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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Dec 28. 2016

비행기 밖 공항으로 나가지도 못하였다

같은 시각 도쿄에서는.

오타루 결혼식장까지 오신 길이 얼마나 고되었는지 식장에서 기다리던 우리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 긴박하고 초조했던 상황을 신랑의 선배가 자세히 글로 적어 보내주었습니다. 

글을 읽으며 몇 번이나 울고 웃었는지 모릅니다.



나는 그의 아버지에게 다른 친구가 12시 10분 저가항공편인데 아직까지 결항 등의 이야기 없이 수속을 정상적으로 밟고 있다고 말하며 표를 알아보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저가항공 카운터로 다시 뛰어갔다.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내 핸드폰의 건강 앱의 일일 걷기 목표치가 이때 벌써 달성되었다. 저가항공 카운터에서는 불과 1시간여 후에 출발할 항공편임에도 4장의 표가 남아있고 무엇보다 30분 후까지만 온다면 캐리어를 부치고 수속을 밟아주겠다는 고마운 이야기를 해줬다.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지연되지 않고 계획대로만 도착해준다면 계산상으로 결혼식을 아슬아슬하게라도 볼 수 있는 마지막 비행기 티켓이었다.


모든 일을 겪고 난 지금 돌이켜보면 회의감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회항을 하고 몇 시간을 대기한 끝에 마침내 들어갔으며 날을 넘기기 전에 부모님이 아들과 만나 부모 없는 결혼식이 벌어지는 참사는 막았으니 결과적으로는 "메데타시 메데타시"였을지 모르지만, 삿포로 현지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알게 된 지금 돌이켜보면 위험천만하게 아슬아슬한 상황을 수없이 겪은 끝에 간 것이었다. 그러한 선택은 결코 다시 권유할 수가 없으며, 오로지 전체 상황을 정확히 몰랐기에 감히 할 수 있었던 용감한 선택, 아니 무식한 선택이었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대한항공에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하고 싶었으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서 한시라도 빨리 관계를 마무리 짓고 새로운 항공사로 옮겨가야만 하였다. 나는 짐을 따로 부치지 않았기에 당장이라도 표를 살 수 있었지만, 캐리어를 부쳤던 그의 가족은 아직 짐을 다시 받지 못한 상태이었다. 남은 시간은 어느새 20여분 뿐이었다. 항공사 직원의 떠넘기기를 한번 겪고 보니 넋 놓고 기다리고만 있다가는 시간 내에 짐을 못 받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운터의 항공사 직원에게 몇 번을 반복해서 짐을 빨리 꺼내 달라고 이야기하였다. 현장에 이미 3번 이상 전화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저가 항공사와 약속한 시한을 10분 앞두고 짐을 다시 받을 수 있었다. 결혼식에 제 시간 맞춰 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긴 순간이었다. 모두가 다 같이 희망에 차서 저가 항공사의 카운터로 달려갔다. 저가 항공사에서는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약속대로 우리 일행의 티켓 구매를 진행해 주었다.



탑승 수속은 별다른 지연 없이 제시간에 이루어졌다. 이 편보다 1시간 빠른 11시 출발 예정이던 또 다른 저가항공사에는 신부의 동생과 친구들 4명이 타고 있었는데, 제시간에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불과 1시간 후에 이렇게 다른 항공편이 출발할 것을 왜 대항항공에서는 그 시간을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이날 하루의 항공편을 일찌감치 취소한 것일까 원망이 들었다. 좌석에 앉고서 같은 비행기 편 티켓을 소지한 후배 Y를 찾았다. 전화를 해보니 급하게 들어온 내가 오히려 Y보다 먼저 비행기를 탔다. 깔끔하게 정장을 입은 Y의 얼굴을 보니 반가웠다. 출발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관계로 짧은 대화를 마치고 내 자리로 돌아갔다. 


비행기는 만석이었다. 우리 일행은 각자 띄엄띄엄 좌석을 배정받았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꽉 찬 비행기에서 어떻게 4개의 좌석이 남았는지도 신기하다. 모든 것이 어찌 보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섭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비행기가 다행히 제시간에 출발을 하자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제시간에 떴다. 이제 제시간에 갈 수 있겠다. 긴장이 풀렸다. 새벽부터 6시간이 넘도록 긴장상태의 연속이었다. 점심도 먹지 못한 상태이었다. 신라면 컵라면을 하나 4천 원을 주고 샀다. 하늘 위에서 먹는 라면이 그렇게 맛있다 하는데 허기까지 지니 한 젓가락만에 다 먹어버린 기분이었다. 바닥의 국물까지 다 마셔버린 뒤 속이 든든해지자 귀에 이어폰을 꼽고 시끄러운 메탈 음악을 틀고서 잠을 청했다. 이때가 이날의 유일한 안식의 순간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잠들어 있는 나를 Y가 깨웠다. "형, 이럴 때가 아니야."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물어보자 비행기가 착륙을 하지 못하고 삿포로 근처 하늘을 돌다가 도쿄 나리타 공항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비행기를 타면서 이렇게 다른 공항으로 회항한 적은 처음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비행기에 연료가 부족해져서 간다는 말은 너무나 무섭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비행기 출발 시 잠시 좋아졌던 기상이 다시 악화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될 것을 막무가내로 비행기가 출발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리타로 향하는 내내 얼마 전 대회 결승전에 진출한 축구팀 선수단 전원을 싣고서 연료 부족으로 어처구니없이 추락해버린 브라질의 항공사고 뉴스가 떠올랐다. 


비행기가 다행히 나리타 공항의 활주로에 랜딩을 하는 순간, 나뿐만 아니라 다들 얼마나 항공 사고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는지, 일정대로 못 가게 되었다 같은 생각 따위는 하지도 못하고 단지 사고가 안 나서 너무나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곧바로 휴대폰의 로밍을 켜고 그과 접속을 시도하였다. 이미 오후 5시가 되어서 결혼식을 30분 앞둔 시간이었다. 두어 시간 결혼식을 연기하는 정도로는 그 안에 도저히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결혼식을 오늘 할지 또는 다음날로 미뤄야 할지 날짜 수준에서 고민을 해야 하는 문제이었다. 신부의 부모님은 이미 어제 그, 신부와 함께 결혼식장이 있는 오타루시에 들어가 있었고, 친구들도 생각보다 많이 와 있다고 하였다. 그렇게 사람들이 와 있었다면 결혼식의 날짜를 미룰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랑의 부모님도 없이 결혼을 선언하는 것도 이상한 노릇이었다. 다행히 그의 아버지께서 과감히 결혼식을 계획대로 정해진 시간에 진행하라고 결단을 내려주셨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혹시나 두세 시간 정도 연기한다면 부모님에게 결혼식을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를까 하는 미련을 가졌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다. 결혼식에 못 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무런 연락도 하지 못했다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보면 차라리 이렇게 서로 이해를 구하고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통신이라도 한 것이 다행으로 생각되었다.



나리타 공항에서는 우리 비행기에 대하여 승객들의 항의가 없도록 협조를 구하는 메시지를 수회에 걸쳐 반복하여 전달하였다. 우리는 비행기 밖 공항으로 나가지도 못하였다. 어느새 아침식사를 한 지 12시간이 되어가는데 제대로 된 식사를 여태 한 게 없었다. 나가서 무어라도 사 먹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게다가, 승무원들 또한 비행기가 하늘 위 정상 궤도에 오르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렇게 활주로 위에 멈추어 있는 상태이더라도 음식을 팔 수 없다고 하였다. 답답한 상황이었다. 창문을 통해 활주로를 보니 우리보다 1시간 먼저 출발한 다른 저가항공사의 비행기가 우리와 나란히 서 있었다. 일단 띄우고 보았던 저가항공사의 용기인지 무대책한 행동인지 덕분에 나는 어쨌거나 이렇게 일본 땅 위에 있기는 하였다. 하염없이 승무원들의 다음 조치를 기다리면서 차라리 이대로 서울로 돌아가더라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마음을 비웠다. 


비행기 안에는 단체 관광객이 많았다. 겨울 북해도에 온천 관광을 온 장년층이 다수였다. 비행기에는 이들을 인솔할 가이드 또한 함께 동행하고 있었다. 대다수의 단체 관광객들은 서울로 돌아가도 받아들일 듯한 분위기였다. 어차피 아무런 관광 서비스를 받은 것도, 나아가 목적지 공항까지 도착한 것도 아니기에 여행비도 항공비도 모두 환불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였다. 그러나, 승무원과 가이드는 서울로 결코 돌아갈 수 없었다. 항공사의 입장에서는 기름을 추가로 보충하고도 아무런 매출 없이 모조리 환불하게 생겼고, 여행사의 입장에서도 꼼짝없이 환불을 해주어야 하였다. 그러한 절박감 때문이었을까. 승무원들은 결코 나리타 공항을 떠나지 않고 끈기 있게 신치토세 공항과 연락을 시도하였고, 가이드 또한 북해도 내의 직원과 연락을 시도하며 상황을 파악하느라 분주하였다. 북해도 내 직원과 연락을 한 결과에 의하면 하필 이날 북해도에 29년 만의 대폭설이 내렸다고 한다. 하필 그의 결혼 날에 29년 만의 대폭설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보통 조상들이 결혼식날 가장 날씨 사나운 경우로 기껏 이야기하는 게 비 오는 정도인데, 29년 만의 대폭설이라니... 


다들 반쯤 포기하고 있을 무렵 생각지 못한 긍정적 소식이 들렸다. 신치토세 공항의 눈이 잦아들어 현재 착륙 허가가 내려졌고 나리타 공항으로부터 서류만 받으면 곧바로 출발할 수 있으며 출발을 하면 1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다. 몇 시가 되든 오늘을 넘기지만 말았으면 했는데 참 반가운 소식이었다. 밤 10시든 11시든 오늘만 넘기지 말고 새신랑 새신부의 얼굴을 봤으면 하였다. 그에게 서울로 가지 않고 오타루에 오늘 갈 수 있을 거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6시 반이 되자 드디어 비행기가 출발하였다.



가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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