호가 가는지 확인 해볼 거예요.”

 여자가 손가락을 세워 터치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나는 기꺼이 불렀다. 공일공 일이…

 “아, 안 돼요. 아예 작동을 안 해요. 메인보드까지 나갔나 봐. 이거 어떻게 할 거예요!”

 여자가 얼굴 근육을 마구 구겨 아주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호빵이 우그러진 것 같았다. 웃겼다. 그런데 추워서 입꼬리 아래로 질질 샜다. 

 “그렁, 그냥 버려용. 추우니까 빨리 집에 가용. 근데 여기 어디에용. 일호 아파트 아니에용?”

 “지금 집이 문제예요? 어떻게 할지 해결을 보고 가야잖아요. 아저씨 어떻게 할래요? 지갑도 없고, 휴대폰도 없는데, 어떻게 해결해 줄 거예요!”

 “내일 전화해용. 아니, 내가 할게용. 전화번호 몇 번이징? 적어줭. 적어줭.”

 “그랬다간 전화 안 받거나, 전화 안 하면 나만 꽝되는 거잖아요. 어쩌지? 어쩌지?”

 “어쩌깅. 춥당. 빨리 집에 가장.”

 정말 너무 추워서 그대로 동상이 될 것 같았다.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살기 위해서 발을 놀리는데, 여자가 내 팔을 낚아챘다. 

 “이 아저씨가, 어딜 가요? 아, 저기 파출소 있네. 아저씨 파출소로 가요. 저기 가서 해결해요.”  

 “오, 좋은 생각이양. 추워, 추워, 빨리 가장.”

 나는 어깨를 꼬부리고 앞장섰다. 술이 깨려고 그러는지 이빨이 딱딱거리고 머리 위로 얼음물을 부은 듯 온 몸이 시려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걸어 파출소에 도착했고, 계단을 뛰어 올라 문을 확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있던 경찰이 반쯤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추웁당. 추워. 난방 온도 좀 올려용.”

 “아니, 추워서 들어온 거예요? 나 참.”

 어이없어 하던 젊은 경찰관은 여자가 들어오는 걸 보더니 다시 날 삐딱하게 쳐다보았다.

 “함께 오셨습니까?”

 “아, 네. 이 아저씨가요……”

 여자가 줄줄줄 쏟아놓았다. 

 “그러니까 이 아저씨가 고의로 아가씨를……”

 또 다른 목소리가 책상 너머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눈가에 피로를 주렁주렁 매단 경찰관이 세모꼴 눈으로 나와 여자를 번갈이 쳐다보았다.

 “아가씨 광대뼈가 부었구만.”

 그 경찰관의 말에 여자는 화들짝 놀랐다.

 “네? 진짜요?”

 여자는 거울 앞으로 달려가 살폈다. 나도 고개를 빼고 여자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발그레하게 물들었고만.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 여자의 얼었던 얼굴이 녹으면서 꽃을 피우고 있었다. 광대뼈 부분이 조금 더 진주홍빛이긴 했지만. 원래 그런가? 아니면 내가 얼굴을 받아버렸나?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여자가 경찰관의 턱밑으로 달려가 고자질하듯이 나를 가리켰다.

 “이이이 아저씨가 나를 덮쳤을 때 머리로 내 얼굴을……” 

 “아아아 덮친 게 아니라 내가 미끄러지다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당신을 잡았고, 남녀의 자동 법칙에 따라 살포시 포개고 싶었지만 힘 조절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여자가 한참 잘못 말하고 있어 나는 재빨리 정정해 주었다. 미끄러지면서 저절로 포개진 것뿐이다. 아마 그때 내 머리의 위치가 그녀의 얼굴에 있었고 들이박았다기 보다는 스킨쉽이 좀 찐하게 펼쳐졌던 것이다. 술은 다 깼고 꼬부라졌던 혀도 정상으로 돌아와 나는 나를 충분히 변론할 수 있었다. 여자가 펄펄 뛰며 그녀의 깨진 휴대폰이며 내 지갑의 행방이며 등을 떠벌리고 경찰관들은 낄낄 웃었지만 나는 미끄러졌던 그 불가사의한 상황만을 연속적으로 상기시켰다. 

 여자와 나는 경찰관의 주문에 따라 주민번호를 댔다. 여자의 나이는 스물 일곱이며 나보다 네 살 적었다. 직업은 학원 강사이고 심야버스를 타고 출퇴근하고 있었다. 여자는 내 직장과 전화번호를 확인했다. 경찰관들의 주선으로 여자와 나는 다음 날 낮에 만나서 휴대폰 대리점에 다녀오기로 했다. 만날 장소는 말 할 것도 없이 파출소였다. 

 문제는 이 추운 날에 땡전 한 푼 없는데, 집엔 어떻게 가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난처해하자 세모꼴 눈 경찰관이 공중에 대고 말했다.

 “미끄러진 김에 더 확 미끄러져 택시비 신세까지 져야 하는 거 아녀?”

 “아, 몰라요.”

 여자가 문을 차고 나가버리자 경찰관들은 나까지 좆아내버렸다. 어쨌든 나는 여자에게 빌붙어 집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다음 날, 여자는 목도리로 얼굴 전체를 감싸고 나왔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나는 먼저 약국에 들러 약을 사서 여자에게 건넸다. 머리는 괜찮냐고 묻자 여자는 눈을 뾰족한 나를 흘겨보았다. 내가 빚진 택시비를 더블, 더블로 내밀자 여자는 나온 만큼만 가져갔다. 그것 참. 또 미끄러지고 싶네. 내 혼잣말에 여자는 있는 대로 눈을 찢었다.   

 그래서 휴대폰 수리를 맡길 때 나는 쪽지도 함께 전했다.

 ‘천천히 고쳐주세요. 두 시간 이상 기다리겠습니다.’ 

 두 시간 정도 걸린다는 내 말에 여자는 반색을 했다. 다녀올 곳이 있는데 아주 적당한 시간이라며 내 말도 안 듣고 휭 하니 가버렸다. 황당하고 기가 막혔다. 벌써 내 생각을 꿰뚫어보고 일부러 가버린 거다. 날 골탕 먹이려고. 그렇게 판단을 내린 난 AS 기사에게 달려가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빨리 고쳐 달라고 재촉했다. 또다시 쪽지 한 장을 여자 앞으로 남기고 잘 고쳐진 휴대폰을 들고 집으로 와버렸다.    




  “그때부터 그녀와 난 아는 사이가 됐지. 서로 이기죽거리고 빈정거리다 낄낄깔깔 노는 이상한 이웃 말이야. 어쩌다 해가 서쪽에서 뜨는 날에는 연인처럼 은근해지기도 해. 그럴 때 확 들이대야 하는데 그럴 용기가 없어. 정말 미치겠어. 그녀가 주르륵 미끄러져 날 좀 덮쳐주면 좋겠어. 이번에는 그녀 차례라고. 그녀가 날 덮쳐야 한다고. 이렇게 진전이 더디다간 오십년 후에나 입 맞추게 생겼어. 슬슬 지쳐가고 있는데 말이야.”

 남자가 전혀 지치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술기운 없이는 들이댈 용기도 없는 머저리란 말이군.”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지. 사실 난 연애에 있어선 젬병이거든. 이렇게 안달부달 미친놈이 된 것도 처음이야. 하루에도 속으로는 천 번도 더 고백을 해. 그런데 그녀와 마주 앉으면 입이 안 떨어져. 아주 안 떨어진다고. 술 힘을 빌려볼까 싶기도 하지만 그랬다간 그녀가 듣기도 전에 뻥 차버릴 것 같아. 그녀 앞에선 절대로 술에 꼴아박고 싶지 않아. 그건 지난 한번으로 충분했어. 더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되지.”

 “좋군.”

 “꼭 좋은 것만도 아니야. 진전이 더디잖아. 그녀도 내가 싫지 않으니까 만나는 거 같아. 그런데 나는 만날수록 그녀가 좋아. 정말이지 내 이상형이야. 우린 말도 잘 통해. 어떤 문제를 놓고 토론을 했다하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니까. 아, 그런데 사귀자. 이 말을 못하겠어. 그랬다가 지금의 관계마저 깨뜨릴까봐 너무 두려워.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들이대.”

 “그걸 못해서 여기까지 왔잖아!”

 “들이대.”

 “농담할 기분 아니라고!”

 남자가 소리를 빽 질렀다.

 “여기서 핏대올려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것쯤 잘 알 텐데, 왜 x랄일까아?”

 부루가 이기죽거렸다.

 “됐다 .됐어. 깡통한테 뭔가를 바란 내가 빙신이지. 놔둬라. 내 힘으로 해결을 봐야지 누구한테 빌붙겠어.”

 남자가 마구 헝클어뜨린 머리를 다시 빗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나가야 정상이지.”

 “됐어. 그냥 들이대 볼 거야. 그래, 그게 나을 것 같다. 더 이상은 못 기다리겠어. 이렇게 속이 빠작빠작 타들어가다보면 남는 건 숯덩이뿐이잖아. 시도는 해봐야겠어. 해보기 전에는 모르잖아. 그 동안 내가 너무 조바심만 냈어. 오늘 시간 되는지 카톡부터 해봐야겠다.”

 남자는 휴대폰을 켜 카톡을 열었다. 그러나 바로 자판을 치지는 못했다. 뒤통수를 긁다 앞통수를 문지르며 주저거렸다. 그러다 어떤 결심을 했는지 타타닥 자판을 치고 톡을 보냈다.

 바로 답톡 울리는 소리가 났고, 남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나 이내 손바닥을 비비며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주먹으로 손바닥을 연신 치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다 벽에 머리를 박고는 중얼중얼거렸다. 어떻게 말하지. 어떻게 입을 떼지. 아아, 정말 힘들어. 입이 떨어져야 말을 하지. 다른 말은 그렇게 잘하면서 왜 고백은 못하는 거야? 아, 그냥 우릴 찰싹 붙여주는 그런 프로그램은 없나? 

 차마 귀때기 열고 들을 수 없는 푸념이었다. 부루는 듣는 기능을 꺼버릴까 고민을 하다 하는 수 없이 한 마디 했다.   

 “아직도 내 마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남자가 휙 뒤돌았다.

 “어떻게 해줄 수 있어? 그래준다면 백번이라도 머리를 조아려 고마워할게.”    

 “그래? 그럼, 눈 감아. 좀 고약한 냄새가 날거야. 이 냄새를 흠뻑 들이킨 후 십 초간 숨을 멈추고 있어. 그러면 어떤 변화가 생길 거야.”

 부루의 말에 남자의 얼굴이 집중 조명을 받은 것처럼 환해졌다. 남자가 숨을 들이킬 자세로 고개를 길게 뺐고, 벽면 어디에선가 화안하면서도 꼬랑 꼬랑한 냄새가 밀려들었다. 

 “오, 이 희한한 냄새가 우리를 다시 포개질 수 있도록 한단 말이지? 와, 소문이 뻥이 아니었어. 대단해!”

 남자가 코를 벌렁거리며 감탄을 거듭했다. 

 “뭐라고? 다시 포개? 이건 그녀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거란 말이야. 빨리 문 열어. 빨리 빨리, 냄새부터 빼!”

 “뭐? 뭐? 그녀를 지워? 안 돼. 안 돼. 이 깡통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작정을 했잖아!”

 질겁을 한 남자가 열린 문 밖으로 튀어 나갔다. 

 “아으, 떠벌이 떼어냈다. 그래. 달려. 더 빨리, 그녀에게 달려 가! 그 정도 페로몬이면 그녀가 반하고도 남을 걸. 또 한번 스르르 미끄러지고 아주 찐하게 포개지겠군. 다 태워버릴 듯이 아주 뜨겁게 말이야. 흐흐흐.”

 부루의 죽여주는 웃음소리를 듣고 있는 건 남자가 벗어 놓고 간 쟈켓뿐이었다. 천창의 따뜻한 햇살에 끄덕 끄덕 졸고 있던 쟈켓이 화들짝 놀란 표정이었다고 말하면 핀잔을 들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곳은 마법의 깡통집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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