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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롱고스 Nov 28. 2020

로만틱 가도의 심장부, 뇌르틀링의 종탑과 성벽에 서다

역사와 낭만의 독일 로만틱 가도로 떠나는 가족여행 #4

로만틱 가도를 따라가는 도시 중에서 로텐부르크(Rothenburg ob der Tauber)와 딩켈스뷜(Dinkelsbühl) 그리고 뇌르틀링(Nördlingen)은 중세의 성벽과 도시의 모습을 현재까지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3대 도시로 유명하다.


가도(街道) 여행의 3일째 아침이 밝았다. 지난밤에 모기를 퇴치하느라 두어 시간가량 사투를 벌인 후, 프랑켄 와인을 1병 비워낸 탓에 힘들게 눈은 떴으나 몸이 천근만근이라 침대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프랑켄 와인은 여행 첫날 뷔르츠부르크에서 맛있게 마셨던 기억이 있어 딩켈스뷜의 마트에서 반갑게 장바구니에 담았던 녀석이다.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았으나 아침에 살짝 숙취가 있다.

아침식사를 8시에 하겠다고 주인장에게 이야기를 해 둔 탓도 있지만 오늘은 이동해야 할 거리가 꽤 되기 때문에 미적거릴 수 없었다. 시간 약속이 철저한 독일에 있다는 마음 때문인지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자그마한 호텔 조식 식당 식탁 위에는 우리 가족의 예약석임을 표시하는 손글씨의 종이 푯말이 앙증맞게 놓여 있었다. 어차피 손님도 별로 없어서 예약석이 필요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주인장의 섬세한 마음이 느껴졌다. 소소하지만 정감이 가는 작은 종이 조각 덕에 지난밤의 모기 사건은 어느새 머릿속에서 까맣게 지워졌다.

우리 가족의 이름이 적힌 예약석 푯말


숙소에서 자동차로 15분가량 떨어져 있는 뇌르틀링(Nördlingen)은 약 1천5백만 년 전에 작은 소행성이 지구와 부딪혀 생긴 지름 24킬로미터의 거대한 운석 분화구, 뇌르틀링 라이즈(Nördlingen Ries) 안에 자리 잡은 특이한 도시이다.

독일 남부의 소행성 충돌 사건은 1960년대에 밝혀졌는데, 지름 1km가 넘는 운석이 대기권을 뚫고 들어와 충돌하면서 섭씨 3만 도 이상의 폭발이 일어나 지각을 튕겨내고 지반을 녹였다고 한다. 뇌르틀링이 위치한 분화구 안쪽은 가장자리보다 약 100미터 이상 낮은 지대이다.

오늘날에도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수없이 많은 소행성 중에 지구에 충돌할 가능성이 있는 개체들은 나사(NASA)에서 늘 추적 중이다. 공룡 멸망의 원인 중 유력한 학설이 운석의 충돌이듯 인류의 미래도 알 수 없는 것 아닐까?

뇌르틀링 분화구의 모습 (그림 출처 :  one-million-places.com, @geopark-lies.de)


30년 전쟁의 전장이었던 뇌르틀링(Nördlingen)

인구 2만여 명의 작은 도시지만 1천 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뇌르틀링은 딩켈스뷜과 마찬가지로 서기 1215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자유 제국 도시로 지정되어 17세기까지 그 지위를 누렸다. (자유 제국 도시에 대한 이야기는 동화 속 중세의 마을 로텐부르크)

같은 지역에서 오랜 역사의 흐름을 함께 헤쳐온 만큼, 뇌르틀링은 딩켈스뷜이나 로텐부르크와 여러 모로 닮아 있다. 하지만, 도시의 한가운데 우뚝 솟은 장크트 게오르그스(St-Georgs) 교회의 종탑 위에서 내려다보면 뇌르틀링이야말로 외곽의 성벽을 따라 원형으로 완벽히 보전된 유일한 중세 도시라는 점을 알 수 있다. 14세기경에 건설된 성벽은 질곡의 역사를 굽어보며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

뇌르틀링의 항공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유럽의 경제 중심지가 대양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뇌르틀링은 동서남북을 잇는 주요 교역로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도시였다. 그런 이유로도 중세 시대에 큰 전쟁에 휘말렸는데, 그것은 바로 인류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 중 하나인 ‘30년 전쟁’이다.


16세기 초 마틴 루터가 로마 교황의 면죄부를 비판하며 시작된 가톨릭과 신교 간의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심각해져 갔고, 17세기 초에 보헤미아(지금의 체코) 왕국의 개신교 귀족들이 가톨릭의 수호자였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 유럽의 국가들은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로 휩쓸려 들어갔다.

당시 보헤미아의 개신교 의회는 보헤미아 시청사의 3층 방에서 가톨릭을 강요하는 황제의 대리인들을 창밖으로 던져버렸다.(1618년 '프라하 창 밖 투척사건')

‘창 밖으로 사람을 던지는 행위'라는 뜻의 영어 단어 'defenestration'은 여기서 유래한다.

30년 전쟁의 기폭제가 된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 (출처 : 위키피디아)


프랑스나 스페인, 영국과 같은 강력한 왕정 국가들과 달리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제후국과 자유 도시로 쪼개져 있던 신성 로마 제국(지금의 독일)은 각국이 신교파와 제국군으로 나뉜 채 외국 군대와 뒤섞여 수십 년 간 전쟁을 벌인 탓에 대규모 살상전 외에도 기근과 전염병 등으로 인구가 급감하고 국토는 쑥대밭이 되었다.


보헤미아 반란이 '진압'된 후 신교 연합으로 참전했던 덴마크마저 패퇴하여 생긴 신교 측의 공백은 스웨덴이 참전하여 메꿨다. 그렇게 전쟁이 한창이던 1632년, 신교 제후국들을 이끌며 연거푸 승리를 거두어 황제 측 제국군을 궁지로 몰았던 스웨덴의 왕 아돌프 구스타브 2세(Gustav II Adolf)가 뤼첸 전투(Battle of Lützen)에서 전사하면서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유럽의 변방에 불과했던 스웨덴을 강국으로 일으켜 세우고, 혁신적인 전술과 군대 운용으로 30년 전쟁의 판도를 흔들어 '북방의 사자'로 불렸던 위대한 지도자가 사라지자 스웨덴은 출구 전략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 역시 상황이 애매했다. 황제는 당시 제국군 내에서 가장 유능했으나 야망이 크고 좌충우돌 성격 탓에 통제가 안되던 총지휘관 알브레히트 발렌슈타인(Albrecht von Waldstein)을 뤼첸 전투 후에 해임했기 때문에 활로가 마땅찮았다. 발렌슈타인은 얼마 되지 않아 반역자로 몰려 암살까지 당하고 만다.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는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브 2세 (출처 : 위키피디아)


두 나라는 평화 협상에 나섰으나 원활하지 않았다. 협상을 포기한 스웨덴은 프랑스의 막대한 자금 지원을 등에 업고 라인강 및 독일 중남부 지역의 신교 제후국들과 동맹을 재정비해 전열을 가다듬었다.(하일브론 동맹; Heilbronn League)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였음에도 라이벌인 합스부르크 왕가(독일/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스웨덴과 신교 연합에 물자와 자금을 지원했다. 종교를 위해 나라를 초월하여 전쟁을 벌였던 시대가 중세라면 프랑스의 리슐리외(Richelieu) 추기경은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하며 근세로 먼저 나아갔다.


달타냥이 주인공인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서는 악당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그는 정치, 외교 측면에서 수백 년에 나올까 말까 한 명재상이었다. 루이 13세 때 리슐리외가 닦아놓은 중앙 집권제의 고속도로 위에 올라타 절대 왕정의 전성기를 구가한 왕이 바로 '태양왕' 루이 14세이다.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 (출처 : 위키피디아)


한편, 페르디난트 2세의 제국군에는 같은 합스부르크 가이자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한 스페인에서 카디날-인판테 페르디난드(Cardinal-Infante Ferdinand)가 끌고 온 테르시오(Tercio; 스페인의 최정예 보병 부대)가 지원군으로 합류했다. 당시 스페인에서 왕위 계승권이 없는 왕자(Infante)들은 추기경(Cardinal)이 되는 전통이 있어 카디날-인판테라고 불렸던 그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이기도 했다.

카디날-인판테 페르디난드는 황제의 아들 페르디난트(헝가리 왕, 훗날 페르디난트 3세)와 함께 스웨덴 - 신교 제후 연합군에게 빼앗긴 남부 독일을 탈환하기 시작했다.

이름이 모두 페르디난트여서 헷갈리기 십상인데, 두 사람은 사촌지간이기도 하다.

뇌르틀링에서 만난 두 페르디난트, 1635년 루벤스 작 (출처 : 위키피디아)


카디날-인판테가 이끌고 온 테르시오란 무어인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한 국토 회복 운동(레콩키스타; Reconquista)의 풍부한 전투 경험을 토대로 조직된 스페인의 정예 군대를 일컫는 말로, 장창병(Pikeman)과 총병(Musketer)의 이상적 조합으로 당시 유럽에서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했다.

동맹을 재정비했으나 이전보다 구심점이 약해진 신교 연합군에게 전황은 생각보다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634년, 신교 연합이 분열하던 틈을 노려 레겐스부르크(Regensburg)를 탈환하며 남부 독일에서 스웨덴을 흔들기 시작한 스페인과 제국군은 스웨덴군 일부가 점령하고 있던 요충지 뇌르틀링을 포위하였다. 뇌르틀링은 스웨덴과 신교 세력이 차지하고 있던 남부 독일의 한가운데에 있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을 뿐 아니라, 하일브론 동맹 내에서도 규모가 컸기 때문에 스웨덴군 본진은 뇌르틀링을 구하기 위해 급히 출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스웨덴군의 사령관은 두 명이었는데, 2년 전 뤼첸 전투에서 전사한 아돌프 구스타브 2세의 바통을 넘겨받은 작센-바이마르 베른하르트(Bernhard von Sachsen-Weimar)와 구스타프 호른(Gustav Horn)이었다. 둘은 강력한 제국군을 함께 상대하기 위하여 뇌르틀링에서 힘을 합쳤으나 라이벌 의식과 자존심 때문에 어느 누구도 총사령관의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뇌르틀링 전투, 1670년 마테우스 메리안(Matthäus Merian) 작. (출처 : 위키피디아)


전혀 다른 스타일의 장군이 공동으로 지휘하면서 이들의 배는 제국군과 전투를 하기 전부터 산으로 가고 있었다. 첩보를 잘못 파악하여 본인들이 숫적 열세인 점도 몰랐던 스웨덴군은 뇌르틀링 옆 평원에 진을 구축하고 제국군을 상대로 무작정 전투를 개시했다. 두 장군은 서로 손발도 맞지 않았던 데다 실시간 전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결국, 스웨덴군은 호른이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스페인의 테르시오 총구 앞으로 15번에 걸쳐 기병대를 돌격시키는 최악의 전술적 실책까지 저지르며 2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고 전멸하고 말았다.

이 싸움이 유명한 '뇌르틀링 전투(Battle of Nördlingen)'이다.(1차 뇌르틀링 전투)


30년 전쟁을 통틀어 유일하게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했던 뇌르틀링 전투로 인해 신교 세력의 맹주 스웨덴은 남부 독일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고 가톨릭 입장에서 제국은 안정을 되찾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당시 유럽의 정세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뇌르틀링 전투의 나비효과는 매우 컸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변화는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두 합스부르크 가 사이에 끼어 큰 위협을 느끼던 잠자던 사자, 프랑스가 직접 참전을 선언하게 된 점이다.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은 그 누구보다 신성 로마 제국이 중앙 집권화되어 강력해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지체 없이 가톨릭 연합 국가들에게 선전을 포고했다.


프랑스의 참전으로 힘을 얻은 스웨덴이 다시 제국군과의 전쟁에 뛰어들면서 프랑스 - 스웨덴 연합군은 1640년 경부터 다시 전황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프랑스는 1643년 로크루아 전투에서 스페인에, 스웨덴은 1645년 프라하 얀카우 전투에서 제국군에 대승을 거두며 30년에 걸친 전쟁은 신교 측으로 기울었고, 1648년 늦가을에 베스트팔렌에서 양쪽이 평화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길고 참혹했던 전쟁은 막이 내렸다.

로크루아 전투(1643)에서 패배한 스페인의 테르시오 (출처: 위키피디아, by Augusto Ferrer-Dalmau, 2011)


한편, 뇌르틀링에서는 1645년에도 프랑스 대 바이에른-제국군 간에 큰 전투가 있었다.(2차 뇌르틀링 전투)

앞선 1차 뇌르틀링 전투를 포함해 10년 사이에 2번의 큰 난리가 난 도시에서는 전쟁을 겪는 동안 인구가 반 이하로 줄었을 정도이니 일반 시민들이 겪었을 고통은 말도 못 했을 것이다.


다니엘 타워에서 내려다보는 뇌르틀링

앞서 이야기했듯, 뇌르틀링의 첫인상은 로텐부르크나 딩켈스뷜과 큰 차이가 없어 두 도시에 가본 사람들이라면 뇌르틀링에서 새로운 매력은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뇌르틀링의 진가는 도시 한가운데 90미터 높이로 솟아 있는 장크트-게오르그 교회의 종탑(다니엘 타워) 위에서 내려다보는 뷰에 있다.

뇌르틀링 도시 한가운데 중심을 잡고 있는 장크트-게오르그 교회의 종탑. 다니엘이라는 별칭이 있다.


후기 고딕 양식의 장크트-게오르그스 교회는 15세기 중반에 건설이 시작되어 16세기 초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이후 몇 번의 개보수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자세히 보면 종탑의 꼭대기 부분이 왠지 어색하다. 사실 종탑은 부족한 자금 때문에 임시로 마무리한 후 다시 증축하지 못했다고 한다. 웅장한 고딕 양식으로 짓다가 종탑 꼭대기만 급하게 바로크 양식으로 마무리한 체코 프라하의 성 비투스 대성당이 떠오른다. 프라하의 성 비투스 대성당도 어색함이 특징으로 승화된 곳이다.


종교개혁 이후 뇌르틀링이 신교파 도시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신교(루터교) 교회가 된 이 곳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수바이트(Suevite)라는 광물이 건축 자재로 쓰였다는 점이다. 수바이트는 뇌르틀링에 운석이 떨어질 당시 엄청난 고온, 고압으로 녹아내린 성분들이 결합되며 형성된 암석으로 운석 충돌이 있는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광물이다.

딩켈스뷜에 있는 동명의 성당이 가톨릭 교회인데 반해 뇌르틀링의 교회는 신교 교회인 점도 재미있다.

도시의 한가운데 있는 교회 주변으로는 각종 레스토랑과 카페, 시장이 발달해 있고 길이 사방으로 뻗어있어 중세 도시에서 종교가 얼마나 생활의 중심이었는지 알 수 있다.

장크트-게오르그스 교회


시내 남쪽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첫 번째 일정으로 가족들에게 제안한 것은 '다니엘(Daniel) 타워'라 불리는 장크트-게오르그스 교회의 종탑 등반이었다. 하늘은 파랗고 햇살이 눈부신 독일의 여름, 나는 이 아름다운 도시를 내려다볼 생각에 다소 들뜬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미 며칠 간의 강행군(?)으로 컨디션 난조를 보이는 집사람뿐 아니라, 아이들도 모두 종탑 위로는 올라가지 않겠다고 퇴짜를 놓았다.


‘그래, 그러면 당신은 애들과 저기 광장 옆의 카페에서 커피 한잔 하고 있어.'

오죽 피곤하면 아침인데도 종탑에 올라가기 싫어할까 싶어 나는 혼자 350개에 이르는 종탑의 계단을 걸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들이 같이 올라갈 것처럼 초반부의 계단 몇 개를 같이 오르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는지 이내 뒤돌아 엄마에게 뛰어가 버렸다.


좁은 기둥 안쪽으로 나 있는 나선형 돌계단을 시작으로 나무 사다리와 좁은 계단 등을 걸어 올라가다 보면 첫 번째로 거대한 트레드밀이 눈에 들어온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듯 과거에 죄수들이 저 안에 들어가 도르래를 돌리듯 무거운 물건들을 탑 위로 끌어올렸다고 한다.

종탑 중단부의 트레드밀


트레드밀 옆으로 난 나무 계단을 통해 계속 위로 올라갔더니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탑 내부 홀에 달려있는 종이 보였다. 종은 도르래를 이용해 앞뒤로 움직여 치는 방식이다.

종탑 상단부의 종


종을 지나 좀 더 오르면 70미터 높이에 위치한 타워룸(Toweroom ; Türmerstube)에 도착한다. 타워룸은 탑 위에서 지내며 화재와 적의 침입을 감시하는 보초들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중세 교회의 종탑에 흔히 발견된다. 지리적 요충지로서 방어가 중요했던 뇌르틀링에서는 이 종탑에서 보초들이 생활하며 약 30분 간격으로 도시 내외부의 이상 여부를 소리를 질러 알렸다고 한다.


작은 아파트 크기의 타워룸에는 고양이가 살고 있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만난 의젓(?)하고 우아한 고양이가 반가워 인증샷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이 친구가 여기에 산 지가 벌써 8년입니다.'

티켓을 받는 직원이 으쓱하며 설명해 주었다. 8년간 살았다면 종탑의 터줏대감이다. 나중에 탑에서 내려와 이 신기한 이야기를 했더니 아들이 고양이를 보러 다시 올라가자고 조르는 걸 다리가 후들거려 두 번은 못 가겠다고 손사래를 쳤다. 이 녀석은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캣타워에 사는 고양이일 것이다.

종탑에 사는 고양이


전망대까지는 타워룸에서 한 층 더 올라가야 한다.

뻐근한 다리를 두드리며 마지막 계단을 올라 드디어 종탑 꼭대기의 8각 라운지에 섰다.

바로 아래는 주황색 지붕들이 빼곡한 뇌르틀링 시내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도시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성벽 너머 넓게 퍼진 들판과 그 뒤로 저 멀리 뇌르틀링 분화구의 경계면이 나지막한 산처럼 눈에 들어왔다.


도시는 성벽을 따라 칼로 자른 듯 재단이 되어 있고, 둥그런 성벽의 원 안에는 초록 들판과 대조되는 붉은 삼각형들이 옹기종기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마치 레고 블록 마을을 보는 듯하다. 종탑 위의 옥타곤 라운지를 360도 걸어서 돌면서 내려다보는 광경은 정말이지 장관으로,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 위해서라면 몇백 개 계단을 오르는 수고로움쯤이야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다니엘 타워에서 내려다본 뇌르틀링 전경
바로 아래 흰 건물은 13세기의 시청사였다.


종탑의 전망대에는 갓난아기를 안고 올라온 젊은 가족도 있었고 어린 손자가 할머니 손을 잡아끌고 올라온 3대 가족도 있었다. 우리에게는 남의 나라의 작은 마을일 뿐이었겠지만 독일 사람들에게는 이 역사의 도시가 더 남달랐을 것이다.

'아이들도 같이 올라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아쉬움을 느끼며 종탑 꼭대기에 서 있었더니 문득 아래 광장의 어느 카페에 있을 가족들이 생각났다. 아이들은 훗날 원하는 곳을 스스로 여행하며 얻는 것이 더 많을 것이라고 위안 삼으며 계단을 되짚어 내려왔다.


성벽길을 걷다

아름다운 뇌르틀링을 구석구석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은 도시를 완벽히 감싸고도는 길이 2.7km의 성벽길을 걷는 것이다. 성벽길은 그 자체도 아름답지만 도시의 중심으로 연결된 모든 길은 성벽을 따라 세워져 있는 주요 게이트(또는 방어탑)를 통과해 도시 밖으로 뻗어 나가기 때문에 성벽을 따라 걷다가 어느 길에서든 시내 안쪽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어 편리하다.


이 날은 특히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 아래 햇빛도 강한 더운 날이어서 기와지붕으로 덮인 성벽길이 참 시원해 보였다. 우리는 성벽 북서쪽의 발딩거 게이트(Baldinger Tor)부터 트래킹을 시작하기로 했다.

15세기에 건설된 발딩거 게이트는 30년 전쟁 때 파괴된 후 복구되었다가 2차 세계 대전 때 또다시 크게 파괴된 바 있다. 600년에 걸쳐 파괴와 복구가 이루어진 유서 깊은 곳이다. 성벽 위로 올라가는 계단은 전통적인 반목조 양식의 벽과 지붕으로 보호되어 있어 언뜻 계단처럼 보이지 않았다.

발딩거 게이트 옆의 성벽 진입 계단


후다닥 계단 위로 먼저 뛰어 올라간 아들이 둥그렇게 뚫려있는 작은 통기 구멍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성벽 위에서 안쪽을 볼 수 있게 뚫어놓은 구멍 같은데, 거기에 얼굴을 내민 모습이 엄청 우스꽝스럽다. 아내도 깔깔 웃으며 올라가서 얼굴을 내밀어 보았다.


기온이 섭씨 30도에 이르는 더운 날이었지만 성벽 위는 시원했다. 주황색 기와지붕을 얹은 통나무 서까래가 끝없이 이어지며 통로를 덮고 있는 데다 성 밖을 향해 벽에 뚫려있는 구멍을 통해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왔기 때문이다. 벽의 구멍들은 분명 활과 총을 쏘는 용도였을 것이다. 낡을 대로 낡았지만 튼튼히 서 있는 벽돌벽이 유적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었다. 우리는 시내를 오른쪽에 두고 시계 방향을 따라 성벽 위를 걷기 시작했다.

뇌르틀링의 성벽길


뇌르틀링에는 이웃 도시 로텐부르크나 딩켈스뷜처럼 독일의 전통 반목조 건축 양식인 파흐베르크(Fachwerk)식 건물이 많이 보존되어 있다.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목재 뼈대가 거미줄처럼 드러난 옛 건물이나 창의 두터운 덧문, 그리고 베란다에 장식된 꽃 화분이 아름다운 전통적인 독일 건축을 많이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이런 건축물은 시 북쪽의 타너스 지구(Tanners District)에 많다.


성벽길은 뇌르틀링 북쪽의 에드가(Edgar)라 불리는 작은 개천 위를 지나간다. 작은 개천 위의 다리와 집들이 유독 정겨워 보인다. 이 개천에는 물레방앗간(Bottom driven water mill)도 있다.


로텐부르크 성벽의 탑들이 모두 직사각형인데 반해 뇌르틀링의 방어탑들은 그 모습이 약간씩 달라 흥미로웠다. 성벽길을 1/4 가량 걸어 북동쪽 지점에 섰더니 둥근 원기둥 형태로 올라가다 상단부가 등대를 연상시키는 탑이 보였다. 도시의 북동쪽 관문으로서 룁싱거 게이트(Löpsinger Tor)라 불리는 이 탑은 현재 타워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388년에 이 자리에 처음 탑이 세워졌으나 16세기 말에 무너져 다시 건설된 이 탑에는 19세기에 설치된 해시계도 있다고 한다.   

도시의 북동쪽 관문, 룁싱거 게이트


성벽길이 관통하는 룁싱거 게이트의 성문 위에서 보면 오른쪽으로 뇌르틀링 시내의 아름다운 광경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파스텔 톤의 건물들 사이로 난 길 뒤에는 멀리 장크트-게오르그스 교회의 다니엘 타워가 한눈에 들어온다. 종탑은 성벽을 걷다 보면 어디서든지 볼 수 있다.

룁싱거 게이트에서 본 시내와 다니엘 타워의 모습


날이 덥기도 하고 이 날 자동차로 이동해야 하는 거리가 만만찮아 성벽길 트래킹은 기껏해야 30분 정도만 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쾌한 바람과 아름다운 도시 풍경에 취해 사진을 찍거나 수다를 떨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전체 성벽길의 2/3 가량을 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차를 주차해 둔 지점과 가까운 남동쪽의 레이믈링거 게이트(Reimlinger Tor)까지 걸은 후에야 성벽 아래로 내려와 시내로 돌아왔다.

동쪽 데이닝거 게이트 근처를 지나며 본 아름다운 성벽길


레이믈링거 게이트에서 시내 중심부로 들어오는 길에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어 또 다른 볼거리를 준다. 독일에서 가장 예쁜 도시라는 딩켈스뷜의 아름다운 길거리를 옮겨다 놓은 듯 비슷해서 두 도시가 서로 누가 더 아기자기하고 예쁜지 경쟁하는 듯하다.

성벽을 등지고 시내로 들어서는 길


성벽에서 내려와 10분 정도를 걸으니 아까 종탑을 올랐던 장크트-게오르그스 교회에 도착했다. 성벽길과 달리 시내 중심부에서는 따가운 햇살에 금방 더위를 느껴 우리는 교회 앞 광장 주위에서 시원한 곳을 찾아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광장 주변은 예전부터 시장이 발달했던 곳이라 각종 카페와 레스토랑이 늘어서 있고 여름 햇살을 즐기기 위한 인파로 가득했다. 성벽 쪽의 도시 외곽에는 길을 걷는 사람도 별로 없더니 이 도시의 사람들이 모두 이 주위에 모여있나 싶었다.

2020년 현재, 전 유럽이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어 이 여행이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빨리 상황이 좋아져 다시 이 아름다운 독일의 소도시들을 다녀보고 싶다.

다니엘 타워를 배경으로 한 뇌르틀링 시내 전경
장크트-게오르그스 교회 앞의 분수대


로만틱 가도를 가는 사람에게는 뇌르틀링에서 성벽을 따라 도시를 한 바퀴 도는 경험을 해보길 추천한다.

도시도 크지 않아 한 바퀴 도는데 1시간이면 족하고, 성벽의 어느 지점에서든 중심부의 광장까지 금방 걸어올 수 있다. 뇌르틀링을 걷다 보면 수많은 전쟁을 겪은 도시를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게 보존할 수 있었는지 어리둥절할 정도이다.

광장 뒤편 골목에 있는 작은 이태리 레스토랑에서 가볍게 점심을 마친 우리는 시장 골목을 한 바퀴 돌아보고 다시 남쪽을 향해 시동을 걸었다. 이날 가야 하는 목적지 퓌센(Fussen)까지는 아직 200km가량을 더 달려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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