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책으로, 다시 책에서 책으로.. 그 끝에서 만난 플라톤의 국가. 이 책을 처음 접한 건 대학교 3학년 때였다.
대학교 2학년이 끝났을 때, 나는 복수 전공을 선택했다. 원전공은 성적과 취업을 고려해 선택했지만, 그다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복수 전공만큼은 내가 하고 싶은, 나에게 재미를 주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고른 것이 정치외교학과였다.
그러나 전공으로 듣게 된 정외과 강의는 교양으로 들었던 정외과 강의와는 많이 달랐다. 기본적인 지식을 이미 알고 있음을 전제로 하는 전공 수업. 정외를 원전공으로 고른 이들과 복수전공으로 정외를 고른 나와는 그 기본 지식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원전공생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 지식이 나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교수님 강의를 따라가기도, 다른 학생들과 토론을 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게 나에게는 견딜 수 없는 좌절감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찾았다. 철학자와 사상가, 그들의 주장과 한계... 닥치는 대로 읽고 외웠다. 플라톤의 국가 역시 그렇게 읽은 책 중 하나였다. 플라톤, 철인왕, 철인정치.... 나는 책에서 지식을 쌓는 게 아니라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얇고 보잘것없는 정보로 교수님의 강의를 이해하는 척했고, 다른 학생들과 토론을 했다.
교수님에게 질문하는 몇 없는 학생 중 하나, 토론에서 어떻게 해서든 이기려는 열정적인 학생... 겉으로 보기에 나는 원전공생들에 전혀 뒤지지 않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깊이 있지 못한 나의 배움은 언제나 나에게 불안감을 주었다.
그 불안감의 다른 이름은 열등감이었다.
나는 그렇게 항상 열등감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스펀지처럼 말랑거렸지만 속은 온통 날카로운 가시로 가득했다.
나는 왜.. 언제부터 그렇게 된 것일까 생각했다.
내가 누른 되감김 버튼은 끝을 모르고 나를 과거로, 과거로 이끌었다. 대학생에서 고등학생, 고등학생에서 중학생, 다시 중학생에서 초등학생. 나는 계속해서 과거로 과거로 돌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찾을 수 있었다.
내 성적표에 적힌 숫자에 따라 집안 분위기가 변했고, 나를 보는 선생님의 표정이 달라졌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이겨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깨달았다. 화목한 집안 분위기를 위해, 나를 보는 선생님의 표정에서 실망감을 보지 않기 위해 나는 이겨야만 했다. 노력과 인내만이 이기는 법은 아니었다. 감정을 숨기고, 없는 것을 있는 척하고, 가진 것을 더 크게 과장하고... 나는 그렇게 스스로 이기는 법을 배웠다.
반대로, 나는 지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였다. 그러나 나는 항상 이길 수만은 없었다. 점점 무수히 많은 패배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실패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다른 말로 잘 지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였다. 그래서 그 아이는 질 때마다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잘 지는 법을 모르는 아이는 쌓여가는 패배로 점차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지지 않는 것에 연연했던, 그 아이는 겉으로는 학업에 충실한 모범생이었고, 누구에게나 예의 바른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속은 점점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이제는 좀 나아졌으리라 스스로 생각하며 다시 플라톤의 국가를 읽고 있는 그 아이는.
어쩌면 여전히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읽는 플라톤의 국가는 대학교 3학년 때와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정보를 얻기 위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생각을 외우기 급급했던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그들의 생각에 내 생각을 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지금 그 작은 차이에 약간의 만족감을 느낀다.
항상 이기는 사람은 없다. 결국 우리는 계속 져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잘 져야 한다. 잘 지는 법을 배운 사람이 되어야 나처럼 열등감에 사로잡힌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열등감을 만든 것은 집안 분위기가 아니라, 선생님의 표정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내가 열등감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늦었지만 지금이나마 잘 지는 나를 꿈꾼다.
잘지는 우리를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