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낮잠 Mar 07. 2021

20대, 설렘의 추억을 먹고 산다.

모두 어제였던 것처럼

짙푸른 봄이 돌아오면 따가운 그 햇살 아래서
만나리라 우리들은 손꼽아 기다린 날처럼
만나리라 우리들은 모두 어제였던 것처럼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밴드 페퍼톤스 하이파이브 앨범의 <청춘>이다.

이 곡은 영화 족구왕의 OST으로도 사용되었는데, 내가 다녔던 학교가 촬영 배경으로 나오기도 한 곳이라 그런지 그 시절 여러 장면들이 필름처럼 떠오르면서 기분이 몽글몽글해진다.

 

20대에는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채찍질을 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한편으로는 수시로 설레는 마음에 벅차 잠 못 이룬 날도 많았다.

처음 먹어보는 세상의 맛있는 음식들, 어린 시절 사랑했던 락스타를 봤던 날, 나에겐 제3의 세계와 같은 음악 페스티벌 천국, 나만의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상상.. 20대가 되어 맞이한 세상은 만화경 같이 복잡하면서도 알록달록한 세상이었다.


현실 밖 또 다른 세상, 유토피아가 있다면 이 곳일까?

20대에 날 가장 설레게 한 건 음악과 공연이었다. 내가 가진 직업과는 크게 관계없는 순수한 나의 취미 활동이었는데, 업을 바꾸고 싶을 정도로 많이 좋아했다.


25세에 처음 경험한 지산 록 페스티벌은 신세계였다. 세상에 이렇게 재밌는 것이 있었다고??

공연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함께 숙소를 구하고 함께 공연을 보고, 저녁엔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순간은 그동안 내가 살던 세상이 아닌 느낌이었다. 그날 밤 처음 도착해서 봤던 케미컬 브라더스의 Hey Boy Hey Girl와 함께 흘러나오는 비주얼 아트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경험을 시작으로 난 20대 내내 수많은 공연들을 보러 다녔다. 웬만한 페스티벌과 주요 밴드 공연에는 항상 내가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시간에 투자하고, 볼 수 있을 때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원 없이 본 것은 20대에 내가 가장 잘한 일이다.


지금은 방치된 채 멈춰버렸지만 밴드 음악과 공연을 소개하는 인디 캐스트라는 페이지를 운영했었다. 당시에 페이지 구독자를 2만 명 정도까지 키우니, 여러 경로로 반응이 오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이 페이지를 계기로 음악/공연 관련된 이벤트들도 수차례 진행할 수 있었고, 이쪽 업에서 종사하시는 분들과 만남도 갖게 될 기회가 생기면서 뭔가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너무 두근거렸다. 안타깝게도 내가 워낙 미숙했던 탓에, 실제 프로젝트로 원활하게 이루어진 것이 없는 것이 가장 아쉽지만 재미로 시작한 이 일이 나에게 엄청난 설렘과 좋은 상상을 가져다준 것은 분명하다.


아는 것이 없으니 두려움도 없다.

사회 경험이 적고 세상 물정도 잘 몰라 모든 일에 미숙하다 보니, 어떤 일을 시작할 때 크게 고민을 하지 않았다. 해보고 싶다 생각이 들면 바로 찾아서 시작했다.

특히 회사 업무 외의 사이트 프로젝트에도 관심이 많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이거 같이 해보자'라고 떠들며 소란스레 시작한 적이 꽤 많았던 것 같다.

 

깊게 고민을 하지 않고 시작하다 보니 일 벌리기는 누구보다 잘했다. 부끄럽게도 꾸준함이 부족했던 탓에 끝마무리를 제대로 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막상 시작하고 실행해보니 생각보다 많이 어렵거나, 나와 맞지 않은 일이어서 마음고생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무료 봉사해주다시피 남의 일만 해주다 끝난 적도 있었다.


"저는 다양한 시도들을 해서, 여러 시행착오 끝에 이런 성과를 이뤄냈습니다!"

라고 글을 쓰고 싶었는데 슬프게도 아직도 이런 특별한 글을 쓰지는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가끔은 크게 두려워하지 않고 무슨 일을 시작했던 내 모습이 그리울 때가 있다. 조금은 터무니없고 허황되어 보일 수 있어도 마음껏 상상하고 설레는 것이 자유롭게 허락되는 시간은 그 때뿐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괴로웠던 건 뭘 해도 설레지가 않는 것이었다. 매사에 피로감이 느껴지고 그렇게 좋아하던 공연도 체력적으로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재밌고 설레는 일 하나 없이 인생이 밋밋해져 버리는 걸까?


하루하루 추억을 쌓고 재밌는 경험을 하며 파티 같은 하루를 살아가기를 원했다. 억지로 그 느낌을 찾고 싶어 자꾸 뭔가를 시도했는데 피로감만 쌓이는 그 상태가 굉장히 괴로웠다.

시간이 꽤 흘러 지금의 내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쯤, 그 고통의 시간은 서서히 줄어들어갔다.

 

"이렇게 별 일 없는 일상도 인생의 일부분이구나.”


현실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며 무리하게 큰 일을 벌이는 빈도가 줄었고, 내가 실제 할 수 있는 일의 수준과 한계도 알게 됐다. 공연을 즐기는 방식도 뛰어노는 사람들에서 뛰어노는 사람들을 즐겁게 보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회사 밖을 나와 돌아다니면서 하고 싶을 때 일을 하고, 파티 같은 삶을 사는 몽상가였던 20대는 안정적인 회사를 오래 다니면서, 퇴근 후 소소하면서 꾸준하게 내 것을 쌓아가길 바라는 평범한 30대로 바뀌었다.


꿈의 크기가 현실적으로 바뀌면서, 이제는 예전처럼 설레고 두근거릴 일은 없지만 그럼에도 나는 20대의 기억들을 추억 삼아서 살아간다.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그때의 상상들이 설명할 수 없이 이상하게도 힘이 될 때가 있다.

가끔 이불 발차기를 하고 싶을 정도로 그 상상들이 말도 안돼서 얼굴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어설프고 서툴러 실패한 기억들이 미련하게 느껴져 고개를 휘저어 생각을 떨쳐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확실한 건 덕분에 수많은 딴짓들도 해볼 수 있었고, 그 딴짓으로 인해 진짜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이 감정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희미해지는 것 같아 아쉽다.

그래서 잊지 않고 자꾸 꺼내보고 기억하려고 한다.

모두 어제였던 것처럼.






이전 11화 결혼도 남들보다 요란하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