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편.
치토세 공항에서 시속 30km로 달려온(?) 다섯 명의 친구가 도착하자마자 결혼식을 시작하기로 했다.
오후 6시.
초대한 가족과 친구들 22명 중 9명은 아직 도쿄 나리타에 있다.
나리타와 오타루의 직선거리는 약 800km.
식순은 한국과 비슷했다.
- 신랑 입장
- 신부와 신부 아버지 입장
- 사회자의 개식 선언
- 윤동주의 '새로운 길' 시 낭독
- 웨딩 반지 교환
- 신랑 신부 키스
- 친구들의 증인 선언
- 신랑 아버지 좋은 말씀
- 샴페인 건배사
- 웨딩 케이크 커팅
- 폐식 선언
- 퇴장
단지 일본인 사회자라 일본어로 식이 진행될 뿐이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친구들이 도움을 주어 식은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식장의 커다란 문이 열리고 신랑이 입장하였다. 함성과 박수, 신랑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수 십 명은 있는 듯했다. 가족과 친구들이 아직 다 오지 못한 상황에 속상할 우리를 위한 친구들의 속 깊은 배려였다. 아빠와 입장하니 신랑 눈에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다른 일정은 변경 없이 가능했지만 신랑 아버님께서 해주시기로 한 좋은 말씀의 대체 요원이 필요했다. 식전에 이 부분을 어떻게 할지 물어온 스태프에게 우리 아버지께 부탁드리겠다고 말해두었다. 신랑이 입장하고 보니 아직 아빠에게 이야기를 못 드렸단 사실이 떠올랐다. 신부 입장을 하며 아빠에게 말했다.
“아! 건배사랑 하객에게 감사 인사 아빠가 해주셔야 하는데?"
신랑이 내게 처음으로 준 선물은 녹음기였다. 인턴기자였던 우리의 역할 중 하나는 ‘녹취 풀기’였다. 선배 기자들의 인터뷰나 취재에 따라가 녹음을 하고, 사무실에 돌아와 녹음된 말을 다시 들으며 글로 타이핑했다. 동의를 받아도, 녹음기가 탁자 위에 올려져 있으면 의식을 하게 되기 때문에 이왕이면 잘 안 보이는 것이 좋다. 안 보이게 두면 음성이 멀어진다. 작고 성능이 좋은 녹음기. 학생에겐 고가인 제품이었지만, 꼭 필요한 것이라 생각되어 샀다고 했다. 지금까지도 신랑은 꼭 필요한 선물을 기념일과 관계없이 꼭 필요한 날에 해주곤 한다. 녹음기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중요한 것은 녹음기가 아니다.
이 녹음기를 준 곳은 그가 나와 같이 가보고 싶어 한 장소였다. 연세대학교 안에 있는 윤동주 시비 앞에서 첫 선물을 건넸다. 평소 하고 있는 생각, 좋아하는 것,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를 장소와 선물을 통해 전했다. 늘 뭐가 들어있나 궁금했던 그의 무거운 책가방엔 때때로 윤동주 평전, 윤동주 시집이 들어 있었다. 국과수 부검 견학을 가서도 겁이 많은 나에게 몇 편의 시를 보여주며 마음을 다스리게 했다.
우리 결혼식에 윤동주 시의 등장은 필연이었다. 물론 결혼식에 걸맞은 시를 선택하는 일은 꽤 난항을 겪었다. 일본에서 식을 하는데,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를 읊을 순 없지 않은가. 마침 영화 ‘동주’ 포스터에 ‘새로운 길’이 새겨 있어 다행이었다.
‘동주’의 촬영지 왕곡마을 사진을 미리 식장에 보냈더니 혼인서약서의 배경도 근사하게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