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현 Jan 09. 2020

'배려'

아무것도 아닌 단어 하나

마주한 누군가의 마음을 쉽게 헤아릴 수 있었다. 재능이라고 하기에는 좀 이상하지만 상대를 보고 있으면,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금세 떠올랐다.  그래서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기대와 바람을 갖고 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고, 나는 약간의 수고로움으로 상대방의 기대와 바람을 들어주었다.


상대가 적극적인 사람으로 보이면 나는 그의 말을 듣는데 중점을 두었다. 상대가 소극적인 사람으로 보이면 내가 대화를 주도했다. 그렇게 상대방에게 좋은 사람,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크게 어렵지도 않았다. 마치 남들이 오지선다 문제를 풀 때 나는 O.X 문제를 푸는 것과 비슷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배려심 있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집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친구 사이에도, 동료 사이에도, 연인 사이에도... 그렇게 나는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꽤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내가 감당해야 할 유무형의 손해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들의 기대와 바람을 못 본척해서 불편해질 내 마음보다는 그게 더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나는 항상 누군가를 배려했다. 나의 배려에  모두들 처음에는 미소 짓는 얼굴로 감사하다고 했다.


나는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YES맨이 되었다.  그리고 점점 지쳐갔다. 사람들은 더 이상 내 배려에 미소 짓지 않았고, 점점 더 많은 것을 나에게 원했다. 그리고 그건 친분의 깊이와 무관했다. 배려에서 시작한 일이 내 업무가 되었고, 그렇게 생긴 내 업무는 점점 더 늘어났다. 나는 더 이상 누군가를 배려하며 웃을 수 없었다. 연인에게 했던 배려는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임무가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나를 보며 더 이상 웃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길을 잃어버렸다.


변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기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결국 모두 다 변했다. 슬프게도 그것이 나에게 선명하게 보였다. 차라리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순간도 있었지만, 너무나 또렷하게 보였다. 오랜 고민과 아픔 속에 나는 사람들을 떠나보냈다. 보내면서도 홀가분하지 않았다. 내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하던 과거의 그 사람 얼굴이 나를 아프게 했다.


지금의 나는 누군가의 기대나 바람이 보여도 눈을 감는다. 마치 귀신을 보는 이가 보이지 않는 척하며 살듯 그렇게 산다. 배려에 미소 짓던 이가 그것을 잃어버리고 그럼 나는 또 누군가를 떠나보낼 것을 알기에... 외로움과 고독이 나를  찾아와도, 불현듯 누군가가 떠올라도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이제 누군가를 배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배려에 아파할 나 자신을 배려한다.


배려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미소 짓게 했지만 정작 나 자신을 배려하지 못해 울게 했다. 세상이 내 마음처럼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을 잊었고, 내가 항상 누군가를 배려할 필요는 없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그래서 나는 이제 눈을 감다.

이전 03화 '회색'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