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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낱 Jun 26. 2022

금쪽이에게 건네는 사과의 커피


 그날 아침은 내가 생각해도 아슬아슬했다. 며칠째 주방에 전혀 손대지 않고 있었다. 식탁 위에 쌓인 책, 노트며 싱크대 위에 주르륵 줄지어 있는 텀블러들, 각종 잡동사니들. 하나같이 제자리에 놓여있지 않고 너저분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주방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거실의 소파 주변도 마찬가지였다. 뭔가를 올려놓을 수 있을 만한 편평한 곳에는 어김없이 책이 몇 권씩 쌓여있고 노트북, 머리끈, 커피를 마시고 난 빈 컵들, 각종 종이 뭉치들이 올려져 있어서 어수선했다. ‘아, 이건 좀 심한데? 좀 치워야겠네’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남편이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딸아이 등교시킬 준비를 하며 나는 알겠다, 알겠다. 치우려고 했다는 소리만 반복했다. 남편은 한 번씩 필이 꽂히면 잔소리를 한다. 바로 그날이었다. 당연히 언짢은 기분으로 등교와 출근을 시키고 슬슬 치우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완벽하게 치우지는 않는다. 정식으로 시간을 내서 치울 심산이다. 저질 체력인 나는 뭔가를 한번에 뚝딱 해 내는 게 힘들다. 어릴 땐 혼자 목욕탕에 가서 때 미는 게 힘들어 몸의 반쪽만 밀고 온 적도 있었다. 그 얘기를 들은 언니는 아연실색했지만.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금쪽같은 내 새끼’라는 프로그램을 아는지. 오은영 박사님이 어떤 문제가 있어 상담을 하러 나온 부부와 자녀를 상담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방송에서는 문제 행동을 하는 자녀를 ‘금쪽’이라고 부른다. 문제 행동을 해도 금쪽같은 내 새끼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네가 이런 행동을 해서 내가 너무 힘들지만 너를 사랑하는 것은 원초적인 것이기에 의심하지 말아라’ 하는 의미가 담긴 것이 아닐까.


 그런 부모의 사랑과는 별개로 내 안에도 금쪽이가 산다. 정리를 못하는 금쪽이. 나는 정말 정리가 힘들다. 각기 다른 쓰임새의 물건들이 널려 있으면 그냥 못 본 척하고 싶어 진다. 모든 물건이 원래 있던 장소에, 혹은 있어야 할 장소에 보내면 되는데 그냥 생각이 하기 싫어진다. 결정적으로 나는 별로 불편하지가 않다. 다른 곳에 있어야 할 무언가가 며칠 동안 식탁 위에 있어도 딱히 거슬리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 한두 개였던 것이 점점 모이게 되면 ‘어? 안 치우면 위험하겠는 걸’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내가 봐도 정신 사납다고 느껴질 때가 온다. 그럴 때 정리하는 걸 좋아하는 남편이 치우면서 참다못해 한마디 하기 시작한다. 한마디가 시작되면 점점 더 구체적인 잔소리로 이어지기 때문에 나는 얼른 수긍하고 재빠르게 치우는 몸짓을 취한다. 빨리 빠져나가기 위해서다.


 내가 살림을 못하고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마도 정리정돈이 힘들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 본다. 살림살이의 정리정돈은 고도의 사고 능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크기와 쓰임새가 제각각인 물건들을 일정한 기준에 맞춰 정한 장소에 두어야 한다. 수납공간이 아직 여유가 있을 때는 그나마 괜찮다. 어떻게든 그곳에 넣으면 되니까. 문제는 공간이 부족한데 물건은 자꾸 생기고 그것들을 쑤셔 넣다시피 해야 할 때다. 크기와 모양이 다른 물건들을 최대한 죽어버리는 공간이 생기지 않도록 ‘테트리스’ 하듯이 머리를 써야 한다. 남편은 캠핑 갈 때도 그 많은 짐을 딸아이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고 승용차 트렁크에 다 실어 다닐 정도로 테트리스를 잘했다. 하지만 그 물건을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의 편의는 생각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저 각 맞춰 잘 넣고 문이 닫히면 만족하는 타입이다. 남편이 정리한 후 내가 쓰려고 하면 깊은 구석에서 자주 쓰는 물건을 꺼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내가 주로 쓰는 물건들이니 내가 직접 정리해야 하는 게 맞는데 그게 힘드니 살림이 힘들 수밖에. 살림의 50% 이상은 정리정돈이니까.

 

 대부분의 청소, 빨래, 설거지 등은 기계가 다 한다. 기계 사용 전후의 정리정돈은 사람이 해야 한다. 청소기를 밀기 전 바닥에 나뒹구는 큰 물건들은 제자리에 놔두고 빨래는 분류, 먼지망 청소를 하고 돌려야 하며 식기 세척기 작동이 끝나면 그릇을 종류별로 수납장에 차곡차곡 정리해 넣어야 다음 설거지가 미루어지지 않는다. 일련의 작업들이 물 흐르듯이 부드럽게 흘러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초 체력 제로인 나는 한 가지 일을 끝내고 쉬다가 다음 작업은 미루고 계속 쉬게 된다.


 아무리 나의 취약점을 내가 잘 안다고 해도 아침부터 잔소리 들으면 기분은 상한다. ‘그래, 요즘 계속 외출할 일이 많아서 집안일에 소홀하긴 했지’하는 반성도 하게 되지만 괜히 쭈글 해진다. 그날, 대충 눈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치우고 나서 또 소파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때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딸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에 잠깐 들를 일이 있다고 한 날이었다.

 

 “뭐 하노?”

 “뭐하기는, 치우고 있지.”

 “커피 한 잔 뽑아갈까?”

 “그러든지.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알겠다.”


 전화를 끊고 나니 피식 웃음이 났다. 이 부산 남자가 아침의 일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저렇게 커피 한 잔 뽑아다 준다는 말로 미안했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라고 이제는 알아차린다. 비록 민망함에 퉁명스럽고 쭈뼛거리는 말투지만 20년 넘게 살다 보면 다 알게 된다. 그럴 땐 나도 그냥 모르는 척 받아준다. ‘미안하기는 미안하나 보네. 흥.’


 아침부터 사과의 아아를 마시며 내 안의 금쪽이를 생각해 봤다. ‘너 도저히 어떻게 안 되겠니? 우리 이제부터 바로바로 치워볼까?’ 언제나 다짐은 해 본다. 한편으로는 지저분한 꼴을 절대로 못 보고 재깍재깍 치워버리게 되어서 내 금쪽이가 사라져 버리는 것도 조금은 아쉬울 것 같다.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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