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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Jul 28. 2022

너를 위한다는 거짓말.

끝까지 사랑하기 위해

연년생 4남매를 키우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어느 날, 첫째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띄엄띄엄 글을 읽기 시작했다. 다섯 살이 되었을 땐 혼자서 책을 읽고, 글씨를 쓰며 놀았다. 어느 날부턴가가 아이는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일곱 살이 되었을 땐 어린이집 가방에 <한국사 편지>라는 역사책을 넣어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는 어린이 집에서 친구들이 낮잠을 잘 때 책을 읽었다. 일곱 살 겨울이 되었을 땐, 책이 너덜너덜 해졌다. 마냥 예쁘기만 하던 아이가 특별해 보이기 시작했다. 욕심이 생겼다. 특별해 보이는 아이가 더 특별해 지길 바랐다.      


시키지 않아도 혼자 책을 읽던 아이를 옆에 앉혀두고 함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초등 고학년 책을 사서 아이에게 읽혔고, 논어를 필사했다. 사유의 힘을 길러 준다며 짧게나마 매일매일 독후 평 쓰기도 했다. 사교육의 선택권이 없는 면 소재지에 살면서 내가 아이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건, 오로지 책과 관련된 학습이었다. 문제는 ‘욕심’이 만들어낸 계산된 읽기였다는 것.


한 1년쯤, 그렇게 혼자 동분서주 종종걸음을 치다 보았다. 오로지 나의 기쁨에만 닿아 있던 분주한 내 마음과, 웃음이 사라진 아이의 얼굴이.      


지루해하는 아이를 보며 말했었다. “이해해, 그럴 수 있어. 하지만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어. 지금은 재미없는 것들도 나중엔 다 너에게 도움이 될 거야.”라고.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라도 누구나 해줄 수 있는 그런 말들을 끝없이 아이에게 늘어놓았다. 이제와 돌아보면 ‘다 너를 위한 거야’라는 말은 예쁘게 치장한 지독한 잔소리였다. 어쩌면 아이는 알면서도 모른 척했는지 모른다. ‘너를 위한 거야’라는 말 뒤에 숨겨둔 엄마의 욕심을.     



종종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식을 꽉 움켜쥐고 있는 엄마들이 보인다. 대게 그런 사람들은 아이에 대해 말할 때면 확신에 차 있다. 단언하고, 규정한다. 너무 잘 알아서, 너무 잘 보여서 괴롭다고 한다. 아이의 미래가 그려지기 때문이란다. 어떤 사람으로 자랄 거라는 추측, 어떤 부분에서 지지부진할 거라는 예상 같은 것.      


확신에 찬 상상은 마치 집을 둘러싼 담벼락 같은 거라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엄마들은 그 안에서 아이에게 최적화된 삶을 선물해 주고 싶어 한다. 부족한 부분은 채워주고, 넘치는 부분을 덜어내면서 서랍을 정리하듯 아이의 삶을 정리하고 싶어 한다. 아마 그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거다. 그러다 아이에 대한 증오와 애정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밤이면 전화가 온다. 아이 때문에 너무 괴롭다는 전화. 시간을 들여 애쓰고 노력하는데 나아지는 것이 없다는 거다. 그런 전화를 받는 날이면 예전의 나를 떠올리게 된다. 온통 내 안에서 나온 것들로 아이를 채워주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숭숭 구멍이 나던 마음 때문에 괴롭던 시간들.      


나는 친구에게 아이를 꽉 움켜쥔 손을 살짝만 풀어 보라고, 조금만 풀어도 훨씬 나아질 거라고 말하고 싶지만 너무 애쓰지 말란 말 밖에는 하지 못한다. 채워질 수 없는 환상은 언젠가 깨지고 말 테니까. 다만 난, 곧 괜찮아질 친구의 밤이 너무 늦게 오질 않길 기다릴 뿐이다. 그런 밤,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아이 때문에 괴로운 마음이 아니라, 서로의 안부를 나누며 웃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모성애를 두고 한참을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겠는데 아이를 사랑한다는 건 더 어렵고 복잡한 일이라 정답을 찾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고민하면 할수록 더 어려워졌다. 자꾸만 유난스러워지는 마음이 나조차 부담스러웠다. 사랑을 핑계로 아이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나를 벗어나는 게 더 힘들어졌다. 아이는 보이지 않고, 아이를 통해 채우고 싶은 내 안의 결핍이 커다란 욕망이 되어 나를 쫓았다. 욕심이 돼버린 사랑은 그렇게 내 발목을 잡아 나를 먼저 넘어트렸다. 그제야 보였다. 아이의 주변에 너저분하게 풀어헤쳐둔 내 안의 욕망들이.      


돌아보면 부끄럽다. 완벽한 엄마가 만든, 완벽한 아이가 살아갈, 완벽한 삶이란, 얼마나 허무맹랑한 일인가.      


아이를 움켜쥐었던 손을 풀고 한 발 뒤로 물러난 지금 난, 어느 때 보다 편안하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아도 서툴게나마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결정하면서 무언가에 막 빠져드는 때도 있고, 금방 싫증을 내고 휙 돌아서기도 한다. 가끔은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엔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욕심을 버리니 하나씩 빠지는 유치를 볼 때나, 늦은 밤 이불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아이들의 발을 보는 것 만으로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아 깊은 안도감이 밀려온다.      


이틀 전, 동네 바닥분수에 놀러 갔다 과자를 먹던 첫째의 송곳니가 빠졌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이를 나에게 보여주던 아이를 보며 생각했다. 무심결에 빠지고 다시 자라는 이처럼, 아이들도 그렇게 매일매일 자라고 있을 거라고. 그러니 너무 애쓰지 말자고


될 수 있다면 천천히 오래오래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고 싶다. 아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말하든 상관없이. 늘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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