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베스트셀러는 일단 피하고 보는 청개구리가 산다. 그렇다고 해서 베스트셀러를 읽지 않는 것은 아니다. 스테디셀러로 돌아서고 난 후 읽는다고나 할까.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때 그 책’ 하고 생각이 나서 찾아보면 여전히 인기 있는 책이 있다. 인기가 있어서 읽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그런 책들은 오래 살아남은 이유가 있다.
<<불편한 편의점>>이라는 책이 작년부터 엄청나게 인기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그런데 그즈음 비슷한 계열의 책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 같다. 서점에서 본 그 책들은 표지마저도 다들 비슷한 그림체였기에 읽기도 전에 조금 식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떤 내용인지는 전혀 몰랐지만 그냥 대충 어떤 내용일지 짐작이 가길래 굳이 사서 읽어 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한때 다양한 방법으로 독서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종이책 말고도 오디오북, 전자책 등을 공격적으로 이용했다. 태블릿 PC는 눈에 무리가 간다고 해서 유명한 북튜버가 추천하는 e북 리더기를 사서 읽기도 했다. 오디오북은 설거지하거나 청소하면서 듣기도 했지만 역시 놓치는 부분이 많아 아쉬웠다. 전자책은 확실히 접근성이 좋아 많은 책을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휙휙 대충 읽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해진 결제 프로그램으로 거의 무한대로 책을 읽을 수 있었지만 정작 내가 읽고 싶은 책은 없다든지, 기기의 배터리가 너무 빨리 떨어져서 충전을 달고 살아야 하는 게 불편했다. 그래서 모처럼 장만한 e북 리더기는 또 서랍 깊숙한 곳에서 잠들어야 했다. 어얼리 어답터의 길은 멀었다.
전자책에 대한 흥미가 떨어져 다시 종이책으로 돌아와 이 세상에는 종이책밖에 없는 것처럼 살고 있었는데 업무 관계로 꼭 써야 하는 전자책 스트리밍 서비스에 <<불편한 편의점>>이 들어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궁금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 책을 담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예상대로 ‘으흠... 그렇군...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의 사연들이 나오는군’하며 약간 다 안다는 기분으로 읽고 있었다. 편의점 사장님과 노숙자의 첫 만남의 장면은 옛날 옛적 ‘MBC 베스트셀러 극장’이라는 단막극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 광경이 생생하게 그려졌다(나이 상상 금지).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에 푹 빠져들기 시작했다.
남편은 집을 구할 때 제1조 건으로 편의점과의 거리를 꼽을 정도로 편의점 러버다. 편의점마다 나오는 상품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고, 매번 새로 나오는 각 편의점만의 컵라면과 과자들을 종류별로 다 사서 즐긴다. 반면에 나는 편의점에 크게 관심 없다. 있으면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즐겨 찾지는 않는다. 당연히 그곳에서 파는 각종 도시락이나 음식들에 별로 관심이 없다. 특히나 차가운 도시락을 데운다고 해도 맛있을 리가 없으며 그 반찬들은 내가 먹지 않는 제육볶음류가 많기 때문에 편의점 도시락을 먹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먹어 본 적도 없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편의점 도시락을 먹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좋아! 오늘 점심은 편의점 도시락이야!’
특별히 약속이 없는 한 집 밖을 나가지 않는 내가 평소 먹지도 않는 편의점 도시락을 사기 위해 집을 나섰다. 주인공 ‘독고’씨가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도 마시고 남에게도 권하던 ‘옥수수 수염차’를 사는 것도 집을 나서는 목적에 포함되어 있었다. 먼저 집 앞에 있어 그래도 조금은 친숙한 편의점에 먼저 갔다. 실망스럽게도 도시락 종류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아무리 책을 읽다가 도시락을 사기 위해 뛰쳐나왔지만 막상 차가운 도시락 앞에 서자 이성이 돌아왔다. 나는 먹을 수 없는 종류의 반찬들만 있는 도시락은 과감히 포기하고 괜히 2+1의 컵반 종류만 잔뜩 사서 돌아왔다. 편의점에서 그야말로 플렉스 했다. 편의점 도시락을 포기 못해 집 뒤에 있는 편의점을 또 찾았다. 거기도 도시락류는 제대로 갖춰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락류는 학생이나 직장인이 많은 동네에 많이 있을 텐데 말이다.
그곳에서는 나도 커피를 좀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옥수수 수염차를 샀다. 옥수수 수염차라는 말은 이 책을 읽은 사람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암호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쯤에 중독되어 있지 않을까. 칭찬받고 싶은 욕구, 담배, 술, 커피, 돈, 명예, 과시, 1등, 연인, 명품, 그릇, 고시 공부 등 갖지 못한 어떤 것들, 혹은 가져도 가져도 목마른 어떤 것들에 대한 중독. 그런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문을 외우듯 맑은 갈색 액체를 투명 유리컵에 찰랑찰랑 채워 홀홀 마신다. 내 안의 집착이 조금이라도 빠져나가길 바라면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꼭 대단한 방법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독고 씨는 가르쳐 주는 것 같다. 그저 몰두해 있는 것에서 잠깐 눈을 뗄 수 있으면 된다. 아주 단순한 해결책이지만 이게 또 꽤 잘 먹힌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외국 속담처럼. 한때 세계에서 제일 크다고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던 백화점이 있는 동네에서 살 때는 보이는 것마다 갖고 싶은 것들 뿐이었다. 갖고 싶다고 해서 누가 거저 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허영에 들떠 살다가 보이는 것이 없는 동네로 이사 오니 그런 물욕이 사라졌다. 독고 씨가 술 대신 그저 옥수수 수염차를 마신 것만큼이나 간단한 해결 방법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이 생활에 만족하며 살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많은 반짝이던 것들이 내 인생에 큰 의미가 있던 것은 아닌 게 확실했다.
편의점에 갔을 때 뭔가 허전해서 습관적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샀지만 아직 냉장고 안에 있다. 그 대신에 옥수수 수염차를 마셨다. 정작 독고 씨는 별 뜻 없이 고른 음료였다고 했지만 나에게는 이미 특별해졌다. 가끔은 커피 대신 옥수수 수염차를 마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제, 옥수수 수염차를 보면 독고 씨가 생각 날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