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홍 Jan 01. 2022

울음을 아끼지 않도록

나는 당신을 만나기까지 울음을 아껴두기로 한다.



친구의 생일이었다. 그는 본인 생일인데도 불구하고 내게 전화를 걸어 나랑 친구 해줘서 진심으로 고맙다고 전했다. 세상엔 참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 멋짐을 넘어서 대단하다. 성찰할 줄 알고 탓하지 않으며 표현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들을 곁에서 바라보며 하루하루 배워간다. 올해엔 그들 덕분에 조금 더 표현할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고 대답할 줄 아는 사람들의 긍정이 옮아 마음껏 드러내고 인정할 수 있게 된다. 몇 년 사이 내가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잃어버린 것들도 많고 지지리 못 고친 버릇들도 많지만 분명 저 깊은 곳 어딘가 자유로워진 나를 발견한다. 친구는 내게 왜 그런 것 같냐고 물었고,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타인을 더욱 이해하게 됨으로써 이렇게 바뀐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로써 해소된 의구심이 정말 많다고. 그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더랬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삶과 사고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점차 내게 침입하는 것들을 방어하지 않고 자연히 인정하며 때론 주장하며 살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연기를 하는 친구와 글을 쓰는 나, 우리는 경험한 감정과 행동, 문장과 표정을 모조리 흡수하고 기억하려 한다. 좋은 연기를 하기 위해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붙잡던 것들을 떠올리며 결국 같은 걱정을 했다.




"만일 언젠가 이것들로 인해 내가 손쓸 수 없이 너덜너덜해지면 어쩌지."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단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 우리의 시선은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힘없이 웃어지는 얼굴마저도 이토록 짙은 꿈과 가치를 공유할 사람이 있는 덕분이라고. 그런데 왜 우리 이미 너덜너덜해진 것 같지. 그러니까, 사실 나도 그 생각했어.



울어도 된다거나 울지 말라는 말 없이 무겁게 서로를 응원하는 소리가 들린다. 당연한 슬픔을 손수 닦아내려 하지 않고 손수건을 조용히 가져다 두는 사람들이 있기에 자유로이 슬퍼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해할 수 있어.




친구는 내가 쓴 글이 웃으며 대화를 하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먹먹해서, 그걸 읽을 때마다 마치 본인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나도 통화를 마치면 곧 사라질 너의 표정을 자주 상상하곤 했어. 네가 마냥 행복한 현실만 마주하려는 사람이었다면 우린 아무리 설명해도 서로를 절대 이해하지 못했을 거야. 내 마음을 들은 듯 친구는 이어서 말했다.




"신기하게도 네가 스치듯 했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한텐 자꾸 박혀. 가끔은 충격을 받을 만큼 말이야. 메우지 못한 빈칸이 단번에 채워지는 기분이 들 때마다 나를 더 바라보게 돼. 자꾸 생각하고 돌아보게 돼. 내가 감히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넌 생각해."




"그건 네가 내 문장들을 놓치지 않고 곡해하지도 않고 잘 사용하는 사람이라 그런 거 아니야? 네가 섬세한 사람이라서, 다른 사람들이면 가볍게 지나갈 수 있는 말들도 흘리지 않고 잘 다듬어내는 사람이라서. 그리고 내가 이런 말들을 인색해하지 않고 전할 수 있을 만큼 네가 날 오해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래. 네 문장이 내게 와서 쓰이는 건 맞지만 그것만은 아니야. 내가 너무 과하게 칭찬하고 있는 걸 수도 있는데 그래도 나는 네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진짜 자주 해."




"너도 내가 스스로 질문하게끔 해주는 친구야. 배려가 담긴 조언, 진정으로 상대를 위한 질문을 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드물거든. 특히나 우리 또래엔 더더욱. 대부분 좋은 사람으로서든 현명한 사람으로서든 상대의 우위에 서고 싶어 하잖아. 자신이 타당하길 원하지. 온전히 타인을 위해 조언하는 사람들이 흔치 않더라고. 언제든 내가 설 곳을 만든 후에 상대를 일으키려 하더라. 나 또한 크게 다를 것도 없지만 말이야. 그런데 너는 너를 희생하면서까지 타인을 배려하고 응원해. 그리고 질문해. 그 사람이 더 풍부해질 수 있도록. 그게 너를 지키는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너는 뭐든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자주 고마워."




서로가 서로에게 멋진 사람일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각자의 부족함을 응원하고 장점을 채굴해주며 지낼 수 있는 벗이 있다는 건 정말 귀한 일이다. 그 소중함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굳게 지키는 따뜻한 친구가 되어줘서 나는 그에게 매번 고맙다.




우리는 이제껏 사랑했던 사람들을 소중히 여긴다. 내가 사랑하게끔 살아와 준 사람을, 밤마다 끈질기게 떠오를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준 지난 시절을 아낀다. 사랑할 때만 느껴지는 행복이 있듯이 힘들고 아플 때만 담을 수 있는 감정이 있다. 그것들은 매사에 조금씩 달라서 늘 처음 같다. 불행이 단연 행복으로 건너가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당위를 세우고 싶지 않다. 맛있는 냄새가 풍기는 분식집 앞을 지나가는 것과 떡볶이를 직접 먹는 것은 다르고 겨울 골목을 걷는 것과 보일러조차 없는 방에서 덜덜 떨며 잠드는 추위가 다르듯, 비로소 겪어야만 아는 감정들이 있다. 그러니 모든 일과 사랑을, 이별과 그리움을 생존해서 감각할 수만 있다면 그게 불행이어도 아무렴 괜찮다. 아직 우리가 맨발로 걸을 용기가 있어 다행이다만 왠지 이제는 발에 맞는 신발 한 짝 정도는 손에 들고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위태한 생각을 몰래 한다.




"내가 그때 그 여자 때문에 미친 듯이 아팠고 힘들었지만 그만큼 내가 깊이 사랑할 수 있었던 사람이란 건 부정할 수 없으니까. 덕분에 다양한 감정을 겪을 수 있었어. 처음 보는 내 표정과 몸짓, 감정... 그건 내가 커다란 사랑을 해야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거든. 사실 그녀가 조금도 밉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많이 사랑했고 고마운 건 여전해. 그러니 꼭 행복했으면 좋겠어."




"완전 공감해. 나도 가끔 그 사람이 미워. 알잖아. 나 되게 귀찮은 거 많고 뻔뻔한 사람인 거. 근데 걔는 이런 나를 유일하게 흔드는 사람이었어. 너무 밉고 미운데도 참 얄밉도록 아껴주고 싶은 사람. 걔도 마찬가지였겠지. 내가 많이 미웠을 거야. 나도 내가 신기했어. 내 사랑이 과할까 봐 괜히 억누르게 될 만큼 뭐든 부지런히 건네고 싶어 지더라. 참게 되는 감정마저도 새로웠어. 나도 그렇게 많이 사랑할 수 있었으니 고맙긴 하지. 지금도 그래, 막 미웠다가 몰래 사랑했다가. 그땐 참 걔도 나도 당당히 사랑하지 못했어. 그 사람이 더 채워지고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인지 지금 하고 있을 다른 사랑마저도 응원하게 되더라. 사랑은 많은 걸 배우게 만드니까."




덤덤히 말하던 우리는 분명 슬퍼했다. 친구는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할 때가 아니면 울지 못했고, 나 또한 오래도록 울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울음이 선명해질 때가 온다면 그건 정말 대체 불가능한 사랑이라고, 마음껏 울어내도 될 만큼 온몸이 넘치도록 품으려 했던 무엇이라고,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은 늘 내 곁에 손수건을 가져다 두었다. 보이지 않는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그의 손이 젖고 있는 걸 알면서도 그가 어떤 표현을 좋아할지 몰라 제대로 위로하지 못했다. 자꾸만 두려워하던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혼자 숨어서 아파했다. 불쑥 다가가면 멀어질 것만 같던 당신에게 꺼내지 못한 문장과 나누고 싶은 대화가 많다. 우리가 좀 더 자유로운 어른이 되면 그땐 나눌 수 있을까. 더 배우고 돌아보고 피하지 않을 수 있게 되면 내 안에 남은 사랑을 전할 수 있을까.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다른 사랑에게 배우고 돌아와 다시 젖은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우리가 밀어냈던 사랑을 다시 가져올 수 있을까. 내가 어지러운 세상 아래에 깔릴 때 손을 뻗어줄 수 있을까. 당신이 우주 끝으로 밀려난 듯 공허할 때 내가 가서 안아줄 수 있을까. 내가 느끼는 걸 당신도 조금은 느끼고 있을까. 나는 여전히 살아가는 모든 일에 서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까지 애먼 울음을 아끼기로 한다.





친구와 나는 앞으로 더욱 부단히 겪기로 했다.

너덜너덜해져도 괜찮을 만큼

다양한 행복을 나누고 슬픔을 들키기로,

그렇게 더 풍부한 어른이 되어

꿈을 향해 아끼지 않고 아파하기로 했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은 아침이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