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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Oct 09. 2019

우린 잘 지내고 있어요.

결혼식을 마치고.

오타루에 가면 많은 여행객들이 외치고 싶어 한다.


“잘 지내고 있나요.(오겡키데스까)”

“나는 잘 지내고 있어요.(와타시와 겡키데쓰)”


하지만 이 아름다운 외침은 사실 오타루에서 들릴 리 없다. 장면이 촬영된 곳은 나가노현에 있는 야쓰가타케 목장(八ヶ岳牧場)이라고 한다. 어찌 됐든. 오타루에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라고 알렸더니, 어떤 사람은 비아냥대듯 어떤 사람은 신기하다는 듯 일관된 반응을 보였다.


“오타루? 오겡키데쓰까?”

“오겡키데쓰까 찍냐?”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 『러브레터』를 보았고, 또 오타루란 지명에서 모두가 같은 것을 떠올린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우린 영화처럼 눈이 소복이 쌓인 오타루에서의 결혼식을 꿈꿨다. 나는 오타루로 떠나기 전에 『러브레터』를 몇 번이고 다시 보았다. 정작 주인공인 신랑 신부가 오타루에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영상으로 마을을 익혔다. 식을 앞둔 한 달 전부터는 매일 아침 우리 동네 날씨보다 오타루의 날씨를 먼저 챙겼고, 결혼식 날 오타루에 눈이 안 오면 어쩌지 전전긍긍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첫 번째 영화 『러브레터』엔 ‘후지이 이츠키’라는 이름을 가진 여학생과 남학생이 등장한다. 둘은 같은 반이 되었고, 친구들의 장난으로 도서위원에 나란히 선출된다. 어른이 된 남학생 후지이 이츠키는 와타나베 히로코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곤 조난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후지이를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는 와타나베는 그의 집에 남아있던 졸업앨범에서 그의 옛 주소를 발견하고, 편지를 보낸다. 편지는 같은 이름의 여자 후지이 이츠키의 집으로 배달된다. 얼굴이 닮은 (영화에선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후지이 이츠키와 와타나베 히로코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후지이 이츠키를 추억한다.


후지이 이츠키가 근무하는 도서관


두 명의 후지이 이츠키가 함께 보낸 3년이 채 안 되는 시간은 오타루에서 흘러갔다. 남자 후지이는 오래전 오타루를 떠났지만, 여자 후지이는 여전히 오타루에 살며 도서관에서 근무하고 있다. 자신을 좋아하는 아키바 시게루의 제안으로 오타루에 가게 된 와타나베 히로코는 간발의 차이로 후지이를 만나지 못한다. 둘은 어느 교차로에서 스쳐 지나가게 되는데……. 오타루 우체국 앞 풍경이 배경에 담겼다. 후지이 이츠키는 자신을 만나러 왔다가 그냥 떠난다는 와타나베 히로코의 편지를 읽은 후 답장을 써서 작은 우체통에 넣었다. 우체통은 몇 발자국 떨어진 자리로 옮겨져 있었다. 우린 일부러 이곳을 찾아간 것이 아니었다. 호텔에서 운하까지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났다. 지나가지 않으려 해도 지나갈 수밖에 없는 오타루는 작은 도시였다. 

인구 12만 명 정도가 살고 있는 오타루는 운하가 유명한 데서 알 수 있듯 항구로 번영했다. 지금은 다른 도시의 항구가 커지고, 홋카이도의 중심도시가 삿포로로 바뀌며, 인구도 줄어만 가고 많이 침체되었다고 하지만, 운하는 명소가 되어 관광업이 활기를 띠고 있다.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결혼식 전날, 당일, 다음날, 총사흘을 머무는 내내 오타루는 눈의 나라였다. 결혼식 전날 부모님과 신랑과 나는 작은 렌터카를 타고 조심조심 눈길을 기어가야 했기 때문에 늦은 밤에나 오타루에 도착했다. 두텁게 쌓인 하얀 눈 위에 주황빛 가로등이 내려앉아 있었다. 눈을 만난 강아지 같던 우리 모습을 엄마가 카메라에 담아주었다. 둘째 날엔 허리까지 쌓인 눈에 파묻혀 눈만큼이나 하얀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사진을 찍었다. 운하 사진을 찍던 관광객들이 카메라 방향을 틀어 우리를 담기 시작했다. 셋째 날엔 여전히 그치지 않던 눈을 꾹꾹 밟으며 드디어 오타루 여행을 시작했다.


지난 이틀 동안 결혼식을 준비하고, 올리느라 도시를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오타루가 마냥 시골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타루의 대표명소 오르골당에 가보니 인파가 대단했다. 관광객이 오르골 종류만큼이나 있었다. 커다란 가방에 때문에, 아이의 부주의로 인하여 오르골이 깨지는 장면을 두 번이나 목격했다. 나는 소음을 흡수해 버린 깊은 눈에 둘러싸여 주인공의 숨소리만이 들려오던 영화를 보고 오타루에 대한 환상을 그려왔다. 나의 환상이 오르골이 깨지는 소리처럼 와르르 깨져버릴 것 같았다. 북적임을 견딜 수 없어 빠져나와 오타루 역 근처로 걸어갔다. 영화 첫 장면에 등장한 오타루의 모습을 보러 가기 위해서.


나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침대에 파고들어가 다시 잠을 청하여 자고, 늦은 아침 식사 후에는 거실에서 세 번째 잠을 즐겼다. 그 기분 좋은 잠을 방해한 것은 집배원의 고물 오토바이 소리였다.

- 소설 『러브레터』 중에서

후나미자카(舟見坂)라는 언덕은 영화 속에서 후지이 이츠키에게 관심을 보이는 우체부가 오토바이를 타고 이츠키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다. 꽤 가파른 언덕이었다. 열선이 깔린 길은 눈이 깨끗하게 녹아 있었고, 하얀 눈은 열선이 없는 땅을 찾아 잔뜩 앉아 있었다. 언덕 풍경은 영화 장면과 똑같았고, 한가득 쌓인 눈이 주변을 더욱 고요하게 만들고 있었기에 영화의 기분에 흠뻑 빠져들 수 있었다. 


여행을 다녀와서 한참 뒤. 오타루로부터 소포가 왔다. 결혼식 사진과 동영상이 담긴 CD가 들어 있었다. 나는 와타나베의 부탁을 받아 후지이가 달리던 운동장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보내준 후지이를 떠올리며 오타루에 메일을 띄웠다.


“우린 잘 지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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