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출근을 하려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다, 학교를 마치고 들어오는 첫째와 마주쳤다. 벌게진 얼굴로 콧잔등 가득 땀방울을 매달고 들어선 아이가 말한다.
" 엄마, 밖에 30도야. 에어컨... 헥헥헥"
나는 아직 에어컨 틀 정도는 아니니, 얼른 씻고 선풍기 앞에 앉아 좀 쉬라고 했다. 청소했으니 어지르지 말라는 말을 보태고 현관을 나서려는데 아이가 나를 불렀다.
"엄마, 근데... 엄마 옷이 맨투맨...... 이상한 사람 같아."
" 야, 나는 춥거든. 얼른 들어가 씻기나 해"
"근데 왜 신발은 샌들을..."
말 끝을 흐린 아이의 얼굴을 보니 '대체 우리 엄마 왜 저래'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경악스러운 아이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숙여 내 차림을 한 번 쓱 훑어보니 뭐, 그럴 만도 하다 싶어서 "다녀올게 "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터벅터벅 주차장을 가로질러 차를 향해 걸어가는데, 단지 내 보도블록 위로 젊은 남자가 노란색 민소매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게 보였다. '저 사람 눈에도 내가 이상해 보일까?' 잠깐 생각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지글지글 태양이 끓고 있었다. 정수리에 내려앉는 햇볕이 좀 뜨겁기도 했다. 휴. 날이 더운 건 확실하군.
언젠가부터 햇볕이 없는 서늘한 곳에 가면 팔뚝에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12월쯤 꺼내 쓰던 온열선풍기를 가을에 꺼낸 이후론, 사계절 내내 사용하기 시작했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처럼 가만히 앉아 있으면 계절에 상관없이 몸에 자주 한기가 들어서다. 올해만 해도 저녁 늦게 걸어서 아이를 데리러 가는 날엔 5월 초까지 겨울패딩을 입었다. 그때 딸아이도 첫째와 비슷한 말을 했다.
"엄마, 패딩은 좀 에바야" (-.-)
슬쩍 기분이 상했지만, 아이가 이내 '그래도 이해해'라는 말을 덧붙여서 사이좋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안다. 봄에 패딩 입고, 실내온도 25인 곳에서 온열기에 몸을 바싹 대고 있거나, 민소매 옷을 입고도 땀을 흘리는 날에 두껍고 긴 맨투맨 옷을 입는다는 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그렇지만 나도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결혼 전에는 보통의 사람들처럼 계절에 맞춰 옷을 입었다. 아이를 낳고도 한 동안은 그랬다. 그런데 요즘엔 하루도 춥지 않은 날이 없다. 시도 때도 없이 닭살이 돋는 팔을 볼 때마다 대체 왜 이렇게 추위를 타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몸이 안 좋거나 어디 아픈데라도 있으면 그러려니 하지만, 문제는 그것도 아니라는 것. 육체적으로 너무 피곤하고 힘들 땐 제발 병이라도 나서 며칠 누워있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나는 꽤 건강한 축에 속한다.
답답한 마음에 네이버에 물어보니 활동량(=운동) 부족, 저체중, 감정적인 스트레스, 혈액순환장애를 원인으로 알려줬다. 딱 나였다. 운동이라곤 숨 쉬는 게 전부고, 체중도 많이 모자란다. 감정적인 스트레스야 두말하면 피곤하고, 조금만 앉아 있어도 다리가 잘 붓는다. 결론적으로 운동을 하고, 균형 잡힌 식사를 하고, 살을 찌우고,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는데 그게 뭐 내 마음대로 되냐 말이다.
몇 해전 요가원에 등록해 한 달 만에 때려치운 게 내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운동이었다. 저녁에 종종 산책을 하긴 하지만 그건 그냥 동네마실 정도지 운동이 될 만큼은 힘들어서 걷지도 못한다. 균형 잡힌 식사는 누가 차려주면 먹겠지만 대충 후루룩 먹고 쉬거나 책을 읽는 게 훨씬 더 만족감이 커서 그 또한 요원한 일이다. 체중 증가도 생각보다 어렵다. 4남매 독박육아와 살림은 잦은 야식으로도 나를 살찌우지 못한다.
뜨거운 여름이면 나도 뻘뻘 땀을 흘리던 시절이 있었다. 에어컨을 세게 틀어놓은 실내에 들어가서도 카디건 따윈 걸치지 않았다. 여름이면 시도 때도 없이 선풍기나 에어컨 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서 있어도 춥다고 느끼지 않았다. 조금 힘들다고 살이 훅 빠지지도 않았다. 빠지더라도 곧 본래 체중으로 돌아왔다. 균형 잡힌 식사를 하지 않아도 에너지가 넘쳤고, 마른 몸은 체중과 상관없이 단단했다. 얼음도 와그작와그작 잘 씹었고, 과일은 항상 냉장고에 든 차가운 것만 먹었다. 그런데 지금은 진짜 뜨거운 날이 아니면 하루에도 몇 번씩 닭살이 돋고, 카디건도 모자라 두꺼운 옷을 입고, 에어컨 앞에 얼굴을 들이밀지도 못한다(얼굴뼈 시린다). 잘 먹어도 힘들고, 잘 안 먹으면 더 힘들다. 단단했던 마른 몸은 그냥 마른 몸이 되었고, 힘들어서 살이라도 빠지면 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냉장고에 든 과일은 잘 못 먹는다. 차가운걸 잘 씹지 못하는 사람이 된 거다. 아프지 않은 게 신기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지금도 책상 옆엔 온열 선풍기가 빨간빛을 뿜어내며 내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다. 아이들이 본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지나칠 거다. 그렇지만 추운 걸 어쩌나.
육체의 컨디션이 지금과 같다면 앞으로도 난, 자주 추울 거다. 추위를 극복하기 위해선 환경을 개선하고 무언가를 실천해야 하는데 그렇게 까지 하기엔 지금의 삶 만으로도 너무 피곤해서 어떤 임무도 더하고 싶지가 않다. 그러니 만일 폭염에도 오소소 닭살이 올라온다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한다.
"그러니 얘들아! 엄마 드레스코드에 토 달지 말고, 말이나 좀 잘 듣자. 네이버가 그러는데 스트레스 많이 받으면 추위에 약해진데!! 너희들 자꾸 엄마 힘들게 하면 이러다 8월에 패딩 입을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