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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낱 Apr 20. 2022

가는 봄이 아쉬워 나 혼자 커피 소풍


 길고 추운 겨울이 드디어 끝나려나 보다. 따스한 햇볕이 그리워 성급하게 산책을 나서고는 했다. 그렇게 나선 낮 산책에서 마시던 커피는 내리쬐던 햇살이 무색할 정도로 차갑던 바람에 금방 식어버렸다. 분명히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테이크 아웃해서 벤치에 앉아 마시기 시작했지만 이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온몸이 오들오들 떨리기 시작하면 함께하던 이와 다음을 기약하며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전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뜨거울 지경이다. 창문을 열어 두어도 더 이상 차가운 바람이 들이치지 않는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들은 연두색을 언뜻언뜻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곳을 갈 때가 왔군.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사  아파트의 단지를 둘러보다가 너무나 사랑스러운 장소를 발견했다. 어린이 물놀이터 바로 앞에 있는 낮은 복층 테라스 건물이었다.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는 동안 보호자들이 지켜볼  있는 자리를 만들어 놓은 곳이다.  건물의 2층에 나무 데크를 깔아놓고 테이블  개와 의자 여덟 개가 놓여있었다.  장소를 보는 순간 ‘여기서 살랑살랑 바람맞으며  읽으면 진짜 기분 좋겠다 생각이 들었다.


 그날  자려고 누우면서 본격적으로 소풍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피크닉 바구니에 종이컵을 챙기고 뜨거운 물을 성능 좋은 텀블러에 채우고 드립백 커피를 준비하자. 그리고 읽을 책도 챙겨야지. 꽃바람 살살 부는 야외에 앉아 내가 내린 커피를 마시며  혼자 소풍 놀이할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 댔다. 일찍 자야 내일 작전을 무사히 완수할 텐데 새로운 시도에 오랜만에 설레서 쉽게 잠들지 못했다. 내가 앉으려고 했던 자리를 동네 주민들이 이미 차지하고 있는 꿈까지 꿨다. 그게 뭐라고.     

 

 아침에 등교와 출근을 시킨 후 소파에서 늘어지지 않고 계획대로 진행했다. 한 단체에서 피크닉 세트라는 것을 받았다. 받은 사람들은 목욕탕 가방이냐며 빈정 거리기도 했지만 그렇다 한들 어떠하리. 오늘을 위해 내게로 왔나 싶은 피크닉 바구니를 꺼냈다. 흔히들 생각하는 갈색 라탄 피크닉 바구니가 아니라 예쁜 연보라색에 옆으로 길쭉한 타원형의 플라스틱 피크닉 바구니다. 거기에 튼튼한 종이컵 몇 개(혼자지만 만일을 대비해서)와 부산에서 유명한 ‘모모스 커피’의 드립백 커피 두 개, 혹시 갑자기 차를 마시고 싶을지도 모르니까 맛있는 ‘오설록 삼다 꿀배 티백’도 챙겼다. 보기만 해도 나의 소중한 뜨거운 물을 확실히 지켜줄 것만 같은 ‘스탠리 텀블러’에 온수를 가득 담아 조심스럽게 피크닉 가방에 눕혔다. 물티슈와 쓰레기를 담아올 비닐봉지도 준비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오전 일찍부터 엘리베이터를 탔다. 함께 탔던 다른 사람들은 틀림없이 목욕탕 가는 아줌마라고 생각했을 게 분명했다.     

 

 룰루랄라 나는 목적지로 향했다. 이 시간에 돌아다니지 않아 몰랐는데 모두 학교와 직장으로 떠난 아파트 단지는 고요했다. 그때 봐 두었던 ‘그곳’에는 역시 아무도 없었다. 사람은 없었지만 쓰레기는 있었다. 테이블은 각종 아이스크림 자국들로 더러웠다. 아직 찾는 사람이 많이 없어서인지 관리가 이곳까지 미치지는 않나 보다. 하지만 그게 뭐 큰일이라고. 가져온 물티슈로 그나마 깨끗한 테이블과 의자를 박박 닦아 내가 앉을 공간을 마련했다. 떨어져 있는 아이스크림 봉지도 주워 담았다. 그 수고로움조차 재미났다.      

 

 자리를 정돈하고 의자에 앉아 단지를 내려다봤다. 요즘 아파트 단지 내 조경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지 웬만한 수목원 부럽지 않다. 구역별로 예쁘게 심은 나무며 각종 풀꽃들. 겨울 동안 앙상한 가지만 보여주던 어린 나무들에게서 오도도톡 날치알 씹듯이 새순들이 터져 나왔다. 나는 이때가 일 년 중 가장 예쁜 시기라고 생각한다. 온 세상이 곧 밝은 연두색으로 변할 마법의 순간이다. 하지만 그 시기는 아주 짧다. 그 순간을 놓치면 또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 내가 앉은 테이블 자리에서 놀이터가 보였다. 아직 어린이집을 다니지 않는 아기가 엄마와 함께 놀러 왔다. 이 지구 행성에 도착한 지 이제 3~4년이 되었을 생명체가 아장아장 걸으며 세상과 접속하는 게 보였다. 꼭 봄 같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릴 시기.


 혼자 자세 잡고 앉아 바구니를 열고 가져온 것들을 주섬주섬 꺼낸다. 쟁반에 종이컵을 올리고 드립백 커피를 뜯어 걸쳐 놓는다. 뜨거운 물을 조금씩 살살 흘려보낸다. 그럼 또르륵 또르륵 커피가 떨어진다. 부드럽고 상냥한 바람이 기분 좋게 내 머릿결을 흩트리고 지나간다. 아. 행복하다. 조금 있으면 더워지고 뙤약볕에 기미를 걱정해야 한다(일 년 내내 걱정이기는 하다). 춥지도 덥지도 않아 너무나 사랑스러운 시기. “봄아,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소리 지르고 싶을 만큼 오래오래 기다렸지만 언제 왔다 갔는지 모를 정도로 스쳐 지나가 버려서 놓치기 일쑤다. 그야말로 기간 한정, 리미티드 기간. 개점 시간을 기다리다가 개점하면 바로 달려간다는 백화점 오픈런이 아니라 봄 오픈런을 해야만 한다. 특히나 집 밖을 나가기 귀찮아하는 나 같은 집순이는 봄을 즐겼어야 했다며 후회하기 전에 더 적극적으로 노랗고 파랗고 빨간 봄을 만끽할 일이다. 가는 봄이 아쉬워 내 집 앞에서 즐기는 나만의 커피 소풍. 멀리 나가지 않고도 이 넓은 곳을 오롯이 나 혼자 누리며 여유롭게 호사를 누린다. 이 봄이 다 가기 전에 몇 번은 더 해야 할 텐데. 힘내자 집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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