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우리의 생각 속 희망을 눈에 보이는 어떤 물체로 표현하면 희망은 어떤 모습일까? 그 물체는 분명 새하얀 흰색일 것이다. 또한 그 물체와 가까워지면 은은하면서도 그것을 맡는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향기가 날 것 같다. 또 그 물체를 만져보면 분명 사포 같은 까끌까끌함이 아닌, 기분이 좋아지는 말랑말랑한 촉감을 우리에게 선사할 것 같다. 그리고 희망이라는 물질에 다가가면 천상에서 연주될 것 같은 감미로운 하프 소리가 들려야 한다. 그리고 혹여 희망이라는 물체를 입으로 먹을 수 있다면 솜사탕같이 달콤할 것이라 우리는 믿는다.
그렇게 우리에게 희망은 완벽하게 좋은 것이어야 한다.
나에게도 희망이라는 것이 그런 존재였을까?
나에게 희망은 좀 달랐던 것 같다.
프로메테우스가 올림포스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자 제우스는 인간에게 불행을 주고자 했고, 그래서 상자를 만들고 그 속에 온갖 고통과 악을 넣어 판도라라는 여자와 함께 지상으로 보냈다. 그리고 끝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판도라가 그 상자를 열었고, 급히 상자를 닫았을 때는 그 속에 희망 하나만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판도라가 다시 상자를 열어 희망 또한 이 세상에 퍼졌고, 그래서 온갖 안 좋은 일이 닥쳐도 희망 또한 존재한다는 이야기..
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과연 희망이 내게 긍정적이었는지에 대해 회의감이 든다.
애초에 제우스가 인간에게 벌을 내리기 위해 넣은 것 중 하나가 희망이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희망의 이미지대로라면 제우스는 희망을 판도라의 상장에 넣지 말았어야 한다. 그런데도 제우스는 인간을 벌주기 위한 온갖 것 중 하나로 희망을 넣었다. 왜 인간에게 벌을 주고자 했던 제우스가 희망을 넣었을까?
나는 어느 순간부터 삶이 희망에 속고 또 속는 일의 반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실하게 무언가를 바라고, 간절히 원하고, 계속 애태우고, 끝까지 고대했지만, 결국 그건 내 것이 아니었었다. 한줄기 희망을 품고 노력했지만 결국 나는 원하는 것을 갖지 못했다. (혹은 잠시 가졌다가 놓쳤다)
그런 일이 반복되고 난 이후에 희망을 다시 쳐다보니 내게 희망의 다른 이름은 조롱이었다. 잡힐 것같이 코앞에서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내가 손을 뻗으면 그것은 매번 조금 더 뒤로 몸을 빼서 나를 웃으며 바라봤다. 내가 더 더 손을 뻗을 때마다 그것은 조금씩 뒷걸음쳐 나와 멀어져 갔다. 그렇게 나를 보며 미소 짓고 있다고 믿었던 희망은 여전히 웃고 있지만, 그것은 나에게 미소가 아니라 조롱으로 다가왔다. 희망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는 결코 나를 잡을 수 없지만, 그래도 나를 따라와야 해. 그래야 네가 더 고통받을 테니"
문득 어쩌면 제우스가 판도로의 상자에 희망을 넣었던 이유가 이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순백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향기가 황홀하고, 살짝만 만져도 말랑거리고, 다가가기만 해도 천상의 음률이 들릴 것 같은, 먹음직스러운 희망. 그러나 나에게는 예외였다.
그러나 이제 더는 희망에 속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에도 나는 흔들린다. 다시 내 앞에 빼꼼히 고개를 내밀며 웃고 있는 희망이라는 놈을 보면서 말이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나는 또 속을 것이다. 그리고 또 희망을 향해 손을 내밀어 볼 것이다. 그럼 또 그놈은 웃는 얼굴로 몸을 뒤로 조금 빼겠지. 아주 얄미운 얼굴을 하고는...
어쩌면 제우스가 희망이라는 것을 넣은 이유는 더 오래 고통받으라는 것은 아닐까? 한번 좌절하고 무너지고 끝나면 아쉬우니까 계속 무너지고 무너지라는 뜻으로 희망을 넣은 건 아닐까? 무너져서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는 나에게 희망이라는 존재는 조롱일 뿐이었다. 다시 일어서야 하는 내게 희망은 다시 서야 하는 이유가 아니라 내가 일어서기를 주춤거리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