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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Feb 04. 2020

'회색'

아무것도 아닌 단어 하나

사람을 만나다 보면 종종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은 노란색 같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파란색 같은 사람이구나. 그렇게 사람이 나에게 색으로 다가왔다. 따스해 보이는 사람은 밝은 색 중에 하나로 보였고, 이기적으로 보이는 사람은 어두운 색 중 하나로 보였다.


 내가 생각한 나의 색은 회색이었다.


인간의 품성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것이 본질이라는 성선설, 인간의 품성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것이 본질이라는 성악설, 그리고 인간의 품성은 태어날 때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성무선악설. 나는 그중에 성무선악설을 믿었다.


새하얀 도화지 위에 흰 물감과 검은 물감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도화지는 내 마음이었고, 흰 물감은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검은 물감은 내 마음을 차갑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내 마음이라는 도화지 위에 흰 물감과 검은 물감이 두서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물감들이 섞여 도화지는 회색으로 물들었다.


한때 하얀색을 유지하던 내 도화지, 그러나 점차 나이가 들수록 도화지에는 검은 물감이 떨어지는 경우가 늘어갔다. 내 도화지는 점점 회색이 되었고, 이제는 검은색에 가까운 회색이 되었다. 분명 도화지에 떨어진 흰 물감과 검은 물감이 비슷해 보였음에도...


나중에 알았다. 회색을 만드는 흰 물감과 검은 물감의 비율이 7:3이라는 것을. 내 도화지에는 너무 많은 검은 물감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자 나는 다급해졌다. 내 도화지에 흰 물감이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도화지가 더 어두워지기 전에 흰 물감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내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에게 흰 물감을 떨어뜨려 줄 누군가를 찾아 헤맸다. 더 이상 검은 물감은 넣고 싶지 않았기에 누군가를 찾아 헤매면서도 상대방이 밝은 색을 가진 사람인지 아닌지를 꼼꼼히 살폈다. 나는 그렇게 사람을 만났다.


그런 내 노력은 내 도화지의 색을 바꿨을까? 아니었다. 여전히 내 도화지는 어두운 회색이다. 어쩌면 과거보다 더 어두워진 것일 수도 있다. 흰 물감을 찾아 헤맨 내 모습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아주 늦게 알았다. 내 기준대로라면 내가 검은 물감이었다. 다른 누군가의 도화지를 어둡게 만드는 검은 물감. 그러면서도 나는 밝은 색을 찾아 헤맸다. 돌이켜보니 내 행동이 너무 우스웠다.


그 이후로 나는 누군가를 찾아 헤매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의 도화지를 어둡게 물들이면서 아무 감정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고, 그 사실에 조금의 안도감을 느끼고 있다. 다만 기회조차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찾아 헤매지는 않지만 기회조차 포기한,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는 아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는 삶이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기회를 기다린다.


다람쥐가 겨울잠을 자며 봄을 기다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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