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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Mar 21. 2023

기막힌 슬픔.

적어도 난, 애도의 주인공이고 싶다.

애정하는 몇몇의 작가들을 빼면 내가 서가에서 책을 뽑는 기준은 딱 하나, 제목이다. 일단은 제목이 마음에 들어야 하고, 제목 안에 나를 끌어당기는 단어가 있어야 한다. 목차 같은 건 보지 않는다. 제목이 끌리면 책날개에 적힌  작가의 말이나, 책 뒤편에 쓰인 짧은 평론들을 읽어본다. 책의 종류는 오로지 소설이어야 하고, 잠깐 훑어봐도 아침 보단 밤을 닮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집요하고, 무겁고, 끈질기고, 악착같은 이야기들. 그럼에도 부서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 최지월의 소설 <상실의 시간들>도 그렇게 만났다. 상실과 시간, 진부한 듯 노골적인 이런 제목들은 언제나 나를 끌어당긴다.      


<상실의 시간들>은 갑작스러운 엄마의 죽음으로 마주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결국엔 ‘돌봄’의 문제로 환원되는 이야기. 지금도 잊히지 않는 장면은 엄마의 장례식장에 온 조문객들의 슬픔이다. 그건 그들의 울음이 갑작스레 세상을 등진 엄마의 소멸이 아니라, 남겨진 사람, 즉 혼자가 된 아버지의 삶과 그의 밥에 닿아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고, 형님은 이제 어떡하라고, 너희 아버지 밥은 이제 어쩐다니 따위의 울음으로 말이다. 석희(주인공)의 말처럼 그건 ‘엄마’에 대한 애도가 아니었다. 사실, 낯설지 않은 모습인데도 한 글자 한 글자 글로 읽고 있자니 그렇게 이상할 수가 없었다. 그 장면은 지금도 내게 ‘기막힌 슬픔’으로 남아있다. 노트에도 적었다.


*<상실의 시간들/최지월> : 기막힌 슬픔, 내가 사라진 자리엔 그런 슬픔이 존재하지 않길.이라고.  



 

‘돌봄’ 이 무겁고 무거운 단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아닌 무언가를 사랑하는 일? 선량하고 순수한 것? 주체는 버겁고 대상은 안온한 것? 교환의 논리는 들어설 수 없어 결국엔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것? ‘나’를 비워내면서도 참고 견뎌야 하는 일?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면 되려 치졸한 사람이 되고 말아서 스스로를 끝없이 다독여야만 하는 일? 피곤함 위로 쓸쓸함이 몰려오는 밤을 매일 마주하는 일?


돌봄을 향한 내 안에 말을 그러모아보면 대충 이러하다. 그럼에도 끝내는 뱉지 못한 말들이 있을 것이다. 괜한 자책감에 시달리고 싶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숨기고 있는 말들. 그걸 다 쏟아냈다간 목이 멜지 모르겠다. 지금의 돌봄과 다가올 돌봄, 남겨질 돌봄 어딘가에서 나는 분명 더 납작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만 같아서 그렇다. 엄마와 아내, 딸과 며느리로 살아가는 내겐 그런 두려움이 있다.      


문득 석희(같은 책 주인공)의 아버지는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배우자의 장례식장에서 본인의 끼니를 걱정하며 울음을 토하는 사람들 틈에서 어떤 마음이 들었을지? 괴상하고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애도를 그는 어떤 마음으로 바라봤을까? 하는 생각들.    


  

‘돌봄’은 춥고 외롭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그것 만으로는 채울 수가 없다. 되려 ‘사랑’ 때문에 더 참담해지고 만다. 한때는 사랑이라 불렀던 것들, 혹은 지금도 사랑이라 불리는 것을 참고 견뎌야만 하는 순간이 올 테니 말이다. 결혼 13년 차, 그럼에도 아직은 돌봄의 초입에 있다고 생각하는 나 조차도 종종 그런 불가해한 시간을 통과하며 살아간다.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사랑 따위, 모성 따위, 가족 따위’가 돼버리는 날. 그런 시간 뒤에 따라붙는 자책과 쓸쓸함은 덤이다. 그래서 돌봄은 춥고 외롭다. 늦은 밤, 웅크린 몸위로 홀로 들썩이다 가라앉는 이불처럼 서럽다.   


아내의 죽음과 남편의 밥, 아버지의 끼니를 위해 엄마가 되어야 하는 딸. 밥 때문에 애도의 범주에서 사라져 버린 엄마. 물론 이건 소설이다. 문제는 이러한 서사가 전혀 낯설지 않다는 것에 있다.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에서 권명아는 말했다. “익숙한 것을 슬픔의 원천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식의 슬픔에 대한 공감을 인간 본연의 윤리로 제시하는 것은, 익숙지 않은 것을 슬퍼할 대상으로 사유할 필요성을 박탈하는 것이다.”라고.       


‘죽음’보다 ‘끼니’를 슬퍼하는 삶.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화가 난다. 슬픔조차 차별화된 삶은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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