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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낱 Mar 16. 2022

피곤할 땐 역시 믹스 커피

 나는 아이들을 괴롭혀 글을 쓰게 하고 그것을 재미있게 읽고 있는 고약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실컷 오늘의 책에 대한 내용과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설명했는데도 정작 글을 써야 하는 시간이 오면 자동 얼음이 된다. 날카로운 질문으로 얼음을 깨 주기도 해야 하고 힌트를 마구 던져주며 얼음을 녹이기도 해야 한다. 그래도 스스로 쓰고자 하는 친구들은 괜찮다. 아예 생각을 닫아버리고 쓰기 싫다고 버티면 서로를 괴롭히는 관계가 된다. 이럴 때마다 ‘나는 지금 왜 이러고 있나’ 자괴감마저 들 때가 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가 있었다. 물론 책을 좋아해 많은 책을 읽고 있었고 글을 쓰는 수준도 또래에 비해 높았다. 매번 어떻게든 오늘은 쓰지 않고 넘어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과 실랑이하고 나면 진이 빠진다. 그 와중에 이 친구는 신인류 같은 느낌이었다. 그 어떤 주제와 갈래를 써야 하더라도 거침없이 쓴다. 처음 왔을 때는 아직 다듬어야 할 부분들이 있었지만 날이 갈수록 글이 너무 좋아져 읽는 게 즐거웠다. 나는 이 친구를 통해 좋아서 하는 글쓰기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어느 날,  토론 수업을 하고 나서 자신의 주장에 맞춰 논설문을 써오라는 숙제를 내주었다. 보통 이런 숙제를 내주면 아이들은 싫다고 난리가 난다. 그러나 이 친구는 “아, 매일 쓰던 글 대신 이걸 쓰면 되겠네요.” 하며 쿨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 반해버린 적도 있다. ‘그렇구나. 너는 매일 글을 쓰고 있었구나. 어쩐지 글이 정말 좋아지더라.’ 순간 부끄러웠다. 나도 나름대로 글 좀 써보겠다며 깨작거렸는데 글이 안 풀린다, 피곤하다, 바쁘다며 매일 쓰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내 글이 나아지길 바랐다니. 바빠 봤자 K-초딩만큼 바쁘겠으며 피곤하겠는가.      


 몇 년 전에(시간이 참 빠르다) 에세이 모임에 참여했다. 그 모임을 이끌어주시던 작가님은 우리에게, 나에게 끊임없이 매일 써야 한다고 했다. 많은 작가들이 회사원처럼 성실하게 매일 정해진 시간 동안 글을 쓴다고 했다. 글쓰기도 근력이 붙어야 하니까. 게으른 나는 딱히 필이 꽂히지 않으면 쓰지 않았다. 글도 한창 쓸 때는 별 고민 없이 써지지만 안 쓰기 시작하면 백지상태가 된다.     


 쓰고 있던 주제의 글이 있어 마무리해서 끝을 보고 싶었지만 다시 시작하는 게 힘들어 계속 미루고 피하고만 있었다. 그 끝이 무엇이 되었든 이제 놓아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주제가 마무리되지 않으면 다른 글들로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두세 가지가 동시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벼르고 별러 쓰던 글들을 모아 출판사에 투고해 보았다. 채택되든 안 되든 나는 내가 쓴 글들에게 할 만큼 했으니 여한이 없다고 당당히 말하고 싶었다. 남들은 몇십 군데에 투고한다고 하는데 나는 꼴랑 다섯 군데에 원고를 보냈다. 아무리 기대를 안 한다고 해도 메일함을 들락거리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몇 주 뒤 현실을 깨달았다. 물론 몇 군데 더 넣어보겠지만 처음 투고할 때만큼 긴장되거나 설레지도 않는다. 원래 책을 쓰는 게 목표가 아니었다. 그런데 출판사에 투고하기 위해 글을 마무리하다 보니 자꾸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글이 되어갔다. 이렇게 하면 눈에 들까? 이렇게 하면 편집자의 구미를 당길까? 투고 후 반응이 없자 오히려 마음이 더 편안해졌다. ‘왜 내가 책을 꼭 내야 하는 거지? 그냥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기만 하면 되는 건데.’      

 

 며칠 전 갑자기 글이 쓰고 싶어졌다. ‘써라, 써라’ 하지 않아도 그냥 매일 쓰고 싶어졌다. 써야 해서 쓰는 게 아니고 쓰고 싶으니까 쓰게 된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난 후 아무리 피곤해도 컴퓨터를 열게 되었다. 나는 왜 갑자기 쓰고 싶어진 것일까. 생각해 보면 책을 내야 글이 마무리된다는 강박이 사라지고 난 후였다. 출판으로 이어지면 가장 좋은 결론이겠지만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결혼이 끝이 아니라 그냥 연애만 실컷 하고 싶은 기분. 책에 어울리는 주제나 분량이 아니더라도 그때그때 내가 느낀 것들을 가볍게 남기고 싶다.  

 

 오늘은 딸이 마트에 살 것들이 있다며 나를 불러냈다. ‘모처럼 쉬는 날이라 집에서 뒹굴거리고 싶었는데.’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나갔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볼일을 다 보고 와서 밥까지 챙겨 먹이니 피곤이 몰려왔다. 이렇게 피곤한 날은 달달한 게 당긴다. 나에게 달달함이란 초콜릿도 사탕도 아니다. 내가 허락하는 달달함은 오직 믹스 커피뿐이다. 당이 떨어졌다, 지쳤다 싶은 날은 종이컵에 믹스 커피를 탄다. 암만, 믹스 커피는 종이컵이지.      

 

 급속  충전을 하고 나서 컴퓨터를 열었다. 이전까지의 나에게는 있을  없는 일이었다. 몸이 천근만근 피곤한데 글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다니. 역시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극복되나 보다. 내가 좋아서 쓰는 . 지금은 이런 글을 쓰고 있지만  언제 쓰기 싫어질지 모른다. 내일 그럴지도. “ 내가 하기 싫은 일로 성공하긴 싫어”.  자꾸  노랫말이  머릿속을 뛰어다니는지 모르겠다. 그냥 역으로 생각하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겠다는 거잖아. 나도 그냥 이렇게 살려고 한다.      

 

 요즘 자주 그 친구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여전히 글 쓰는 것을 재미있어할까? 여전히 작가가 꿈일까? 글은 또 얼마나 좋아졌을까. 기대된다. 올해 입학한 중학교 생활은 어떤지 안부 문자라도 넣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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