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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Aug 02. 2022

다시 요리를 할 수 있을까?

요리를 끊어버렸다.

결혼을 하고 남편과 같은 집에서 살게 됐을 때, 장을 보러 마트에 가는 게 좋았다. 남편이 회사일을 정리하느라 6개월 정도 주말부부로 지냈는데, 그가 오는 날이면 미리 장을 보기 위해 버스를 타고 시내에 있는 대형마트로 갔다. 그땐 면허가 없어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를 나가야 했고,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와야 했음에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결혼을 해서 누군가의 아내가 됐다는 것, 그래서 식재료를 고르고 음식을 만드는 일이 마치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모든 게 놀이 같았고, 재미있었다. 그 덕에 남편은 결혼 1년 만에 체중이 10킬로나 늘었고, 지금도 그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다.      


결혼 전 나는, 엄마가 만들어놓은 반찬을 꺼내고 국을 데워 밥을 차려 먹는 일은 있었지만 재료를 직접 손질하거나 무언가를 만들어 본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라면을 끓여 먹거나 제사나 명절 때 엄마 옆에서 잔심부름을 한 게 전부였다. 그런데 요리를 하니 음식이 됐다. 칼질이 서툴러 손을 여러 번 다치긴 했지만, 평소에 해봤던 사람처럼 주방에 서면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재료 손질부터 음식을 만들고 난 뒤 정리까지, 뭐든 일사천리로 후딱후딱 해치웠다. 게다가 맛도 있었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마트에 가는 게 놀이처럼 재미났는지 모른다.      


첫 아이를 낳고는 그간의 주방놀이가 빛을 발했다. 아이는 첫 이유식부터 잘 받아먹었고, 개월 수에 맞춰 필요한 것들을 추가할 때마다 한 번의 거부도 없이 꿀떡꿀떡 먹어 치웠다. 식성이 좋아서 그랬다고 하기엔 네 아이가 모두 그랬다. 내가 만들어준 이유식과 유아 밥을 거부한 아이가 한 명도 없었다.  이유식을 만들고, 유아 밥을 만들고, 남편의 식사를 챙기느라 주방에서 시작해 주방에서 마치는 하루를 보내야 했지만 크게 힘들다 느끼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그게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너무 잘 먹으니까, 뭐든 해주고 싶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매번 어머니의 생신상도 직접 차리게 됐고, 남편의 생일상도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 주었다. 차로 5분 거리에 사는 어머니가 아이들을 보러 매일 집으로 들러도 싫은 내색 없이 식사대접을 해드렸다. 주방에서의 삶이 일상이 됐을 땐 베이킹도 했다. 친한 언니의 빵을 먹어보고 무작정 밀가루와 버터를 사서 치대고 발효를 하고 주무르고 구워서 만들었다. 그것 또한 어렵지가 않아서 파이부터 식빵, 소보루, 도넛, 쿠키까지 집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빵을 만들고 또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신없이 주방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렇게 무언가를 만들어 먹이고 치우다 보면 금방 하루해가 저물었다.   

   


복숭아 조림은 또 얼마나 많이 만들었는지 모른다. 과수농사를 지으니 상품이 되지 못하는 비품이 아까워 여름이면 손이 무르도록 복숭아를 깎고,쪼개고, 끓여서, 냉장고 가득 달달한 복숭아 조림을 채워 넣었다. 친구들에게 퍼 돌려도 겨울까지 남아있었으니 말 다했지 뭐.


처음엔 정말 요리가 재미있었다. 만드는 데로 결과물이 나오니 성취감도 느꼈고, 매일 나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워주는 아이들을 보면 뿌듯하고 감사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엄마로, 누군가의 아내로 척척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낸다는 게 그래서 참 좋았다.     

 

모두가 그런 나를 칭찬했다. 아이를 넷이나 키우면서 부지런하게 주방을 오가는 내가 대단하다고. 엄마가 요리를 잘해서 아이들도 뭐든 잘 먹고 건강하게 쑥쑥 크는 거라고 했다. 정작 나는, 너무 당연한 일이라 생각해서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오히려 쑥스러웠다.     

 

요리는 전업주부로 네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혼자 농사를 짓느라 고생하는 남편을 위해, 농번기면 대충 식사를 챙겨 드시는 어머니를 위해,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을 위해 독박 육아를 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 그래서 백일 된 아기를 등에 업고도 불 앞에 서서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어 도시락을 쌌다. 부른 배가 무거워 다리가 퉁퉁 부어도 샌드위치를 만들고, 주먹밥을 만들고, 고기를 볶았다. 저녁이면 커다란 가방에 들려오는 빈 도시락통을 정리하고 씻는 것이 가끔은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마음이 진심이라 그럴 수 있었을 거다. 칭찬받고 잘 보이기 위한 일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해주고 싶었던 마음.      



농사일로 바쁜 남편 덕에 나의 육아기는 누구보다 치열했다. 그래서인지 무너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주방에서 시작하고 주방에서 끝내야 하는 하루가 견딜 수 없게 싫어졌다. 지쳤던 것 같다. 그래서 책을 읽었다. ‘엄마’가 아닌 ‘나’를 만나고 싶었다. 그럼에도 주방에서의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땐 이미 뭐든 휘리릭 해내는 경지에 이르러서 미친 듯 책을 읽으면서도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드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요리를 했다.


문제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욕심이 생기는 거였다. 공부가 하고 싶었고,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학점은행제로 심리학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3년을 공부해서 학위를 이수하고, 청소년상담사 공부를 했다. 그때도 난 요리를 했다. 아니, 해야만 했다. 육아와 살림은 변함없이 내 몫이었고, 남편은 일에 지쳐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처음으로 사는 게 너무 버거웠다. 농사를 짓지 않는 며느리가 미워 나를 못 본 체 하시는 어머니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주고 돌아올 때면,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하고 따가운 시선이 마음을 마구 어지럽혀 놓았다. 어떤 날엔 손도 대지 않은 도시락이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과수원 안에 집을 짓고 살 때는 어머니 차가 마당으로 들어오는 것만 봐도 가슴이 벌렁거렸다. 적과를 하고 봉지를 싸느라 열댓 명의 일꾼들이 집 앞 과수원으로 오면, 며칠이고 그들의 밥을 차려야 했다. 밥을 하고, 치우고, 참을 가져다주면서도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 날이면 집에 있는 게 고역이었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있던 부모교육이나 친구와의 약속 때문에 나가려다가도, 어머니가 집 앞 과수원에서 일을 하는 날이면 나갈 수가 없었다. 반찬과 밥을 다 해놔도 차리는 것까지 내 몫이 되어야 했다. 남편은 공부를 하겠다는 나를 지지해 줬지만, 어머니의 노여움 앞에선 오히려 내가 어머니에게 맞춰주길 바랐다. 어머니와의 갈등은 남편과의 갈등으로 까지 이어졌고, 하루아침에 나는 나밖에 모르는 못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다.


남편이 농사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집안일에 신경 쓰지 않도록 내가 했던 노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니라고 했다. 나는 그저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집 안에서 편안하게 호의호식하다  ‘나’를 찾겠다고 나선 철없고 개념 없는 사람이 된 거다. 남편도 온전히 내 편이 되어주지 못할 만큼 사람들은 끊임없이 수군거렸다. 시선이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어딜 가도 ‘때리는 눈’이 있었다. 말할 수 없이 처참했고, 참담했다.      



마음을 다했던 모든 노력들이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이유로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묻고 싶었고, 소리치고 싶었다. 내가 당신들의 딸이라도, 내게 말한 그 당연함 들을 강요할 수 있겠느냐고. 남편과 시어머니를 위해 하루 종일 주방을 서성이고, 남는 시간에는 밭에 나가 일을 하고, 아이들이 오면 씻기고 먹이고 재우는 모든 일들도 너의 몫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고. 왜 함부로 내게 내 몫이 아닌 모멸과 수치를 새겨 넣느냐고 한번쯤은 정말,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일을 겪고 난 뒤론 자연스럽게 주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짧아졌다. 장을 보고, 재료를 다듬고, 요리를 하는 것이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해졌다. 존중받지 못한 시간은 상흔처럼 남아서 무얼 해도 기쁘지가 않았다. 오래도록 주방 앞을 서성이느니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었다. 누구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온전히 내게 기쁨이 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렇게 요리를 끊어 버렸다.      


지금의 난, 밥은 하고 반찬은 배달해 먹는다. 가끔 아이들을 위한 달걀찜이나 계란말이, 볶음밥, 비가 오는 날이면 하는 부침개 정도가 요즘 내가 하는 요리의 전부다. 다 귀찮은 날이면 라면도 먹고, 치킨고 먹고, 피자도 먹는다. 그래도 아이들은 잘 자라고, 남편의 몸무게도 변함이 없다. 가끔 아이들이 쿠키나 빵을 만들어 달라고 하지만 이젠 힘들어서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잠깐은 섭섭해 해도 집 앞 빵집에 가면 맛있는 빵과 쿠키는 넘쳐 나니까 괜찮다. 먹고 싶으면 사 먹으면 된다.      


지금도 음식을 만들고자 하면 못할 건 없다. 하지만 더는 하고 싶지가 않다. 그 시간을 나를 위해 쓰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기도 하다. 반찬을 배달해 먹어도 차리고 정리하는 건 여전히 내 몫이니 죄책감 같은 건 없다. 십 년, 십 년을 마음을 다해 정성껏 요리를 했다. 그정도면 아이들에게도 엄마의 음식을 떠올릴 충분한 추억거리가 있고, 남편에게도 그간 차려준 7첩 반상 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난, 요리를 끊고 그 시간을 온전히 나를 위해 썼던 내가 부끄럽지 않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나에 대해 함부로 떠들던 사람들 이니까.



이유야 어찌 됐건, 주방에서 기쁘고 행복했던 나와 더는 요리를 하지 않는 나는, 다르지만 다르지 않은 사람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변함없이 최선을 다하고, 매 순간 내가 선택한 것들에 책임지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며 살아간다.      


함부로 나를 뭉개던 사람들 덕에 삶의 방식이 조금 바뀌긴 했지만, 되려 잘 된 일 같기도 하다. 당연하지 않은 걸 당연하다 말하는 사람을 덕에 지금의 내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숨 막혔던 지난날도 그렇게 아프지만은 않다. 덕분에 조금 더 ‘나’에 가까이 온 것 같기도 하니까.  


아직은 다시 요리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하지만 살다 보면, 요리를 하며 기쁨을 느끼는 날이 다시 올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한다.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이대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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