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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Oct 09. 2019

그래도 오타루에 눈이 없으니 좀 허전하지 않아?

다시 찾아간 오타루.


"벌써 3년이 되어가네."


작년 여름 한 출판사로부터 가이드북 집필을 제안받았을 때, 홋카이도에 대해 쓰는 일이라면 남편과 꼭 함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 혼자 그곳을 이야기할 순 없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올해 초부터 홋카이도 가이드북을 쓰기 시작했다. 자연이 주인공인 곳인 만큼 사계절을 다채롭게 담아보겠다는 포부 아래 겨울, 봄, 여름… 계절의 흐름을 카메라 안에 차곡차곡 쌓아 왔다. 그러다 올해 여름부터 한일관계가 심상치 않아지며, 출간 계획은 점차 불투명 해져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출간 계약서란 엄연한 약속을 했기에, 우린 지난달 오타루로 향했다. 가이드북 취재란 명분으로 찾아갔지만, 오타루란 도시를 일로만 바라볼 순 없다. 바로 이 도시에서 우리가 결혼식을 올렸으니까!


결혼식을 한 날엔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2,30미터도 걷기 어려운 날씨였다. (29년 만의 폭설, 65cm가 쌓였다) 그땐 잘 몰랐지만 오타루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알찬 관광도시였다. 도시 앞으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뒤로는 산이 솟은, 온천까지 샘솟는 자연을 갖고 있는 데다, 오랜 역사적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어 가볼만한 곳도 풍성하다. 도시가 별로 크지도 않아서 대부분 걸어서 찾아갈 수 있다. 게다가 초밥으로 유명! (우리는 여기에서 결혼식을 올리며 왜 초밥 한 점 먹지 못했던가) 오르골이나 유리공예품 등 쇼핑천국인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이렇게나 즐길 거리가 많은 도시에서 우리는 3년 전 결혼식을 올린 후, 너무나도 지친 나머지 뜨뜻한 해산물 라멘(물론 이것도 굉장히 맛있었다)과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오르골당 정도만 구경을 한 뒤 후다다닥 떠나버렸다. 그리 급히 떠날 것도 없었는데, 그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급히 하코다테로 가버렸다.


결혼식을 오타루에서 했단 사실을 들은 많은 이들이 “오타루에 연고가 있으신가 봐요?”, “오타루에 계신 거예요?”(이 질문을 한 사람 바로 눈앞에 내가 서있는데도!), "오타루에 가면 뭐 해야 해요? 뭐 먹어야 해요?"라고 묻곤 했는데, 정작 오타루에 머문 시간이 길지 않아서 (심지어 우리 부부는 결혼식을 하기 전에도 오타루에 가본 적이 없었다. 결혼식장도 결혼식 당일에 처음 가본 곳이었다.) 대답이 궁색해지곤 했다. 이번 취재는 누군가 우리의 결혼식 이야기를 듣고 찾아와서 질문을 던질 때 근사한 답변을 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말이 취재지 오타루에 도착한 순간부터 우린 추억에 푹 잠겨버렸다. 친구들의 숙소로 예약을 했던(이번엔 우리의 숙소) 호텔에 주차를 하고 나오니 바로 앞에 진짜 결혼식을 올렸던 이자카야가 있었고(11시 59분. 이자카야에서 진짜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그 옆엔 신랑이 구두를 신고 빠르게 걷다가 꽈당하고 넘어졌던 (진짜로 어딘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는데 멀쩡했다.) 눈길이 있었다. 물론 9월에는 눈이 없다. 넘어질만한 위험요소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길이라 둘 다 헛웃음을 지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결혼식을 올리기 전날 밤 머문 호텔이 나왔다. 호텔 앞에서 엄마가 해맑게 웃고 있는 우리 둘을 담아준 사진도 다시 찾아보며 “이때만 해도 다음날 공항이 폐쇄될 정도로 눈이 더 내릴 줄은 몰랐지”라며 웃어댔다.

사이 좋은 캔터키 할아버지와 맥도날드 아저씨도 만나고.


초밥이 유명한 곳이니 초밥도 맛보고 운하를 향해 걸어간다. 운하 곁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면서도 운하를 제대로 마주한 시간이 조금도 없었단 생각을 했다. 이곳을 배경으로 결혼사진을 찍긴 했는데 나는 웨딩슈즈를 신고 눈길을 걷다가 크게 넘어져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눈만큼이나 많았던 관광객들이 운하로 향하던 카메라를 갑자기 우리 쪽으로 돌려 셔터를 누르는 통에 더욱 정신이 혼미해졌다. 눈도 없고 편한 운동화를 신고 걷는 운하는 정말 산책하기 딱 좋은,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물론 관광객들은 여전히 많지만. 작은 결혼식장에 들어가 보았다. 똑똑.


아쉽게도 아무도 없었다. 결혼식을 올리는 커플이 없는 날인가 보다. 사실 기억을 더듬어보면, 3년 전 예약할 때도 원하는 시간에 바로 예약이 가능했기 때문에 어쩜 이곳은 그리 붐비지 않는 식장일지도. 결혼식장 이름이 적힌 벽 앞에는 눈 대신 꽃이 피어있고, 나의 피인 줄 알고 오해했던 마가목은 벌써부터 탐스럽게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공항이 폐쇄되기 전에 내린 친구들 역시 눈이 너무 많이 내려 기차를 타지 못하고 렌터카를 빌려 천천히 올 수밖에 없었기에 예정보다 늦어진 결혼식을 마치고 서둘러 피로연장으로 이동하느라 보지 못한 운하의 야경도 구경한다. 오타루 오르골당만 겨우 구경하고, 르타오에서 치즈케이크를 포장에서 갔던 그때와 달리 사카이마치의 공방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펴보고, 젓가락을 파는 가게에서 나무젓가락도 세트로 샀다. 뭐가 부족할지도 몰랐던 그때와 달리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살림살이가 뭔지 잘 알게 되었으니까.


샤코탄 블루

오타루를 떠나기 전 겨울이라면 안전 때문에 길을 폐쇄할 가능성이 높은 샤코탄 반도의 가무이 미사키에 가보기로 했다. 샤코탄 반도는 '샤코탄 블루'라는 별도의 색이름이 붙을 정도로 바다색이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이 '샤코탄 블루'는 여름철에만 만나볼 수 있다고 한다. 바다가 평온하고 해초가 적을 때 투명도가 높아지며 내는 색이기 때문. 9월이지만 여름 못지않게 더운 이상기후의 날이었던 탓에 우리는 한없이 투명한 샤코탄 블루를 만난 후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


"그래도 오타루에 눈이 없으니 좀 허전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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