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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낱 Jul 04. 2022

짠내 나는 에스프레소

 “새로 생긴 에스프레소 바에서 커피 마신 대요. 그리로 오세요.”

 “와. 우리 동네에도 에스프레소 바가 생겼어요?”

 지인으로부터 연락받고 찾아간 에스프레소 바. ‘궁금했는데 나도 가보는구나.’      

 

 얼마 전 TV에서 한 배우가 자신의 일상을 관찰하는 프로그램에서 에스프레소 바라는 곳을 소개한 적이 있다. 에스프레소는 이탈리아어로 고온, 고압 하에서 곱게 간 커피 가루에 물을 가해, 30초 이내에 커피를 추출해 내는 기구, 또는 그렇게 내린 커피를 말한다(출처-네이버 국어사전). 카페마다 다르지만 보통 에스프레소 한 잔의 양은 25ml~35ml이다. 어린이가 감기에 걸렸을 때 병원에서 처방받은 먹이는 물약의 양이 15ml 정도이다. 그것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의 에스프레소를 몇 잔이나 마신 후 앙증맞은 잔을 쌓아 놓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인플루언서들이 많다.      

 

 처음 가본 에스프레소 바는 생각보다 훨씬 넓어서 깜짝 놀랐다. 왠지 에스프레소 바는 테이블을 놓기도 힘들 정도로 좁아서 대부분 서서 홀짝홀짝 마시고 훌쩍 떠나버리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사람은 말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멋진 슈트를 입은 잘생긴 이탈리아 남성이라고 상상해버린다. 후훗. 짙은 브라운 컬러의 인테리어도 테이블마다 올려진 투명하고 반짝이는 스탠드 램프도 마음에 들었다. 유행하는 에스프레소 바에 왔지만 무얼 어떻게 마셔야 할지 기나긴 이탈리아어 커피 이름들 속에서 고민했다. 그럴 땐 주인장이 추천하는 것을 마시는 것이 정답일 듯했다. 마침 그 가게의 시그니처 커피가 있길래 그것을 주문했다.      

 

 내가 주문한 <이름이 너무 길어 슬픈 에스프레소>(진짜 이름은 아니에요)가 나왔다. 동그란 은쟁반에 작은 소서, 그 위에 더 작은 에스프레소 커피잔, 스푼, 그리고 그 옆에는 물이 담긴 유리컵이 한 잔 올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에스프레소가 쓰니까 물도 같이 주나 보다. 작디작은 에스프레소 잔의 테두리에는 반짝이는 고운 가루가 입혀져 있었다. 커피 안에는 부드럽고 쫀득한 크림이 올려져 있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니 잔의 테두리에 뿌려져 있던 가루와 크림이 한꺼번에 입안으로 들어왔다. 레몬 사탕을 아주 곱게 갈아 놓은 듯한 가루로 인해 새콤하기도 하고 달콤하기도 하고 심지어 짭짤하기도 한 맛이 느껴졌다. “맛있다” 무심코 육성으로 뱉었다. 내 기억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쓰기만 하던 에스프레소의 맛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달콤하고 부드럽고 새콤한 에스프레소를 맛보고 나니 20년 전 그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아직 커피 아메리카노의 맛도 모르고 그저 커피 믹스가 제일 맛있는 커피라고 여기던 아기 입맛이었다. 도쿄의 신주쿠 한 카페에서 지인들과 만나기로 했다. 친한 언니가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 학생을 소개해 준다고 했다. 일단 카페에 가서 각자 마시고 싶은 음료를 고르는데 에스프레소라는 것이 다른 음료들보다 월등히 저렴했다. 반값이었다. 에스프레소가 도대체 뭘까? 궁금해하면서 나는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내 음료를 받아 들었을 때의 그 황당함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주 작은 컵에 진하고 걸쭉하게 보이기까지 한 까만 액체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 내 커피는 왜 이렇게 양이 적지? 값이 싸서 그런가?’ 무식한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처음 만나 어색하기는 했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맞춰가며 내가 받아온 마녀 수프 같은 검은 액체를 한 모금 삼켰다. ‘우웩! 이게 뭐지? 세상에 이렇게 쓴맛이 존재하다니. 망했다.’ 혼자서 온갖 생각을 했다. 그때는 설탕을 넣어 마실 생각도 못했다. 그저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내 표정의 변화를 본 사람들이 괜찮냐고 물었고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괜찮다고만 했다. 이런 에스프레소쯤이야 늘 마시던 거라는 듯이. 푸하하핫. 조금이라도 아껴볼 생각에 그 카페에서 가장 저렴한 커피를 골랐던 대가를 불쌍한 혀가 치렀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중에 알았다. 내가 마신 그 에스프레소라는 것에 물을 부어 아메리카노를 만들고 우유를 넣어 카페 라테를 만든다는 것을. 결국 나는 내가 마시던 커피의 원액을 시켰던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듬뿍 넣어 달고 쓴 맛을 즐긴다고 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누군가가 뜨거운 에스프레소에 각설탕을 살살 녹이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고 했다. 나도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에스프레소를 즐기고 싶어서 ‘앵무새 설탕’으로 유명한 ‘라빠르쉐’ 각설탕까지도 사보았다. 하지만 그때 그 기억이 너무나도 끔찍했기에 쉽게 도전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혔던 에스프레소가 요즘 붐이란다. 에스프레소 바가 생겨나고  잔도 모자라 ,  잔씩 마신 컵을 쌓아 올려놓은 사진들을 보며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는 걸까 궁금했다. 다시 도전하고 싶어 찾아갔던 에스프레소 바에서 마셨던 에스프레소는 내가 옛날에 마셨던 것과 완전히 다른 맛이었다. 한편으로는 속을 긁어버릴 것만 같던 까만 쓴맛이 나지 않아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그 쓴 커피를 다시 한번 맛보나, 오늘은 정복하리라 벼르고 왔는데 말이다.

 

 분위기 좋은 에스프레소 전문점에서 마시기 쉽고 세련되게 진화된 에스프레소를 맛보고 나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멋모르고 주문했던 쓰디쓴 에스프레소를 놀란 기색 감추고 태연하게 마실 수밖에 없었던 아주 젊은 내가 생각나서 웃음도 나고 보고 싶기도 했다.      

 

 20년 전, 모든 것을 가격 기준으로 선택했던 젊은 유학생의 에스프레소에는 쓰지만 생활감의  짠내가 났다. 어느새 세월이 훌쩍 흘러 흰머리에 잔주름은 쪼글쪼글하고 나이는 들었지만 분위기와 트렌드는 즐기고 싶은 지금 아줌마의 에스프레소에는 그때 그 젊음이 그리워 짠내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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