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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Aug 01. 2022

괜찮아, 엄마가 되려고 결혼한 건 아니니까.

아이를 미워하는 엄마, 아이의 마음보다 아이 때문에 괴로운 내 마음을 더 이해하고 싶은 엄마, 매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아이들에게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는 것을 지루하다 못해 고통스럽게 느끼는 엄마. 이렇게 얕고 상스러운 마음이 내 안에서 호들갑을 떨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막막한 마음이 든다. 바닥난 모성애를 싹싹 긁어 보지만 애를 써도 모아지지 않는 마음 때문에 오히려 더 괴로워지고 만다.


주말 내 이런 마음으로 집안을 서성거렸다.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억울한 제 마음만 앞세워 항의하듯 자꾸만 내게 달려드는 아이를 보면서, 내가 준 사랑이 충분하지 못해 그런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다가도 어쩜 저렇게 못되게 구나 싶어 눈앞의 아이가 미워졌다. 그냥 좀 무심하게 넘기면 좋을 텐데. 아이의 차가운 말과 표정을 여과 없이 내 안으로 끌고 와 들여다보느라 마음이 바닥나 버렸다.      


안 되겠다 싶어 오랜만에 아이들을 어머니댁에 보내버렸다. “얘들아, 할머니 집에 가서 하루만 자고 와.” 그렇게 아이들을 보내고 남편과 함께 밤바다를 보러 갔다. 침낭 두 개와, 캠핑 테이블, 의자, 약간의 먹을거리를 챙겨 충동적으로 차에 올랐을 땐 이미 저녁 여덟 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로를 달리는 한 시간 반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음악을 들었고,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반사되는 초록색 이정표를 무심히 쳐다보았다. 엄마로 살아가는 삶에도 방향을 가르쳐 주는 표지판이 군데군데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것도 아니라면 마음이 바닥났을 때 들키지 않고 나를 숨길 수 있는 비상구 같은 곳이라도.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다 보니 파도소리가 들렸다.      



여름밤의 바닷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여기저기 놓여 있는 캠핑카와 텐트 사이로 작은 조명들이 반짝였고, 모래사장 위엔 파라솔과 투명 카누, 구명조끼가 줄지어 있었다. 남편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트렁크위로 타프를 연결하여 어설프게나마 작은 공간을 만들었다. 습한 바닷바람 때문에 땀을 뻘뻘 흘리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다 저녁에 뭐하는 짓인가 싶어 웃음이 났다.

      

우린, 구이 바다(캠핑용 불판) 위에 삼겹살 세줄을 올리고 소주를 마셨다. 짠. 짠. 짠. 밤바다의 파도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먹는 소주는 달았다. 쓸데없는 긴 이야기들을 했다. 말 그대로 잡담. 드라마 얘기부터 시시콜콜한 일상의 장면들에 대해.      


배가 불러 밤바다를 잠깐 걷기도 했다. 방파제로 연결된 길 위에 걸터앉아 담배도 피웠다. 남편은 바다를 보며 피우는 담배는 어떠냐고 묻더니, 내일 아침에도 바다를 보며 한 대 피우고 가라며 웃는다.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 그럼에도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 곧 마흔인데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라고 말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남편은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고 여러 번 당부를 하더니 의자를 접고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12시가 다 되도록 캠핑카 주변을 뛰어다니던 아이들도 잠자리에 들었는지 습한 바람을 뚫고 파도 소리만 들렸다. 나는 캠핑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오래도록 캄캄한 바다를 보았다. 어둠, 습한 바람, 적막을 깨는 파도소리, 약간의 술기운이 만나니 그제야 바닥난 마음이 조금은 채워지는 듯했다.


   

한때는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이 내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일이라 여겼다. 무서우리만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과, 아무도 모르게 흘러가는 시간조차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엄마라는 이름에 맹목적으로 달려들었던 때. 하지만 지금의 난, 엄마로 사는 동안 내가 잃어버려야 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아이를 향한 무한한 애정과 증오가 교차하는 지점에 서서, 절망과 희망을 오가며 내가 붙들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 ‘아무 앞에서도, 어디에서도, 언제나 너 자신이어야 한다’는 故전혜린의 말을 곱씹으면서 말이다.


가끔은 이런 내가 천박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이들의 웃는 얼굴, 건강하게 잘 자라는 아이들의 모습 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마음이 부끄럽고, 자꾸만 혼자이고 싶은 열망이 나를 괴롭힐 때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었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난, 늦은 밤 아이들을 어머니댁에 맡겨놓고 나와선 한 번 도 아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잡담을 늘어놓고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면서 숨을 돌렸고, 답답했던 마음이 누그러 드니 편안하기까지 했다. 만일 내 안에 목적지를 ‘엄마’로 맞춰둔 내비게이션이 있었다면 어떤 목소리가 들렸을까? 경로를 벗어났다는 경고음이 계속해서 울렸을까?


하지만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방향을 틀진 않았을 것 같다. 견딜 수 없는 것들을 붙들고 있느니 조금은 천박해도 견디지 않는 삶을 선택했을 것이다. 뭐든 너무 애쓰고 견디다 보면 떠나고 싶어 지는 법이니까.


오랫동안 바다를 보면서 앞으로는 좀 더 자주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남편과 함께여도 좋고, 혼자라면 더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아무래도 난, 백 점짜리 엄마는 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뭐, 괜찮다. 엄마가 되려고 결혼한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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