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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m Sep 18. 2023

9시에는 입장하십니다.

근무 일기

알람이 울리지 않기를, 팔이라도 하나 부러지기를, 기상 이변이 일어나기를, 누구라도 한 분 돌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찰나가 있나요?

아마도 출근을 코 앞에 둔 이른 아침일 것입니다.

덮던 이불을 박차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멀쩡하게 일어나 싱그러운 출근을 맞는 직장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 감히 추측합니다.

월요일 아침 8시 15분 박 부장은 회사 주차장에 도착합니다.

비닐팩에 담아 온 오이를 깨물며 손목만큼이나 굵은 올리브영의 구르프로 앞머리를 말아 놓고,

운전석 의자를 최대한 눕혀 머리가 닿기 무섭게 레드썬.

15분 정도 꿀잠을 청한 뒤 침이라도 흘리지 않았나 거울에 얼굴을 점검하고 사뿐사뿐 사무실로 향합니다.

로그인과 동시에 각종 사이트를 열어재끼며 개인 sns의 눈팅이나 답글을 달고 하나 둘 들어오는 후배들과도 인사를 나눕니다. 그 와중에 오래 다닌 낡은 눈썰미가 발동하여 빌어먹을 연륜이 가동하여 그들의 어제와 요즘의 생활이 저절로 파악됩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내가 가장 빨리 와 연선이는 폰 게임에 손을 떼지 못한 채 세상 가장 발랄하게 인사를,

예쁘지만 여시 같은 효린이는 결혼식 답례품에 손글씨를 쓴 포스트잇을 붙여 직원들 책상에 놓아두고,

노상 늘 매일 아프지 않은 날이 없는 지영이는 오늘도 세상 가장 구겨진 얼굴로 허리를 잡고 자리에 앉고,

매사에 똑 부러지는 아영이는 인사도 똘망똘망 너는 어떤 가정에서 자랐니를 늘 연상케 하며,

입구에서 자리까지 반나절이 걸릴 것 같은 유민이는 오늘도 천하태평하게 자리로는 갑니다.


교복과 같이 흰 라운드 티셔츠에 블랙 슬랙스와 나름 깔끔한 운동화를 신고 크로스 백은 잊지 않는 입사 6개월 차 우리의 민준이. 회사의 전무후무한 비주얼을 담당하며 업무 실수가 있어도 무조건 패스가 되는 후배는 연차와 반차는 절대 누락시키지 않으며 허리를 굽히거나 고개를 숙여 인사하지 않아도 대표에게 지적 한번 당하지 않은 그야말로 히어로 되십니다.


과장이 사수로 있던 입사 초기에는

- 민준아, 이건 아니지 않니? 9시 10분 전에는 앉아 있자.

- 아, 네


- 부장님,, 민준이가 실수해도 혼나지 않아요. 대표님도 절대 부르지 않으세요. 왜 민준이만 한 번도 혼나지 않아요? 전 같으면 완전 난리 치셨을 텐데.


이후 사수였던 과장은 퇴사했고 어쩌다 이사는 민준에게 호구입니다.

그리고 대표는 여자입니다.


오늘 아침도 변함없이 8시 56분에 골인한 디자이너 예서는 역시나 정확하게 자리에 앉습니다.

365일 부모님께서 봉고차로 픽업을 해주시는 축복을 얻으셨으니 효도를 위해서라도 시간 이탈은 아니 될 일입니다.

1분 간격으로 57분에 들어오는 포토그래퍼 후배는 입사 일주일차로 때로는 티셔츠도 뒤집어 입고 출근을 하는데 1시간 30분을 달려 회사에 도착한다는 스토리를 듣고 나니 짠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네 운명이라 냉정하게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박 부장입니다. 나이도 서른이 넘은 직원으로 우연아, 우리 출퇴근 때 눈은 마주치고 앉자 했더니 딱 그것만 해내지 말입니다.



착하고 여린 마음씨 때문에 애써 챙겨주고 싶은 예나는 55분에 메신을 보냅니다.

- 부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버스 배차 간격이 점점 더 멀어져서 오늘 또 늦을 것 같아요. 최대한 빨리 도착하겠습니다.

- 그랴. 오늘 안에만 오고 잘 있다가 퇴근햐.


회사의 사무 업무를 보는 직원 10명 남짓의 출근 모습만 나열해도 하나의 에피소드가 완성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박 부장은 어땠을까요?

종각으로 출퇴근 때는 하늘보다 높은 콧대가 있었고 광명에서 수지까지 출퇴근해야 하는 결혼 전에는 송파에서 날아와 회사 근처에서 내려주는 비밀연애 주인공 지금의 절친이 있었습니다.

대학시절 아르바이트 때 말고는 출퇴근이 힘들어 회사에 민폐를 끼치는 역할은 하지 않은 듯합니다.


투잡을 하거나 게임에 빠지거나 넷플릭스를 보느라 잠이 부족한 그래서 아침이 피곤한 젊은 후배들은 출근에 지치고 업무에 스트레스받고 퇴근이 기다려집니다. 구내식당 메뉴라도 훌륭한 날은 위안을 삼고 선배가 음료라도 쏘는 날은 개이득을 외치며 휴일이 코 앞인 날에는 콧노래가 나옵니다. 야근은 어느 나라 단어이며 미팅 예정 공지는 한숨만 뿜어져 나옵니다.

동료들과 얽히는 업무가 있거나 상사의 꾸지람은 흡연을 유도하거나 반항을 일삼습니다.


서로의 숨결 하나하나. 동선 하나하나.

파악하고 신경 쓰고 공유해야 하는 이 공간은 퇴근과 동시에 출근하고 싶지 않은 곳 아닐까요..


그럼에도 민준이도 예나도 나옵니다. 오고 있기도 합니다.

자기의 노동력을 바치고 고귀한 대가를 받아 내 생활을 해보겠다고 회사에 옵니다.

그리고 다행히 9시에는 입장하십니다.

지각은 아니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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